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이곳의 인간들은 참 그간의 감상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일일이 알맞은 문장과 감정을 찾아내어 말하는 게 여간 성가시긴 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저 마왕인 자신에게 패배의 보고를 올리던 수많은 부하들이 그간 꽤 부담스럽고 심사숙고했겠구나 싶을 뿐.
‘그동안의 일을 돌아보는 건 참 중요하지 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어나가던 케이는 어느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졌음을 느끼고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가?”
“뭐가?”
“뭐냐니?”
케이는 서도화의 능청스러운 ‘뭐가?’에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는 척 되묻는 서도화는 웃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고 다른 멤버들도 전부 -용사는 제외-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무척 기분 나쁜 미소였다.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가?”
“기특해서.”
“……뭐?”
뒤에서 들려오는 한야의 목소리에 케이가 획 뒤돌아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케이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손이 올라와 쓱쓱 쓰다듬었다.
“맞아요. 형 너무 기특하다. 이제 솔직해지기로 한 거야?”
“무슨 소리냐 그게!”
기특하다는 건 그냥 기특하다는 거다.
물론 서도화는 그냥 그의 변화가 웃겨서 웃은 것이지만 다른 멤버들은 솔직하게 말하게 된 케이가 기특해서 웃은 게 맞을 거다.
케이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한야의 시선은 서도화에게로 향했다.
“그럼 도화는? 이번 활동 어땠나요?”
“저도 엄청 좋았어요. 역시 무대 위가 좋구나 노력하길 잘 했네. 그런 생각을 매 순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활동했던 것 같아요.”
벅차고 감격스러운 마음은 여전하지만 서도화는 이제 이 부분에 대해 조금 감정을 진정시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서도화가 짧게 소감을 말하고 나자 마지막으로 한야가 제 소감을 말했다.
“저 또한 밀리언 아이돌 이후 처음 보여드리는 모습이라 여러분들이 좋아해주실까 불안하기도 하고 기대하기도 하고 했었는데요. 다행히 저희 괜찮게 잘 한 것 같아서 활동이 끝난 지금에서야 안심이 되네요.”
“형이 불안해했었어?”
“진짜?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서도화와 주상현의 물음에 한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엄청 불안했었지.”
모든 일에 태연자약해 보이겠지만 한야 또한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데뷔하는 것이다.
거기다 데스티니의 대표, 제 품을 떠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던 제 아버지의 품을 떠나 보이는 활동, 분명 제 아버지가 어메스의 활동은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카메라가 있는 곳에선 한 시도 마음을 놓은 적 없었다.
멤버들이 놀랄 만큼 티를 안냈지만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고요 여러분들 덕분에 무사히 활동을 마무리했는데요.”
“맞아요. 여러분도 재밌으셨나요?”
“다음 컴백까지 또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저희가 준비한 게 많으니까요. 맞죠?”
“네!”
멤버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데뷔 활동이 끝나고 바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제이와 어메스가 아무런 준비 없이 모든 사태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다.
멤버들은 논란 와중에도 끝까지 아덴의 진실함을 믿으며 사태가 끝난 뒤의 컨텐츠를 착실하게 준비해왔다.
이를 테면 멤버 개개인의 솔로 스페셜 클립이라던가 예능 멤버들의 프로그램 고정 출연 등등.
이제 막 데뷔한 신인치고 다음 컴백 일정을 여유롭게 잡았기 때문에 대신 휴식기의 일정을 효율 좋게 사용할 예정이다.
“다음 앨범까지 기다린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뒀어요.”
“맞아요! 여러분 기대하세요!”
멤버들은 그 이후 근황토크를 이어나갔다.
주로 숙소에서 있었던 일이나 주상현이 본가로 돌아갔을 때 있었던 일, 활동 도중에 있었던 일화 등등을 말했다.
신기하리만치 웃겼던 일엔 틀림없이 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저는 케이 형이 게임 엄청 잘하는 줄 알았거든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형들-”
주상현이 허공에서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서도화, 아덴, 케이를 가리켰다.
“게임으로 이어진 우정이잖아요.”
“그게 뭐야. 게임으로 이어진 우정이라니?”
아덴이 키득거리며 서도화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우린 게임이 아니고 진정한 우정으로 이어진 사이거든?”
“아무튼. 게임을 되게 좋아해서 별명까지 만들어 부르는 세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세 사람 되게 게임 잘할 줄 알았거든요?”
사건이 모두 마무리되고 멤버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을 때쯤, 주상현이 결국엔 마왕을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임을 발견해 같이하자고 가지고 왔었다.
멤버들은 주상현의 초롱초롱한 눈에 넘어가 결국 함께 플레이 해주었었다.
함께 안 해주면 눈물이라도 한바가지 쏟을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케이의 처참한 게임 실력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이세계에선 그렇게 계략을 잘 짜고 수없이 용사 일행을 함정에 빠트렸던 마왕이 게임엔 무척이나 약하더라.
전략은 여전히 잘 짜는 듯하긴 한데, 손가락이 뜻대로 안 움직이는 듯 했다.
“난! 직접 움직이기는 게 아닌 누구에게 지시하고 명령하여 강해진다! 이걸 못한다고 약한 게 아니다!”
‘라고 했었지.’
주상현의 놀림에 얼굴이 빨개져선 해명하는 모습이 굉장히 웃겼다.
서도화는 예전부터 연습생 형들을 따라 피시방에 가기도 했었으니 꽤 잘하는 편이었고 의외로 아덴도 게임에 재능을 보여 가끔 주상현과 서도화를 이기기도 했다.
“못하는 게 아니고 잘하는 게 다른 거다! 너는 그런 게임을 잘하겠지만 나는 전략적으로 누군가를 지시하는 걸 잘한다.”
“아니 형, 그 게임도 전략 게임이었다니까? 참나. 그냥 아까처럼 솔직해지자고. 손가락이 안 움직여요!”
카메라 앞에서 의외의 조합으로 짧은 다툼이 일었다.
주상현을 키득되며 케이의 말을 받아졌고 케이는 아득바득 자신을 게임도 잘한다는 신념을 밀어붙이다 말이 안 통한다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이젠 상현이까지 합세했네
-이런 모습을 너무 보고 싶었어ㅠㅠㅠㅠ
-아이고 케이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음으로 가득한 채팅창. 이를 지켜보는 이병수의 얼굴에도 미소가 만연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멤버고 팬이고 할 것 없이 웃음을 잃었다. 숙소에 가면 적막만 가득했었는데.
‘우리 애들은 역시 이래야지.’
이렇게 즐겁게, 아니 이것보다 더 난장판으로 놀아야지.
오랜만에 보는 즐거운 광경이었다.
근황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팬들과 공유했으니 다음으로 그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팬들과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미뤄두었던 이야기.
그 사건에 대해.
물론 대놓고 사건을 크게 언급하진 않겠지만 둘러둘러서 이들은 할 수 있는 말을 해야만 했다.
평소보다 많은 시청자수.
분명 어메스의 팬이 아니지만 그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들도 이 방송을 보고 있을 것이다.
한야가 멤버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방송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헉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너무 아쉽다. 그쵸? 오랜만에 방송 켰는데.”
“맞아.”
아덴 또한 오랜만의 화목한 분위기가 무척 좋았는지 이대로 끝내기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멤버들은 괜히 라이브 방송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다 툭 하고 말했다.
“그리고 여러분, 저희에게 꽤 아팠던 일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계시겠지만 이제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한야의 말에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여러분 이제 큰일은 다 마무리되었으니까 그리고 저희도 이렇게, 상현이가 말했던 것처럼 게임도 하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여러분들도 걱정 말고 늘 웃으며 행복하게 지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덴이 서도화를 힐끔거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로 이제 괜찮고요. 그 일이 있고 저희 멤버들이랑 회사분들이 끝까지 저를 믿어 주셨거든요.”
멤버들이 말없이 아덴을 지켜보았다.
“정말 아무도 저를 의심해서 질책하거나 그러지 않고 믿어주셔서 정말로 괜찮아요.”
아덴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진짜 로건 리였다면, 아니 지금의 자신이라도 멤버들과 소속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끊임없이 추궁했더라면? 자신을 버렸더라면? 그렇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절대로 못 버텼을 것이다.
사람을 말 한 마디로만 믿어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터인데-물론 회사 입장에선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긴 했다- 끝까지 편이 되어 대신 싸워주었으니 이보다 감사할 수 있을까.
이제 아덴에게 이들은 원래 세계의 동료들만큼이나 놓을 수 없는 인연들이 되었다.
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열심히 해.”
서도화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아덴의 등을 툭 쳤다.
“그리고 여러분, 설마 믿으시는 분들은 없겠지만 너튜브 같은 곳에 아덴이 멤버도 괴롭힌다, 사이가 안 좋다 이런 거 전부 사실이 아닌 거 아시죠?”
“절대 아니죠.”
주상현이 팔로 크게 엑스 자를 그렸다.
서도화가 말했다.
“저희는 다섯명 다 단란하게 잘 지내고 있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친해지고 있어요.”
“맞아요. 보일 때마다 속상하더라고. 절대 아닙니다.”
멤버들은 해명할 건 재차 해명하고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연달아 꺼내놓으며 팬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사건의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며 방송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