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자, 오늘도 힘차게 시작해 볼까요.”
“와 저 형은 아침부터 왜 저렇게 시끄러워?”
“야! 오프닝인데 니처럼 그리 축 처져서 되겠나? 보는 시청자 분들이 다 처지겠다.”
강호혈전의 고정출연진들이 오프닝 진행을 시작했다.
서도화는 이를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며 분위기를 파악했다.
저들은 거칠기만 한 게 아니고 방송 진행의 프로다.
무려 5년 가까이 큰 멤버 교체 없이 함께한 출연진들.
그러다 보니 오프닝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다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게 카메라 앞에서 전할 말은 전하는 둥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불필요한 분량은 만들지 않겠다는 듯 편하게 진행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필요한 멘트만 하고 있는 것이다.
‘게스트들이 한 마디도 못하는 이유를 알겠네.’
저들은 프로다.
방송에 쓰일 멘트와 쓰이지 않을 멘트, 그리고 편집될 분량 사용될 분량을 확실히 알고 있을 터.
거기다 고정 출연자들의 분량 욕심이 많고 게스트에게 가차 없는 것까지 더해서…….
아무리 게스트라도 쓸데없는 멘트를 날리면 철저히 배척시키는 방송이라 이거지.
실제로 지금도 그런 상황이 몇번이고 일어나고 있다.
“네가 무슨 몽키도 아니고 자꾸 우끼끼거리네? 바나나 줄까?”
“…….”
“…아 형님…….”
“하아…….”
베테랑 예능인이라도 하는 말마다 웃길 수는 없다.
출연진 중 한 명인 김적장이 무리수 멘트를 두자 밝고 신나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한순간에 싸해졌다.
누가 봐도 방송에 쓰이지 못할 장면이었다.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서도화는 보기만 해도 움츠러드는 분위기. 그러나 김적장은 그들의 타박이 당연하다는 듯 무안하게 웃었다.
“아, 이거 아니야? 아이고. 죄송합니다! 여기는 감독님, 죄송하지만 편집~”
“장아 그건 진짜 하지 마래이. 분위기 좀 봐라.”
“예 형님, 제가 좀 오버했나봅니다.”
메인 진행자 이순협은 김적장을 흘기곤 아무일 없다는 듯 표정을 바꾸어 오프닝을 이어갔다.
“아니 그래서 어제 감독님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오늘 잘하면 게스트한테 우리가 질 수도 있다고.”
“에이 그건 말도 안되지. 우리가 누군데! 우리를 누가 힘으로 이기나.”
“맞아. 힘도 힘이고 5년간의 경험도 무시 못하죠.”
비단 김적장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김적장을 호되게 지적했던 이순협도, 또 다른 출연진들도 방송에 써먹지 못할 말을 하는 순간 동료들의 고나리를 받고 알아서 편집점을 만든다.
이러니 이 현장에 처음 와본 사람들이 기를 못 펴는 거다.
그나마 비슷한 그들과 비슷한 연차나 그들에게도 선배 격인 사람들이 온다면 저들의 성격상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었을지 모르지만 어메스를 포함해 연예계 후배들의 경우엔 가차 없을 거다.
“이곳은 프로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이병수가 다가와 속삭였다.
“이 정도의 대형 프로그램에 나왔으면 그 정도의 역량을 갖추고 왔겠거니 기대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냥 눈 꽉 감고 최선을 다해.”
이병수가 걱정스레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아덴은 별로 긴장하지 않은 듯하지만 서도화는 오프닝이 이어질수록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솔직히 이 방송의 섭외가 들어왔을 때 무척 망설였었다.
웬만한 짬의 예능인들도 버거워하는 방송에 우리 애들이 나가서 이득 볼 게 있을까?
병풍으로 있다 기만 죽고 끝낼 거면 차라리 섭외를 거절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섭외가 들어오고 직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섭외에 응한 것은.
‘그래도 기회를 주고 싶으니까.’
아직은 예능에서 빛을 보는 멤버가 없지만, 아이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병수가 보기에도 아직 예능에서 재능을 발휘할 멤버는 보이지 않지만 혹시 아는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툭 튀어나와 재능의 싹을 틔우는 멤버가 있을지.
‘그래도 우리 애들 자체 컨텐츠도 잘하고.’
물론 그건 특출나게 웃기는 멤버가 있다기보단 서로가 서로를 웃기게 만들어 주는 케미가 좋았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병수가 두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있을 때.
“자, 그럼 도대체 누가! 우리 강호혈전 멤버들을 위협하는지. 한번 불러볼까요?”
드디어 게스트가 등장할 시간이 되었다.
“잘해라. 파이팅!”
이병수가 얼른 생각을 갈무리하고 두 사람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아직도 걱정에 표정을 펴지 못하는 그에게 다 괜찮다는 듯 주먹을 쥐어 보이는 건 아덴이었다.
“걱정 마세요. 잘하고 올게요.”
“그래, 믿는다.”
그래, 아덴은 서도화가 긴장하는 와중에도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지.
거기다 아덴은 순하디 순한 어메스 멤버들 중 케이 다음으로 예능감이 있는 멤버다.
물론 그건 자체컨텐츠 내의 일이고 그게 방송국의 예능에서도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기대하는 부분이 있으니 다른 믿음직한-사고 안 치는- 멤버들이 아닌 아덴을 데리고 온 것이다.
“믿는다.”
이병수가 두 사람의 등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오오!”
게스트의 등장에 강호혈전 멤버들이 박수로 그들을 환영해주었다.
그들 중 몇몇은 서도화와 아덴에게 손날을 세워 격투 자세를 취하며 경계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예에! 안녕하세요. 요즘 아주 최고 대세 그룹이죠. 어메스의 도화 씨, 그리고 아덴 씨!”
“둘셋, 어메스로 놀아보세. 안녕하세요. 어메스의 메인보컬 서도화.”
“그리고 아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워어!!!”
촬영 전 대기 중엔 인사해도 무시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던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는 더없이 환영을 해준다.
처음에는 이렇게 환대를 해주다 예능적으로 별 볼 일 없을 것 같으면 천천히 소외시키는 그런 방식인가보다.
서도화는 곧장 파악을 끝내고 다짐했다.
‘얼굴에 철판.’
예능에선 공손과 겸손, 그리고 얌전함은 죄악이다.
컨셉 잡고 설치는 게 승자가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쪽 세계, 이세계에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도 나름 괜찮을지도.
아니 그 편이 오히려 예능에서는 더 좋을 테다.
아이돌이 아닌 이세계에서의 서도화를 보여주자. 그렇게 생각하니 놀랍도록 마음이 편해졌다.
“어메스 멤버분들이 바쁘신 와중에도 저희 강호혈전을 찾아와주셨는데요. 조금 어떻게 지내요?”
“엄청 바쁘죠? 스케줄이.”
출연진들은 자연스레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아덴이 외국인이라는 말을 사전에 귀띔받았기 때문이다.
서도화도 이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아니 조금 무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아니요. 그냥 숙소에서 쉬다 왔는데…….”
“어?”
이순협은 예상 외의 대답에 당황하더니 픽 웃었다.
“아니 어메스 대세라매! 안 바빠?”
“네, 안 바빠요.”
아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활동 끝나 가지고.”
그러자 다른 출연진들도 껄껄 웃으며 pd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야! 바쁜 애들 모셔온 거라매!”
“펑펑 놀았다는데?”
먹잇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드는 고정 출연진들. 무서울 정도였다.
출연진들이 pd에게 항의하는 동안 또 다른 출연진 조철성이 서도화와 아덴에게 물었다.
“아니 앨범 활동도 끝났으면서 뭣 하러 출연하는 거야?”
“네?”
“아이, 형, 그게 뭔 소리예요! 출연할 수도 있지!”
“아하니! 그렇잖아! 보통 가수들은 여기 홍보하러 오는 거 아니야?”
조철성. 강호혈전에서 돈 욕심 많은 꼰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다른 사람이 물으면 실례가 될 지금과 같은 말도 조철성이 하면 어느 정도 무마되는 구석이 있었다.
“아이고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런 걸 묻고 그래! 얘네 인기 많은 애들이야. 그런 거 물으면 형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이순협이 필사적으로 조철성의 말을 막을 때 서도화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홍보가 아니라도, 기회다. 싶어가지고.”
“어?”
이순협은 서도화가 질문에 대답할 줄 몰랐다는 듯 황당한 웃음을 띄우며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아니, 여기에 왜 대답을 하고 그래 너는!”
“예? 아니 물어보시니까. 이 방송 나오면 또 자랑할 수도 있고. 혹시 활약할지도 모르고.”
사실 서도화도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여기저기서 오디오가 겹치는 와중 정신이 없는 상황에 돈 관련된 질문까지 들어오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었을 뿐이다.
아마 지켜보고 있을 이병수는 아덴이 사고 치는 줄 알았더니 서도화가 사고 친다고 뒷목 잡을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정신이 없는데.
그리고 서도화를 보는 이순협은 꽤나 멘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서도화를 ‘너’라고 칭하며 태클을 걸어대고 있었다.
이 어메스보다 더한 난장판의 상황을 아덴은 홀로 태연히 지켜보고 생각했다.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뭐든 습득이 빠른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