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어느덧 밤이 되었고 옥상엔 선선하게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오, 도화야 지금이 딱 좋다. 지금 들어가야 해!”
카메라 화면을 통해 서도화를 보던 감독이 흥분하며 스텐바이를 외쳐댔다.
옥상 난간에 기댄 채 멀리서 대기 중인 한야와 눈으로 대화 중이던 서도화가 재빨리 뒤돌아 아련한 표정으로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 하지만 뮤직비디오에선 모든 게 무너져버린 세상으로 보여지겠지.
그러니까 표정에서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나야 한다.
서도화가 감정을 잡자 곧바로 큐사인이 들어와 촬영이 시작되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서도화의 촬영 분은 다른 멤버들에 비해 크게 할 게 없었다.
그저 바람을 맞으며 하늘과 건물과 땅을 둘러보면 될 뿐.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 하면 지난 뮤직비디오엔 풍경을 둘러보는 것에서 끝이 났고 지금은.
“도화야.”
서도화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경찰복을 입은 한야는 천천히 서도화의 곁에 앉았고 서도화는 이를 무심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바라보다 획 고개를 돌렸다.
“너 도화 맞지?”
“가세요.”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가시라니까요?”
평탄하게 흘러가는 듯한 장면. 하지만 서도화는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 뮤직비디오에서 유일하게 목소리가 나가는 장면이니만큼 연기가 어색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도 이곳에 있는 두 사람은 데스티니에서 연기 수업을 받은 적 있어 그나마 낫긴 하다만.
생활 연기도 아니고 감정 호소가 들어가야 하는 씬이다 보니 자칫 오그라들어 보일까 걱정이었다.
“정말 네 친구 어디 갔는지 몰라?”
“네. 말도 없이 갔는데 어떻게 알아요.”
케이가 어디 있는지를 두고 말다툼을 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케이를 찾으러 가자는 한야의 말에 서도화가 수긍함으로써 그럭저럭 마무리되었다.
한야가 계단문을 향해 턱짓했다.
“그럼 내려가자. 조심하고.”
서도화가 한야를 따라 옥상에서 내려가는 것으로 두 사람의 촬영은 마무리 되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비하인드 카메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아니요.”
“아직 한참 남았을 걸요?”
어두컴컴한 밤, 그러나 아직 퇴근하려면 멀었다.
여유로운 촬영 일정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은 아마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촬영이 이어질 것이다.
서도화는 서서히 차가워지는 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애초에 아침 해 뜨는 씬이 있지 않아? 아침까지 계속 촬영해야 한다는 이야기지.”
“도화야 뭔가 옛날 생각나지 않아?”
“옛날 생각? 어떤 생각이요?”
“우리 연습생 때 옥상에서 해 뜨는 거 되게 많이 봤잖아.”
“아, 맞아.”
서도화가 다시 한번 옥상의 풍경을 보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획사인 데스티니 엔터테인먼트.
워낙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보니 연습 시간을 정해둬도 몰래몰래 새벽까지 연습하기 일쑤였다.
특히 월말 평가가 그룹 평가인 달엔 팀원들끼리 호흡 맞추는 데만 많은 시간을 써야 했기에 거의 합숙 수준으로 회사에서 살았다.
그러다 연습실에서 쫓겨나면 옥상에서 연습하기도 하고, 팀원들끼리 싸우면 옥상 와서 식히고 혼자 숨통 트러 올라가기도 하고 그랬었다.
“생각해보면 옥상에 대한 추억도 되게 많아.”
“그러게.”
한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서도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도화가 옥상에서 정말 많이 울었는데.”
“아니, 아니! 그걸 왜 말해!”
-어? 부정은 안 하시네요?
“그러는 이 형도 뭐, 울지는 않았지만 월말 평가 한번 하고 나면 심란한 표정으로 옥상 가고 그랬어요. 부정은 안 해요.”
서도화가 머쓱하게 웃었다.
“울긴 많이 울긴 했죠.”
데스티니 엔터 옥상은 서도화의 눈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습생들의 따돌림도 견디던 서도화인데 이따금 제 실력에 대한 지적을 받으면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고 아플 수가 없었다.
“왜 나는 이것밖에 못 할까! 하면서 많이 울었었지.”
“맞아. 그랬던 시절이 있어서 지금의 도화가 있는 거지.”
“정말 형이랑도 추억이 많아. 아덴이랑 비슷할 정도로.”
이세계에서의 여정은 아덴과의 추억이라면 연습생으로 생활하던 모든 나날은 한야와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서도화가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고요 여러분, 조만간 한야 형이랑 옥상에서 뭐라도 컨텐츠 하나 찍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답은 고요 대신 한야가 했다.
“오 좋지. 진짜로 뭐 하자. 뭐 할래? 옥상에서 노래라도 부를까?”
“노래도 좋고 우리끼리 담소 나누는 것도 좋고.”
“대표님한테 진짜 말해둘게.”
“한야, 도화 가자.”
두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컨텐츠에 대한 약속을 하는 사이 이병수가 차 키를 들고 얼른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음 촬영은 한야의 개인 촬영, 그리고 서도화와 아덴의 첫 만남 씬 촬영이다.
* * *
한야와 서도화, 아덴과 주상현.
따로따로 손을 잡았던 그들은 어느 한 사건을 계기로 한 팀을 이루게 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아덴과 서도화의 만남이었다.
아덴은 멸망의 원인과 적들의 위치를 조사하기 위해, 서도화는 케이를 찾기 위해 움직이다 어느 날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목표는 다르지만 목적이 똑같음을 알고 임시로나마 협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끝에는 서로를 배신하려는 생각을 하고서 말이다.
서도화와 아덴은 지금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중요한 씬을 촬영하러 세트장에 와있다.
“와 여기 진짜 같다. 이것 봐 서도화!”
아덴이 신나선 세트장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여기가 야외인지 실내 세트장인지 헷갈릴 정도로 잘 만들어진 전쟁터의 현장이었다.
마치 노을이 낀 조용한 사지. 무너진 건물 사이 골목의 양쪽엔 철로 된 판이 세워져 있었고 인공적으로 만든 노을빛에 판이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세트장이었지만 아덴은 이런 세트장의 모습이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옛날 생각 나지 않아?”
“……그렇네.”
서도화가 신나서 세트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아덴을 비하인드 캠으로 찍으며 대화했다.
“이번 촬영은 이상하게 멤버들이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한야도 그렇고 아덴도 그렇고.
하지만 서도화는 한야는 물론이고 아덴이 세트장을 보며 감상에 젖는 이유도 알고 있다.
저 세트장은 심히 저쪽 세계의 전쟁터와 생김새가 비슷했으니까.
전쟁터와 생김새가 비슷한데 뭐가 신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전쟁터를 누볐던 아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으로선 저쪽 세계 생각이 날 만한 게 있으면 다 좋고 다 지켜주고 싶을 것이다.
그들의 곁으로 스태프가 다가왔다.
“자 설명 드릴게요. 간단해요. 두 분은 각각 양쪽 건물에서 달려 나와서 저기 쇠 판떼기 뒤에 숨으시는 거예요. 되게 급박한 상황이에요! 대충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설정으로.”
“네.”
“이렇게 막 뛰어나와서-”
스태프는 달리는 시늉까지 직접해보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딱 쇠 판떼기 뒤에 숨는 순간 서로 눈이 마주치는 거죠.”
“오오.”
“근데 일단 둘 다 사람이잖아요. 빌런으로는 안보이고. 아덴 씨는 군인 신분이라는 설정이니까 민간인인 도화 씨를 내버려 둘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데려가요. 군인 기지로.”
스태프가 스튜디오 내 또 다른 세트장을 가리켰다.
지난 뮤직비디오에서 아덴이 서 있던 전선과 쇠가 가득한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세트장이었다.
“저쪽에서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꽤 괜찮은 것 같아. 그래서 도화 씨가 아덴 씨를 한야 씨한테 연결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까지가 이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내용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촬영 시작할 때까지 대기해주세요.”
스태프가 사라지고 서도화와 아덴은 자연스레 노을이 낀 세트장 안에 대충 자리 잡고 앉았다.
“촬영 어땠어?”
아덴은 주상현과 함께 케이를 쫓아 달리는 씬 촬영은 했다.
아덴 쪽도 서도화 못지않게 표정 연기가 필요한 씬을 찍었다고 들었는데.
서도화의 물음에 아덴이 뿌듯하게 대답했다.
“엄청 잘했지. 야, 나 생각보다 연예계에 소질 있는 거 아니냐?”
다른 건 몰라도 표정 연기 하나는 끝내준다고 촬영 감독에게 칭찬을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태어나서 남 후드려 패는 것 외엔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감독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칭찬해주던지 별 생각 없이 하던 연기들이 꽤 재밌게 느껴질 정도였다.
“재밌게 했나 보네. 다행이네.”
“다행이 맞긴 하지. 나는 내가 마족 두들겨 패는 것 외에는 별 재미 못 느끼는 인간인 줄 알았거든.”
오.
서도화는 작게 감탄사를 날렸다. 아덴을 칭찬 감옥에 가두면 지루해하던 일에도 재미를 느끼곤 하는구나.
서도화가 좋은 팁을 얻어 기뻐하는 사이 촬영을 위한 준비가 끝나고 곧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