제190화
아덴과 케이가 둘이서 산책을 나간다고 해도 예전처럼 시한폭탄을 보는 듯한 불안함은 들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도 촬영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져 적어도 카메라 앞에서는 싸우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깨닫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예능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오히려 아덴과 케이가 서도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런고로 이제 산책하러 간 두 사람에 대한 걱정을 덜어놓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왜 나를……?’
운동을 한다면 주로 케이와 하던 한야가 왜 굳이 서도화를 지목해 데리고 온 걸까.
서도화는 한야가 멤버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헬스장으로 불러 허심탄회하게 푼다는 걸 알고 있다.
즉 ,한야는 서도화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헬스장에 도착해 몸을 풀었다.
“둘이서 오는 건 오랜만이다.”
“그러게. 형이랑 다른 멤버들이 같이가는 건 많이 봤었는데.”
“도화랑은 거의 안 와봤지.”
눈에 띄는 말썽꾸러기들도 있고 멘탈이 유리 같은 막내도 있으니 상대적으로 덤덤히 할일을 하던 서도화는 굳이 헬스장까지 불러 상담을 하고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으니.
한야가 몸을 푸는 서도화를 보았다.
늘 덤덤하게 모든 일을 잘하는 멤버였는데, 최근 그는 뭔가 이상했다.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뭔가 큰 시름을 떠안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혹시 다른 멤버들에게 신경 쓰느라 서도화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건 아닐까 무척 걱정이었다.
서도화는 한야의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척 했다.
한야가 걱정하는 건 알지만 말해줄 수 있는게 없다.
‘뭐라고 말해…….’
미래에 일어날 큰 사건을 대비하고 있다고? 그런 말을 누가 믿을까.
설령 말할 기회가 생긴하고 해도 카메라 앞에서는 아니다.
‘또 대충 얼버무려야…….’
“하아…….”
서도화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이 늘어갈수록 심적으로 닳고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이를 한야가 빠르게 캐치해 물었다.
“웬 한숨이야?”
“어? 그냥…….”
“역시 무슨 일 있지? 형한테도 말 못 하는 거야? 너 말 못 하길래 일부러 멤버들 없는 곳에서 대화하려고 한 건, 발목 제대로 풀어. 다치고 싶어?”
“어? 어어…….”
걱정은 걱정이고 운동은 운동. 그 와중에 서도화가 몸 풀기를 대충하면 칼같이 지적이 들어왔다.
서도화는 반사적으로 냉큼 자세를 바꾸곤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긴 한데, 진짜 말하기가 복잡하네. 사실 내 선에서 해결이 가능한지도 모르겠어.”
이 일에 대해선 한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위로하겠답시고 헬스장까지 따로 불러낸 배려를 무시할 순 없다.
몸 풀기가 끝나자 한야는 서도화를 운동기구 앞에 데려다놓았다.
자연스럽게 한야 코치의 말을 들으며 운동을 시작한 서도화, 한야가 물었다.
“도화 혼자 해결 못 하는 거면 형이나 회사 직원 분들과 이야기 해보면 어떨까?”
“근데 진짜 복잡해서 사실 카메라 앞에서 말하고 싶진 않아. 어려워도 내 일-”
“혼자선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를 혼자 고민하고 있는 거 너무 괴롭지 않아?”
서도화가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안 돼. 도화야. 여기서 멈추면 다쳐. 덤벨 내려놓고 멈춰.”
“어? 어어…….”
서도화가 덤벨을 내려놓고 한야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생각이 많고 궁지에 몰려 극한을 스트레스를 받았을 땐 의외로 별 거 아닌 위로나 말에 큰 감명을 받게 되기도 한다.
또 어쩔 땐 평소에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방금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아 그렇네?’
하는 과감한 생각이 든 것이다.
서도화와 아덴, 케이가 어메스가 된 이상 한야와 주상현을 포함해 이들을 관리하고 함께 나아가는 유제이의 직원들은 다 같이 한 배를 탄 것이다.
하다못해 직원들에겐 비밀을 유지한다 치더라도 한야와 주상현에겐 사실을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룹 소속 멤버의 폭로 글이 이슈가 되는 건 비단 동갑내기 삼인방만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꼭 폭로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야와 주상현에게 두 사람의 비밀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을 의문점의 상당수를 해소해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면 서도화와 아덴, 케이 또한 가장 큰 협력자가 생기는 것이다. 이후로는 그들 앞에서는 비밀없이 자기자신을 고스란히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괜찮은데?’
말하자. 말해보자.
서도화는 흘리듯 한야에게 말했다.
“그, 숙소로 돌아가면 꼭 말할게.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한야는 기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다행히도 서도화는 자신들의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두 사람이 단번에 믿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 *
“…….”
“…….”
산길을 오르는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용사와 마왕이 무기 하나 들지 않고 그저 나란히 산을 오를 뿐인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분명한 적이지만 지금은 모종의 일로 인해 휴전 중, 그러나 서도화가 붙잡고 있는 속박만 내려놓으면 바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둘.
아직 앙금도 풀리지 않았고 1년 정도 함께 보내며 누그러지긴 했지만 실은 꼴도 보기 싫은 그런 관계였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할 말은 많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산만 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산책로의 중간 지점에 도착했을 때 쯤. 아덴이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 왜 따라왔냐?”
“너를 추궁하기 위해 따라붙었다.”
“추궁? 뭐? 뭐라는 거야.”
아덴이 카메라를 힐끔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 또한 답답한 듯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덴을 추궁하기 위해 불편함을 참고 여기까지 쫓아왔건만, 설마 카메라가 따라붙을 줄은 생각 못한 것이다.
촬영은 숙소 안에서만 할 뿐 외부에서는 안하는 줄 알았다.
아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일단 물었다.
싸울 수는 없는 상황, 일단 말이라도 들어보자.
“할 말이 뭔데.”
아덴의 물음에 케이는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에 가져다대곤 제 허리춤에 달린 마이크 기기를 꺼버렸다. 그러곤 너도 끄라는 듯 아덴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덴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말대로 마이크를 끄자 이번엔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가 너를 추궁하는 데에 이 카메라와 남자는 방해되는군.”
“……네?”
케이가 카메라를 노려보자 멤버의 뜬금없는 막말에 당황한 카메라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를 쳐다보았다.
케이와 눈을 마주한 남자. 그는 잠시 후 영혼이 빠져나가듯 얼굴 근육이 풀리더니 툭 바닥에 쓰려졌다.
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기절시켰다. 죽인 건 아니야. 곧 일어날 테니 힘만 무식하게 센 네가 대화를 마친 후 짊어지고 가거라.”
“뭐 무식? 지는 무식한데 힘도 없으면서.”
쓰러진 카메라맨의 위에 카메라가 둥둥 떠 있다. 케이는 카메라를 빤히 보더니 손으로 허공을 쓸었다.
그러자 카메라에 짧은 스파크가 튀고 이내 모든 기능이 꺼진 채 카메라맨의 곁에 안착했다.
케이가 찌릿한 제 손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
제 심장, 힘 그 자체.
마왕의 모든 힘이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핵이 사라진 직후부턴 이 정도 간단한 마법을 쓰는 것만으로도 긴 시간 동안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서도화의 말로 하면 쿨타임.
고작 사람 하나 기절시키고 기계 하나 고장냈을 뿐인데 핵이 없다는 이유로 적어도 몇 주간은 힘을 쓰지 못하고 또 없는 마나를 꾸역꾸역 모아야 할 것이다.
케이는 제 몸 상태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아덴을 바라보았다.
“이제 너와 나의 대화를 듣는 자는 아무도 없다. 지금 서도화는 한야 형의 지적을 받고 있고, 주상현 그 아이는……. 제작진과 밀담을 나누고 있군.”
케이가 주변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말했다.
아덴이 쳇, 혀를 찼다. 핵이 없는데도 사람 하나, 기계 하나 가볍게 망가트리고 한참이나 떨어진 거리의 소리를 들으며 멤버들의 위치와 상황을 파악한다.
핵이 없는데도.
새삼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상대와 싸웠었는지 실감나는 일이다.
“뭔데. 할 말 있으면 빨리 물어. 네놈이랑 조금도 같이 있기 싫으니까.”
카메라도, 마이크도 사라지자 아덴의 말도 자연스레 거칠어졌다.
케이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너, 그리고 음유시인. 그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더군.”
케이의 말에 아덴의 눈에 더욱 날이 섰다.
아무리 작게 말하고 최대한 도화와의 대화를 줄여도, 저놈의 좋은 귀로 죄다 들어버리니 역시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원 세계의 네 동료들과 연락도 하는 모양인데. 나에게 말하지 않은 건 날 이곳에 버려두고 넘어갈 생각이었나?”
케이가 최근 들어 말이 없던 이유. 갑자기 춤 연습 등에 열정을 잃은 듯 헤이해보였던 이유.
뭔가 고민이 있거나 나태해져서가 아니었다.
서도화와 아덴이 돌아갈 방법에 논의하는 걸 듣고 좀 더 그들의 속닥임에 집중하기 위해 입을 다물었던 것이었다.
곧 돌아갈 테니 노력해 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게 소용없다고 생각해 하지 않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