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어느덧 시간은 흘러 티어 활동은 마지막 스케줄만을 남겨두고 있다.
“얘들아 모여 봐.”
연습실, 한야가 멤버들을 한곳으로 모으며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그에 아덴과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던 서도화가 멤버들을 이끌고 한야의 곁으로 향했다.
멤버 전원이 한야의 주변으로 모이자 한야가 자신의 휴대폰을 멤버들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이번엔 뭐 할까?”
한야가 보여준 것은 다른 그룹의 굿바이 무대 영상이었다.
“와 그렇네. 우리 내일 막방이잖아.”
주상현이 새삼스럽다는 듯 제 코를 주무르며 말했다. 유독 길게만 느껴졌던 활동이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보통 음악방송 마지막 스케줄엔 뭐라도 팬들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메스라고 안 할 수는 없었다.
“다들 뭐 생각해둔 거 있어? 저번 주부터 틈나는 대로 하나씩 생각해놓기로 했잖아.”
“저요.”
한야의 물음에 서도화가 곧바로 손을 들었다.
“나는 굿바이 무대 이벤트는 아니고 1위 공략으로 파트 바꾸기 제안합니다. 웃기듯이 하지 말고 진짜 제대로. 팬들이 엄청 보고 싶어 해.”
서도화가 한야를 가리켰다.
“형이 텀블링 하는 거.”
“…….”
한야가 무표정으로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그가 멤버를 이런 표정으로 보는 경우는 정말 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도화와 아덴은 좋다고 낄낄 웃었다.
그가 왜 저렇게 정색하는지 멤버 모두 알고 있었다. 웬만해선 텀블링 정도야 밥 먹으면서도 할 수 있는 멤버들과는 달리 한야는 운동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몸 쓰는 일엔 그다지 재주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팬들은 아덴과 케이가 아닌 한야가 서투른 솜씨로 텀블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아덴이나 케이가 서도화의 파트를 부르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그건 1위 공약으로 하든지 하고. 내가 말한 건 막방 이벤트를 말하는 거야.”
막방 이벤트는 1위 공략과는 달리 멋대로 파트를 바꾸거나 뭔가 혁신적으로 바꾸는 일은 할 수 없다.
앙코르 공연도 아니고 말 그대로 정식 무대인데 어떻게 장난치듯 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기가 쉽지 않다. 오죽하면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서도화가 막방 이벤트는 모르쇠하고 1위 공략 이벤트를 생각해왔을까.
별 아이디어가 없는 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보통은 뭐하지? 가사에 팬덤 이름 넣어서 부르거나…….”
“우리 노래에?”
“으음…….”
팬덤 이름 넣고 사랑스럽게 부를 만한 노래가 아니긴 하지. 우리 노래가.
파워! 거친! 반항! 상처! 느낌이 낭낭한 곡인데 거기에 감히 고요 이름을 넣을 수는 없다.
“하트 이벤트 같은 거도 있어. 틈 나는 대로 하트 보여주는 그런 거 있잖아.”
“아 음방에서 많이 봤지.”
아이돌들이 막방에서 자주하는 이벤트다. 손 하트를 하거나 멤버와 함께 하트를 표현하거나 손바닥 등에 스티커 등을 붙여 보여주는 등 어메스와 같이 차마 노래에 팬덤 이름을 넣지 못한 곡을 부르는 경우 많이 한다.
다만…….
“너무 많이 봤지…….”
“그건 그래. 한 달에 한 번씩은 보는 것 같아.”
“우리 이미 선수 뺏겼을지도 몰라.”
우리가 안하면 다른 그룹이 무조건 한다. 싶을 정도로 많이 하는 이벤트라 어지간히 창의적으로 하트를 보여주지 않는 한 팬들도 별 감흥을 못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한야의 시선이 아덴과 케이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뭔가 아이디어 없어?”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아이디어는 한야, 서도화, 주상현 세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듣도 보도 못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아덴과 케이 두 사람에게서 나온다.
“아이디어? 흠.”
한야의 물음에 아덴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웃통을 까고”
“기각. 다음. 케이는?”
“흐음.”
케이 또한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노래 부르는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누구 좋으라고? 기각.”
“……그렇게 다 거절할 거면서 묻긴 왜 묻는 거야!”
아까부터 기각을 날리는 서도화에게 케이가 부득부득 소리쳤다. 서도화는 웃기지도 않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니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네놈처럼 아예 아무 생각 없이 온 것보단 내가 낫지!”
“1위 공략은 생각해왔잖-”
“그만. 또 싸우면 정말로 쫓아낼 거니까. 회의를 방해하면 안돼요. 상현이는?”
“어? 나?”
생각 없이 케이와 서도화의 말싸움을 지켜보며 킥킥거리던 주상현이 깜짝 놀라며 한야를 쳐다보았다.
“어… 포스트잇에다가 메세지 적어서 보여주는 건?”
“그거 좋은 생각이긴 한데 아쉽게도 저번 주에 다른 그룹이 했어.”
“흠……. 그럼 한야 형은?”
“음, 나는 꽤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는데 무대에서 단체로 운동복을 입고 헬스를…….”
“에이 진짜. 기각.”
이번엔 서도화가 아닌 아덴이 기각을 외쳤다. 무대 위에서 웃통을 까자고 했던 아덴이 봐도 그 노래를 부르며 헬스를 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건 1위 공약용 아냐?”
“……1위 공약으로 나쁘지 않은데?”
“아니 그래서 뭘 할 건데. 막방 회의를 무슨 시간을 이렇게 잡아먹으면서 하고 있어?”
도통 진전이 안 나가는 어메스의 회의를 지켜보다 못한 이병수가 마지못해 끼어들었다.
“얼마 없는 연습시간을 회의로 싹 다 잡아먹네!”
이병수의 말에 어메스 멤버들이 뾰로통해진 채로 그를 흘겨보았다.
“형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재촉해요!”
“우리 회의 길어지는 거 한두 번 보시나!”
“어차피 하루 종일 연습만 할 건데요 뭘.”
“미, 미안하다…….”
이병수가 머쓱하게 사과하며 다시 한번 휴대폰 시간을 확인했다.
“근데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얼른 정하고 끝내줄래?”
“할 말이 뭔데요?”
“아니면 그거부터 들을게요. 중요한 말이에요?”
“중요하다면 좀 많이 중요한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회의 중간에 할 말은 아니고.”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독촉까지 해가며 기다리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병수 덕분에 회의는 조금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막방용 아이디어를 준비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케이와 투닥이던 서도화가 번쩍 손을 들었다.
“아, 나 이제 생각났어. 막방용 이벤트. 진짜 좋은 걸로.”
“어떤?”
“어쨌든 팬 분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지?”
“팬들이 제일 보고 싶어 하는 게 뭐야? 바로-”
“한야 형의 백텀블링?”
“…….”
그것도 맞기는 한데. 어…….
“그, 그것도 넣고. 아무튼 할 수 있는 팬서비스 싹 다 하자고.”
하트도 하고 메세지도 적고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터라 입어주었으면 했던 교복도 입고 마지막에 한야의 텀블링까지 넣으면 그게 최고의 이벤트가 아니면 무엇인가?
“마침 교복 같은 거는 스타일리스트 누나들도 급하게 바로 준비해줄 수 있는 거니까.”
“창의적이지 못할 거면 아예 넘치도록 하자는 거구나?”
“그렇지. 사실 애초에 무대를 정직하게 하면서 창의적인 걸 생각하는 것도 어려워.”
“또 다른 의견 있는 사람?”
한야의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은 도화가 말하는 대로 하고 음방 전에 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언제든 말하는 것으로 하자.”
“오케이.”
“알겠어.”
“그럼 이제 회의 다 끝났지?”
이병수가 성급하게 물어왔다. 멤버들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더 길게 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을 수도 있는데.”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더 해도 딱히 좋은 아이디어는 없을 걸. 애들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
“자 그럼 가자.”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또 떠들어대던 멤버들은 일어나라고 손짓하는 이병수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가요? 어딜요?”
이병수는 이제야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중대발표 들으러. 예상하기에 너희가 무척 좋아할 것 같아서 그 장면 카메라에 담으려고.”
“뭐길래? 저희 자체 컨텐츠 하나 더 만들어요?”
“팬미팅?”
퀴즈게임을 하듯 물어오는 멤버들에게 이병수는 결코 대답해주지 않았다.
멤버들이 도착한 곳은 유제이 사옥의 대회의실.
“왔어?”
회의실 안에는 김유진과 직원들을 포함한 여러 관계자들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어… 안녕하십니까.”
가볍게 발길을 옮겼던 것치곤 꽤나 엄중한 분위기에 멤버들이 한껏 움츠러든 채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