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아까 형님 표정 봤어?”
“봤죠. 살짝 당황스러워하시는 거 같던데요?”
조철성의 말에 김적장이 키득거렸다.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다!”
보나 마나 비슷하게 아이돌이 왔으니 아이돌 컨셉으로 가자 했겠지.
오래 함께하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까 전 김적장 팀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순협의 얼굴이 새빨개진 걸 보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보였다.
“아이디어 겹치면 상당히 부끄러울 텐데.”
“겹치면 즉석에서라도 바꿔서 올 걸? 형님 성격에.”
조철성과 김적장의 대화를 듣던 아덴이 말했다.
“아이돌 노래 아니던데요.”
“어?”
“아이돌 노래 아니었어요. 무슨 발라드 부르는 거 같던데.”
“발라드?”
“네. 춤 연습은 안 하는 것 같았어요.”
물론 연습하는 중간중간 무언가 제스처를 취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걸 춤이라고 하기엔 미묘했다.
“그럼 딴 거 준비했나 본데?”
김적장은 흥미가 식은 눈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거 빨리 준비하고 좀 나옵시다. 무슨 준비를 그렇게 오래 해?”
김적장이 상대 팀이 들어간 세트장 뒤를 보며 소리쳤다. 그때 안에서 나오는 한 사람.
“어? 저 형 머리에 뭘 쓰고 나온 거야?”
“옷차림이 왜 저래?”
이순협. 그가 근엄하게 등장하는 순간 세트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중세 유럽 남성의 머리를 연상케 하는 흰머리 가발을 쓴 채 심각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의상 또한 중세 귀족의 복장으로 평소 산적과 같은 호쾌하고 수수한 이미지를 가진 그와는 너무나 상반된 점잖으면서도 화려한 의상이라 웃음을 자아냈다.
“저게 뭐야학……!”
김적장이 크게 웃음이 터져 배를 붙잡고 있을 때, 아직 노래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의도를 알아차린 이도 있었다.
“아, 설마 뮤지컬인가? 오페라?”
비장한 표정, 평소와 다른 몸짓. 연기를 하는 걸 보아 틀림없이 뮤지컬이다.
그 순간 가만히 정면을 보며 서 있던 이순협이 입을 열었다.
“사느냐 죽느냐…그게 문제로다…….”
“푸흡!”
어색하기 그지없는 진지한 연기에 출연진, 제작진 할 것 없이 폭소했다. 심지어 이순협 또한 입가가 움찔움찔 올라갔지만 다행히 그가 웃기 전에 음악이 시작되었다.
-고난이로다. 과연 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아버지, 부디 나에게 답을 내려주시오
진지하고 정숙하기 그지없는 노래, 중후한 목소리. 그러나 사람들의 폭소는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이순협이 웃으라고 일부러 더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순협의 노래가 이어질 때 세트장밖에서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자연스럽게 노래, 아니 독백을 이었다.
-아이야 고민하지 말거라
너는 너만의 길이 있다
이 아비가 아닌 너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
“풉!”
이번에는 아덴이 배를 잡고 굴렀다.
“으하학! 연기 너무 못해!”
서도화 또한 이순협과 마찬가지로 가발에 의상을 갖춘 채였다.
“아니 도화 씨가 아버지 역이야?”
“순협이 형님이 아들 역이라고?”
그냥 모든 것이 다 안 어울린다. 모든 것이. 그 부조화스러움이 너무나 웃겼다.
사람들을 웃기는 것에 성공한 서도화는 만족스러운 듯 뿌듯한 미소를 짓곤 노래를 시작했다.
-아들아 너는 할 수 있다
내가 지켜볼 테니 걱정 말고 가거라
담대하게 내일을 향해
그러나 그들은 서도화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더 웃을 수 없었다.
서도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조용해진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며 아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졌다.’
저 복장과 연기가 웃기기도 웃겼고, 사실 노래 대결에 서도화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 대결은 끝이 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저걸 어떻게 이기겠는가?
죽어가던 사람들조차 서도화의 노래를 들으면 아픔을 잊고 심취하게 될 정도인데.
어떤 웃긴 상황을 연출해도 마음을 울리는 노래엔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그들은 어메스의 팬도 아니고 평소 아이돌 노래를 잘 듣지 않는다고 했으니 내성 없이 노래를 듣고 있을 터.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메스 커버를 하자던 다른 출연자들의 의견에 쉽게 수긍했다.
“선배님.”
“어어?”
같은 팀이고 함께 연습한 이순협조차 잠시 멍하니 있다 서도화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서야 노래를 이어나갔다.
‘되게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속은 투명하고 맑은 모양이다.
서도화가 노래를 불렀고, 아무리 연습했다고 한들 내성도 없는데 이름 한 번 부르는 것으로 정신을 차리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서도화의 대선배를 대하는 서도화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어, 어어어!”
“빠, 빨리 들어가!”
노래의 중후반에 다다랐을 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또 다른 팀원들 단오와 지철옹이 후다닥 뛰어 들어와 엄숙하게 노래 부르는 두 사람 뒤에 섰다.
그러곤 하나도 맞지 않는 코러스를 넣기 시작했다.
“아아아-”
“하아아아~”
둘이서도 안 맞고 넷이서는 더 안 맞는다.
완전한 불협화음 덕분에 사람들은 생각보다 일찍 서도화의 정화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사람들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안 맞는 팀원들의 노랫소리에 이윽고 서도화의 얼굴도 곤혹스러움과 난감함으로 번져갔다.
‘알고는 있었지만.’
연습 때 이미 겪어 알고는 있었어도 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깔깔거림을 받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가 언제 사람들에게 노래로 비웃음을 당해보았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노래만은 자신 있던지라 아무리 상황이 웃기고 예상했던 것이라도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어, 도화 얼굴 빨개졌다. 부끄럽냐!”
이런 서도화의 속도 모르고 아덴은 신나선 서도화를 놀려댔다.
노래가 다 끝나갈 때쯤 서도화의 주변으로 팀원들이 모여들어 몸을 붙여왔다.
서도화는 더욱 거대해지는 민망함을 참은 채 마지막 한 소절을 내뱉으며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출연진들도 일제히 팔을 뻗어 천천히 올리기 시작했다.
긴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이리 보니 의상부터 화음까지 재밌는 개그 사인방을 보는 듯했다.
사람들이 이렇게도 크게 웃는 건 네 얼간이 사이에 서도화가 끼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침내 길었던 그들의 공연이 끝이 났다.
“이야아아아!!!”
웃음소리는 곡이 끝나자마자 환호로 바뀌었다. 웃음에 감동, 감명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은 완벽한 콩트.
그리고 어떻게든 웃겨보겠다고 작정한 베테랑들 사이에서 고생한 서도화를 향해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때? 이게 우리야!”
단오와 지철옹이 거들먹거리며 상대 팀을 도발해댔다.
“잘하긴 잘하네! 당신들 말고 우리 도화 씨가!”
“딱 봐도 도화 씨가 고생했겠구만!”
상대 팀인 김적장과 조철성이 도발에 넘어가 서로 다투고 있는 동안 서도화는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켰다.
‘무슨 노래 한 곡 부르는 게 이렇게 힘드냐…….’
무대 위에서 격하게 춤을 출 때와는 다른 의미로 기력을 모두 소진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뭔가 지친 느낌이었다.
“도화 씨, 갑자기 초점이 없어졌는데? 괜찮아요?”
이를 눈치챈 김적장이 깔깔 웃으며 서도화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도화 저렇게 지친 모습 데뷔하고 처음 봐요.”
아덴까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서도화가 어색하게 미소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꽤… 심적인 그게 있네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헤이! 참 나! 우리 애한테 손대지 마라!”
승리를 확신한 이순협이 거스름을 떨며 김적장의 팔을 치우고 자신이 서도화에게 어깨동무했다.
“도화야 수고 많았데이.”
“아닙니다. 재밌었습니다.”
“야야, 이마에 식은땀이나 닦고 말해라.”
이순협이 흐뭇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아덴보다 캐릭터도 흐뭇하고, 별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예능에 잘 적응하고 또 그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자, 그럼 두 번째 팀의 무대가 감명 깊었다 하는 제작진분들은 팻말을 들어주세요!”
송학 pd의 말에 제작진들이 일제히 팻말을 들어 올렸다.
서도화가 미소 지었다.
예상 한대로 제작진들 대부분이 감명받았다는 팻말을 들어 올렸다.
“우와……. 뭐, 하긴 잘하긴 잘했어.”
아덴팀의 조철성이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쟁하는 팀인 김적장과 조철성이 빈말로라도 못했다 말하지 못할 정도로 잘했고 웃기기까지 했는데.
특히 게스트가 이 정도로 망가져서 웃기려 애를 썼다면 표를 안 주기도 힘들다.
“그럼 이번 라운드의 승리는 이순협 팀이 가져갑니다. 이순협 팀에 소속되었던 네 분께 1점씩 점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에!”
“다음이 마지막인가요?”
이순협의 물음에 송학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지막 라운드를 치를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모두 이동해주세요.”
송학의 말에 서도화와 아덴이 시선을 마주했다.
드디어 마지막. 강호혈전의 하이라이트 코너 [달려라 강호여] 순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있는 대로 몸을 써서 장애물을 넘어서는 코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