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일타이피.
모든 것이 서도화의 계획대로였다.
“너……너……!”
우선 한야의 요주의 대상 케이를 앞장세워 한야의 시선을 끌면 한야가 케이를 쉽게 제압해버린다.
한야가 케이의 풍선을 터트리려 한눈팔고 있는 사이 서도화가 달려가 온몸으로 한야를 제압하고 그 틈에 서도화의 비기 아덴이 한야와 더불어 케이의 풍선까지 처리해버린다.
그야말로 완벽한 작전.
“너희 이렇게 셋이서 덤비는 건 비겁하잖아~ 너무 아쉽다.”
한야가 가면 쓴 제작진들에게 끌려가며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말했고 뒤따라 끌려가는 케이는 한야와 완전히 상반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서도화를 쏘아보았다.
“같은, 같은 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배신 한두 번 당해보냐?”
서도화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상황도 오늘 처음 겪은 거 아니잖아?”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치듯 배신하고 게임을 이기려는 것뿐이다.
서도화와 아덴이 케이를 골려 먹는 건 그들이 어메스가 된 이후 언제나 같았고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웃었을 뿐이었다.
“나는, 잠깐이지만 너를 믿었다! 서도화!”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케이의 기색이 이상했다. 서도화가 웃음기를 지웠다. 케이는 분한 게 아니라 정말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케이가 상처를 받았다고? 마왕이 고작 게임을 위한 배신에 상처를 받았다고?
‘날 진심으로 믿었다고?’
서도화는 케이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차렸지만 당장은 더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터억! 서도화는 제 어깨로 올라오는 투박한 손을 빠르게 피했다.
“야 이렇게 갑작스럽게 공격하냐?”
“게임 하는 중에 한눈을 팔잖아. 네가.”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주상현, 한야, 케이를 모두 탈락시키고 남은 사람은 서도화와 아덴.
고가의 블루투스 이어폰을 위해서는 눈앞의 용사 아덴을 탈락시켜야만 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워낙 몸 쓰는 데에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다 보니.
서도화가 조용히 뒷걸음질 치자 아덴이 동네 건달처럼 까드득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이리 오라 까딱였다.
“어딜 도망가? 빨리 끝내자. 우리 시간 없어.”
“쟤 무슨…….”
서도화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뒷걸음질 치다 카메라맨을 보고 말했다.
“저 너무 무서운데. 기권해도 되나요?”
아덴과 싸운다고 죽거나 다치는 게 아닌 건 안다.
하지만 곧 저 전투 천재가 자신을 덮치고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니 심리적 압박이 굉장했다.
실제로 아덴과 말싸움은 수시로 하고 전투 비스무리한 것도 해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서도화가 하프를 들고 있을 때의 일이다.
몸으로 싸우면 절대 못 이긴다.
‘저걸 내가 이길 방법이 있을 리가…….’
그때 지루한 얼굴로 어이없어하며 서도화를 쳐다보고 있던 아덴이 갑작스레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잠시만. 야, 잠시만.”
“그냥 한 번에 끝날 걸 시간 끈다고 승자가 달라지냐? 원래 이런 건 빨리 치고 빠져야 하는 거야.”
“아니, 지는 건 모르겠고 무섭다니까?”
서도화가 달려서 도망쳤고 아덴의 그보다 더 빠르게 달려 서도화를 붙잡았고 서도화는 기겁하며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맹수에게 잡힌 초식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몸싸움 같지도 않은 몸싸움이 아주 짧게 오갔고 곧 퍼엉! 서도화는 일타이피의 신화가 무색하도록 허무하게 탈락했다.
“여어! 당연히 내가 이기지!”
아덴이 시원스레 큰소리쳤고 서도화는 허망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가면 쓴 제작진들에 의해 일으켜졌다.
“……무섭다. 너.”
“뭐가?”
“괜찮냐?”
“어? 아 괜찮아. 풍선 터지는 소리 예상했어.”
서도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씁쓸하게 제작진들에게 끌려 기숙사 한구석에 마련된 탈락자들의 공간으로 향했다.
“여어, 배신자 오셨어요?”
서도화가 방으로 들어가자 주상현이 삐죽이며 툭 말했다.
서도화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탄식했다.
“진짜 너무 아쉽다. 이어폰 가지고 싶었는데.”
“와, 형. 그게 동생들을 밟고 올라가서 쟁취할 만큼 중요했다는 거야?”
“그거 가지고 싶었던 이어폰이어서.”
“매정하다 매정해.”
“원래 게임은 속고 속이고 그러는 거야. 뭐가 그렇게 억울해?”
주상현과 서도화의 대화를 한야와 제작진들이 낄낄거리며 지켜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도화 씨도 두 분 탈락하시자마자 거의 바로 아덴 씨한테 탈락하셨죠.”
“솔직히 아덴을 힘으로 어떻게 이기겠어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도화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야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마 지금쯤 우승자인 아덴이 제작진에게 상품인 이어폰을 받고 있을 것이다.
아덴 쪽의 촬영이 마무리되는 동안 이곳은 카메라만 켜놓은 채 잠시 대기, 역시나 주상현이 주축이 되어 멤버들 간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서도화는 케이를 힐끔거렸다.
케이는 아까부터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워낙에 조용한 개그 이미지라 카메라엔 평소처럼 조용하게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어쩐지 서도화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아까 전 서도화가 자신을 배신했던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원래 같으면 배신하거나 말거나 꿈쩍도 안 할 놈이.’
서도화가 아는 케이는 이런 상황에 ‘네놈 음유시인! 역시 그럴 줄 알았다!’라며 씩씩댈지언정 상처를 받을 성격은 아니었다.
아덴과 서도화에게 무언가에 대한 기대 자체를 안 하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건 명백히 계속 같은 팀일 거라고 기대했다가 배신당한 모습이 아닌가. 마왕이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실망하고 서운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괜히 저러면 또 물어보고 싶어지는데…….’
서도화는 조금 뒤 게임이 모두 마무리되면 케이에게 물어나 보자 생각하곤 시선을 거두었다.
잠시 후.
“이게 그 비싼 이어폰이냐? 이거 내 거다.”
“아덴 형도 진짜 얄미워! 둘 다 똑같이 얄밉다 진짜. 그치, 케이 형?”
의기양양하게 이어폰을 들고 들어오는 아덴에게 주상현이 투정 부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마지막 게임이 끝났다.
“자, 게임은 끝났으니까 멤버들 모두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시면 됩니다!”
촬영이 정리되는 분위기, 한대의 카메라를 제외하곤 모든 카메라의 불이 꺼졌다.
멤버들도 하나둘씩 일어나는 찰나 아덴이 서도화를 붙잡았다.
“야.”
“어?”
아덴이 서도화의 배 쪽으로 무언가를 디밀었다.
“깜짝이야. 뭐야.”
그 모습이 마치 날붙이를 배 쪽에 가져다 대는 듯해서 서도화가 깜짝 놀라 물러서며 아덴이 내민 것을 내려다보았다.
“……어?”
이어폰이 든 조그만 박스였다.
서도화가 무심결에 박스를 받아들며 획 고개를 들어 아덴을 쳐다보았다.
“나 주는 거냐?”
아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게 뭐가 좋은지도 몰라. 너 해.”
아덴은 상품이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기기 위해서 서도화를 꺾었다.
그런데 막상 이기고 나니 서도화가 너무 아쉬워하며 끌려가던 게 마음에 걸렸다.
서도화는 이어폰 상자를 요리조리 살피더니 활짝 웃었다.
“고맙다. 잘 쓸게.”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쉬어라.”
아덴이 획 몸을 돌려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서도화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서도화가 행복하게 이어폰 상자를 꽉 쥐었다.
이럴 때 보면 개고생하면서 케어한 보람이 있네.
이제 이 음질 좋은 고급 이어폰은 서도화의 것이다.
서도화 또한 흐뭇하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케이가 서도화를 지나치며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벗어났다.
“아…….”
아까 배신한 일로 기분 상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저렇게 빨리 사라지는 걸 보아 기분이 상한 게 맞는 모양이다.
왜 마왕답지 않은 짓을 하는 걸까?
‘일단 대화나 나눠보자.’
서도화가 케이를 따라가려 방에서 나오자 케이가 벽에 기댄 채 표정 없이 서 있다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마치 서도화를 기다리고 있던 듯한 모습이었다.
서도화는 멈칫거리다 케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혹시 나 기다린 거야?”
“그래,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부탁할 것이 있다.”
부탁?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서도화는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들어는 볼게. 나도 너한테 물을 게 있고.”
“그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를 따라와라.”
케이는 그를 어메스가 묵기로 한 방이 아닌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다른 방으로 이끌었다.
그러곤 방에 들어가자마자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꺼버렸다.
……이래도 되나?
서도화는 케이의 과감한 행동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의 마이크도 꺼버렸다.
어차피 화장실에 갈 때나 잘 땐 꺼도 된다고 말했었고 서도화가 물을 것도 마이크가 켜진 상태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으니.
서도화가 바닥에 앉으며 케이에게 물었다.
“부탁할 게 뭔데? 어려운 건 아니지?”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너에겐 쉬운 일이지.”
“뭔데.”
케이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실험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네가 노래를 불러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