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구비구비 꼬인데다 깎아지른 듯 높아 걸어서 올라오기도 힘들 것 같은 달동네의 꼭대기. 그곳에서 아덴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일반 사람이라면 보이지도 않을 거리에 숨어있던 케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케이는 아덴을 향해 무어라 입을 벙긋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아덴은 케이만큼 귀가 좋지 않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간의 대화들로 유추해보자면 ‘협조하러 왔다’는 등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쪽팔려서 욕이라도 내뱉고 있겠지.’
혹은 헉헉 아이고 힘들다일지도.
아덴은 이곳으로 오는 케이를 빤히 보고 있다 정신을 차리곤 발길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저게 서도화나 멤버들도 아니고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아덴이 서도화가 보내준 주소와 집집마다 붙은 주소 스티커를 번갈아 확인하며 로건 리의 집을 찾고있자 저 멀리서부터 뜀박질과 함께 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라는 소리 안 들리는가!”
“어, 하나도 안 들리던데.”
체력도 없는 게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달려왔대.
아덴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한숨을 쉬며 다시 할 일에 집중했다.
“왜 왔는데.”
“흥. 내가 네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게 신기한가? 신기할 것 없다. 마왕이 용사의 일을 감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아, 그러니까 너는 날 감시하러 왔다?”
“그런 셈이지.”
“그럼 주소나 찾아봐.”
“……뭐?”
아덴이 신경질적으로 제 휴대폰을 케이에게 넘겼다.
케이는 얼떨결에 넘겨받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엔 서도화가 보내준 로건 리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게 뭐냐는 듯 아덴을 바라보자 아덴이 주머니에 손을 꽂곤 건달처럼 말했다.
“난 주소 찾는 데 재능 없어. 늘 다른 동료들이 찾아줬다고.”
아덴의 주변엔 서도화와 하이넬을 포함한 유능한 동료들이 정말 많았다.
이를테면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는 일이나, 적진에 잠입할 루트를 찾는 일 등은 머리 좋은 동료들이 하는 일이었지 아덴의 일이 아니었다.
전투나 의사결정 이외의 일은 동료들이 대신해주었던 아덴에게 건물명도 제대로 적혀있지 않은 이 동네에서 로건 리의 집을 찾으라는 건 전투보다 더 난이도 있는 일이다.
아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그래도 머리 좀 쓰지 않았나? 몸으로 부딪치기보단 뒤에서 비겁하게 부하들 조종하면서 싸웠잖아.”
아덴의 비꼼에 케이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그래, 난 너처럼 무식하게 힘만 쓰지는 않지. 방금 또 한 번 깨달았다. 넌 네 동료가 없었더라면 내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했겠군. 길도 못 찾아서야.”
“그런데 얼씬해버렸네? 네 말대로 무식하니까 동료들과 함께인 거야. 혼자 가든 동료들과 함께 가든 널 잡아 족치는 데 성공했으니 됐지.”
아덴이 피식 웃으며 어서 가자 손짓했다.
“갈래 말래? 돌아가든지 아니면 집 찾아주든지. 어느 쪽도 상관없어.”
“한심하고 무례한 놈. 가지.”
케이는 더 오를 수 있나 싶은 골목을 더 올랐다.
네비게이션이 틀린 건 아닌 듯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로건 리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가 로건 리의 집이라는 군.”
“생각보다 괜찮네. 예전에 내가 살았던 곳과 비슷해.”
“내 생각도 같다 용사여. 그래도 먹고 사는 데 문제는 없었겠군.”
두 사람이 보고 있는 로건 리의 집은 다 무너져내리기 일보 직전의 작고 낡은 집이었다.
어메스 멤버들이나 직원들이 봤으면 ‘지금까지 이런 집에서 살았단 말이야?’ 싶을 정도로 허물어진 판잣집이었지만 가족들이 죽고 혼자서 무너진 집에 살던 아덴과 부모에게 버려져 길바닥에서 살던 케이에겐 그저 그들이 살던 곳과 비슷한 곳으로 보였다.
“암호를 쳐야 들어갈 수 있나 보군. 집으로 들어가는 암호를 알고 있나?”
“암호? 그냥 비밀번호라고 하면 되잖아. 도화한테 받았어. 기다려봐.”
아덴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현관문으로 다가가 도어락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도어락이 툭 통째로 아덴의 발치에 떨어졌다.
“뭐야…….”
“힘만 무식해서는…….”
“뭔 소리야. 내가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얘가 떨어진 거야. 허술하게 매달려있었겠지.”
아덴은 인상을 찌푸리며 떨어진 도어락을 발로 툭 차곤 여전히 잠긴 문을 달칵였다.
“주워라 아덴. 이곳 세계에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는 말도 못 들었는가?”
“네가 주워.”
“어이없군.”
“아, 이거 왜 안 열리냐.”
쾅! 콰앙! 아덴은 문을 달칵이다 발로 문짝을 걷어찼고 몇 번 차인 쇠문은 살짝 구겨진 채 힘없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안쪽으로 보이는 풍경.
“아무것도 없네.”
“생활감은 있군. 먹고 자고 했던 건 틀림없다.”
“그건 나도 알아.”
먹고 제대로 치우지 않은 컵라면에서 악취가 흘러나왔고 주변으로 벌레가 꼬여있다.
언제 빤 건지 더러워 보이는 이불, 검게 그을린 장판.
서도화가 봤더라면 무턱대고 한숨부터 푹 쉬었을 광경이었다.
“여기는 부엌도 없나?”
아덴이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곤 방에 달린 쇠문을 열어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쇠문이 끼익 하고 열리자 시멘트가 발린 부엌이 있었다.
“여긴 좀 구조가 우리 사는 아파트랑 다르네.”
“원래 세계의 집 같군.”
집안이라기보단 밖에 달렸다고 말하는 게 맞는 듯한 부엌, 적당한 크기의 적갈색 대야엔 물이 담겨 얼어있고 부엌의 끝엔 보지 못했던 구조의 세탁기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쇠문 하나가 더 달려있는데 아마 화장실로 향하는 문인 듯했다.
하아. 작게 숨을 내쉬면 입김이 폴폴 나는 추운 부엌과 좁은 방. 이곳에서 로건 리는 컵라면을 먹으며 버텨왔던 모양이었다.
아덴은 멍하니 집안을 둘러보다 옷장으로 향했다.
“마왕,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라.”
“허? 도와준대도 안 받는 건 네 손해다.”
“차라리 손해 보고 말지. 죽어도 네 도움은 안 받아.”
“……멋대로 해라.”
케이는 뾰로통해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껏 협조하겠다는데 저런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보다니.
물론 케이가 소싯적 아덴의 뒷통수를 많이 후드려치긴 했다. 그래서 쉽사리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건 맞다만, 그래도 함께 지낸 지 이렇게 오래되었고 그간 몇 번 진솔한 대화도 나눠봤으면 이제 믿을 때쯤 되지 않았나?
케이의 불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아덴이 말했다.
“넌 증거 보이면 숨겼다 처분할 것 같다.”
“내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하지?”
“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고?”
“……그럴듯하군.”
확실히 1년 전의 자신이라면 그랬을 법하다. 케이는 납득하며 아덴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덴의 옷장 속 로건 리의 것으로 보이는 옷들을 뒤져보곤 방안의 서랍을 모두 열어보았다. 간혹 백 원짜리 동전이나 영수증, 사글세 계약서 같은 건 발견되었지만 딱히 서도화가 원할 만한 증거물은 아닐 것 같았다.
“흐음…….”
아덴이 난감해하며 더 찾을 게 없는지 방안을 둘러보던 찰나 헤진 이불 근처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책가방을 발견했다.
‘로건 리의 가방인가?’
아덴이 획 가방을 낚아챘다.
가방 위에 쌓여있던 먼지가 폴폴 허공을 날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케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먼지 때문이 아니었다.
“피 냄새가 나는군.”
“……피?”
아덴이 가방을 획획 돌려 살폈다. 가방의 구석구석에 피로 보이는 흔적들이 스크래치처럼 남아있었다.
“뭐가 좀 들었네. 무게가 있어.”
아덴은 즉시 가방의 지퍼를 열어 안의 물건들을 바닥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나오는 교과서와 로건 리의 물건들.
아덴이 씨익 미소 지었다.
“찾았다. 증거가 될 만한 거.”
로건 리의 많지 않은 재산의 대부분이 여기 들어있었다고 봐도 좋았다. 휴대폰, 노트, 지갑, 약봉지 등등.
아덴은 굳이 이것들을 살피지 않고 바로 제 가방에 넣었다. 이걸 살피는 건 서도화가 할 일이고, 뭔가 더 살필 게 없는지 찾아볼 요량이었다.
아덴이 로건 리의 가방을 내려놓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없나. 그렇게 살피고 있을 때 케이가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쓰레기통을 뒤져라. 뭔가가 있을 지도 모르지.”
“아아.”
쓰레기통이 있었네. 아덴은 별 거부감도 없이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쓰레기더미에서 구르다 온 아덴인데 쓰레기 뒤지는 것쯤이야.
그러다 쓰레기통의 제일 밑바닥에서 구겨진 서류 몇 가지를 찾아냈다.
[진료기록서]
“꽤 도움 되는 조언도 하네.”
아덴이 픽 웃곤 이 또한 가방에 집어넣었다. 케이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용사, 마음을 열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람의 말을 들어라. 도와준대도 못 믿는구나.”
“네가 사람이냐? 그래도 네 말은 안 믿어.”
이제 챙길 건 어느 정도 챙긴 듯했다.
아덴이 케이의 말을 설렁설렁 맞받아치며 이병수에게 슬슬 돌아가겠다는 문자를 보내려 할 때였다.
“여기냐?”
“백 퍼 맞아. 졸업하기 전까지 불티나게 왔었거든.”
“와 시바 아지트네. 이 정도면 친구 아니냐?”
“뭔 개소리야? 지랄하지 말라고.”
바깥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덴과 케이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뭐야. 여기 도어락 왜 떨어져 있냐? 문 열려 있는 거 아님?”
“문 누가 부숴놨냐? 너냐?”
“나겠냐?”
누군가가 로건 리의 집 문을 발로 툭툭 차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