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케이는 불안한 듯 통신석을 쥐었다 폈다 했다.
‘왜 하필 지금…….’
좋다. 다 좋다 이거다.
아덴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 뒷처리하기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서도화와 둘이서 이런 돌발 상황을 함께 상의할 수 있으니 그럭저럭, 아니 적어도 어떻게 해야겠구나 판단 정도는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서도화는 아덴과 저쪽 세계에 있을 일행들이 어떤 방식으로 텔레포트를 시킬 건지 어느 정도 소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덴이 사라졌을 때 이게 정녕 답이 없는 상황인지 기다리면 해결되는 상황인지 알 것이다.
그런데 케이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저들이 소통할 때 꾸역꾸역 자리를 피하거나 엿듣는 정도였으니 지금 두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졌는 지 전혀 모른다.
온 힘을 써서 사람들에게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할지, 아니면 아덴 분의 기억만을 지워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기다려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그래, 물론 일단 얼버무려놓고 며칠 기다려보면 되지.
그런데 문제는 숙소에서도 스케줄 중에도 거의 24시간 소속사의 관리 하에 있는 아이돌이 갑자기 둘씩이나 잠수를 탔는데 이게 얼버무린다고 얼버무려지겠는가?
더군다나…….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냔 말이다!’
인간이길 거부하고 마왕이 된 지 어언 백 년.
마왕이 된 이후로 누군가를 설득할 일은 단언컨대 없었다. 설득이 왜 필요한가? 마족 새끼들 말 안 들으면 가죽을 벗겨 매달아버리면 그만인데.
그리고 인간으로 살기를 염원하게 된 지 약 반년. 말로서 누군가를 현혹할 자신이 없다.
물론 쉬운 방법은 있다.
‘아니, 쉽지는 않지.’
겨우 끌어모은 마력으로 저들을 또 한 번 세뇌하는 것이다.
아덴과 서도화는 휴가를 받은 김에 멀리 여행을 갔다고. 그래서 돌아오기까지 며칠 걸릴 것이라고.
기억을 지우는 것에 비하면 꽤 쉬운 편이다. 해봐야 주변 사람들에게만 손 쓰면 되니까.
하지만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밥 먹으러 나왔다가 사라진 건 어떻게 해도 커버가 불가능하다.
밥 먹다 갑자기 여행 갔다고 말도 못 하고, 하다못해 여행을 갔다 쳐도 최소한 매니저와 통화는 돼야 하는 게 기본이다.
‘……어쩐담.’
케이가 통신석을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평소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텔레포트 연구 진행 상황은 어떤지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이리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을.
물론 그 두 사람이 그런 중요한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았으리란 건 안다.
‘알려줄 필요도 이유도 없었겠지.’
자신은 동료가 아니고 여전히 그들의 경계 대상이니까.
두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고, 또 함께 있는 것을 얼마나 힘들게 참고 있는지 잘 안다.
‘무슨 정보 공유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러나 적어도 자신만큼은 이제 두 사람과 한배를 탄 진짜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명해질 때까지 책임지고 시간을 끌어보는 수밖에.’
케이가 통신석을 소중히 쥐고 식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징- 지잉- 지잉-
“나, 나, 나도오!!!!!”
케이가 눈을 부릅뜨며 헐레벌떡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꺼내는 도중 몇 번이나 떨어트릴 뻔한 바람에 신호가 온 뒤 한참이 지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확실히 통신석에서 진동과 함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도? 나도인가!!!!”
물론 그쪽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이 세계에 살 작정이긴 했다.
그런데 아덴에 이어 서도화까지 사라지고서야 케이는 깨달았다.
원래 세계에서 함께 넘어온 자들 아덴과 서도화 없이 자신 혼자 이 세계에 남는 건 좀 무섭다.
물론 이곳엔 그들이 아니라도 케이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은 많다.
유제이 직원들도, 남아 있는 어메스의 멤버들도 그리고 이젠 보잘것없는 인간이 된 자신을 사랑해주는 케이클랍스들도 있다.
하지만 같은 세계에서 넘어왔다는 공감대가 있는 멤버는 아쉽게도 그 둘 뿐이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솔직히 두 사람이 함께였기에 타향 생활에 잘 적응하고 때로는 의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제 이곳에 없다는 것. 그건 과거의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라는 말이 된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독한 두려움과 고독함이던가.
그러나 그쪽 세계로 간 두 사람이 결코 자신에게 손을 뻗을 리 없다고 생각한 와중 이 통신석이 울린 것이다.
적어도 갑작스레 그곳으로 불려가 정신없을 두 사람이 졸지에 혼자가 되어버린 케이를 잊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케이는 떨리는 손으로 통신석에 약한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눈을 꽉 감았다. 곧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텔레포트가-
-뭐하냐?
“응?”
-뭐하냐고. 마왕 새끼가 눈 감고 신한테 기도라도 올리고 있냐?
“너, 너, 너는……!”
-꼴값 떨지 마 쳐죽일 새끼야. 너 따위의 기도 소리를 세상 어떤 신이 듣겠냐?
“…….”
어우 이런 욕 오랜만에 들으니까 아주.
케이가 저도 모르게 제 귓구멍을 잠깐 막았다 뗐다.
텔레포트가 아니고 그저 진짜 영상통신이 연결된 것뿐이었다.
다만 문제는 통신석을 통해 칼같이 욕설을 내뱉고 있는 놈이 서도화나 아덴이 아닌 그들의 동료, 그러니까 예전에 케이가 동료인 척했다가 처절하게 배신한 그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와 이 새끼 인간 다 됐네. 완전 볼품없는 꼴이잖아? 꼬시다 새끼야. 죽지 왜 아직 살아있냐? 형님들은 마음씨도 좋지. 어떻게 저런 새끼를 아직까지 살려…!
퍼억!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욕을 쏟아붓던 남자가 누군가의 손에 뒤통수를 맞고 완전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아악! 혀, 형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시끄러. 연결만 해놓고 가면 될 것을 뭣 하러 감정 소모를 해?
이건 아덴의 목소리고.
-하지만 형니임…….
-화날 만하지. 그렇다고 왜 애 머리를 때리냐? 아무튼 네 마음 다 이해하니까 일단은 나가서 밥이나 먹어.
이건 서도화의 목소리였다.
-으흑 도화 형님밖에 없습니다. 그, 그럼 알겠습니다. 나갈 테니까 편히들 일 보십쇼.
상당히 껄렁해 보이는 남자는 바짝 엎드린 자세로 헤헤 웃으며 아덴, 도화와 대화를 나누다 획 고개를 돌려 케이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 형님들한테 이상한 말 하면 죽는다! 내가 하이넬 누님한테 부탁해서 넘어가 죽일 거니까!
그러곤 화면에 제 주먹을 들어 보이곤 사라졌다.
굉장한 욕과 협박이었지만 케이는 그저 말없이 연거푸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이제 와서 할말은 없다.
저 불량한 동료가 말하는 ‘형님’에는 예전만 해도 케이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이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저 남자와의 일화는 기억하고 있다.
여관에서 아덴과 시비가 붙었던 남자 중 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여관을 죄다 뒤엎어버리며 싸울 만큼 사이가 안 좋았지만 그의 패거리가 적에 의해 괴멸한 직후 아덴 일행의 도움을 받아 홀로 살아남았다.
그 이후 가장 큰 활약을 펼쳤던 아덴과 서도화, 그리고 케이까지 존경하는 형님으로 칭하며 따랐던 자였다. 심지어 나이는 그들보다 열 살은 많을 텐데도.
그렇게 열심히 따랐던 사람이니 케이에 대한 배신감은 남들보다 배는 강할 것이다.
심지어 케이는 아덴 일행이 함정에 빠져 괴멸 직전까지 갔을 때 배신했으니 자신의 과거와 겹쳐져 증오심이 더더욱 컸을 테지.
‘다 내 과오다.’
케이가 씁쓸히 땅만 보고 있던 차 서도화와 아덴이 동시에 화면을 차지하며 말했다.
-놀랐지?
“뭐?”
의외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케이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언뜻 그들의 표정에 반가움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어디야? 아직 식당에 있어?
-차림새가 같은 걸 보니까 그런가 본데.
-역시 여기랑 거기는 시간대가 다르네.
케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욕과 저주를 쏟아붓던 남자와 비교가 되기 때문일까?
유독 두 사람의 눈빛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서도화뿐만 아니라, 아덴도 딱히 미소를 짓는다거나 그런 표정을 보이려 하는 게 아닌데도 한층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한때 그들도 그 남자처럼 케이를 바라보던 때가 있었는데, 이렇게보니 정말 확연히 달라지긴 했구나 싶었다.
-야, 듣고 있냐?
-하이넬, 연결 제대로 안 된 거 아니야? 상대 쪽에서 답이 없는데?
-뭐? 도화 너 지금 내 마법을 의심하는 거야? 연결이 안 됐을 리 없잖아. 그냥 그쪽에서 말하기 싫은 거겠지.
“드, 듣고 있다.”
케이가 서둘러 대답했다.
“너희 말대로 난 아직 식당 뒤쪽 골목에 있다. 너희가 그곳으로 간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어. 다행히 무사한가 보군.”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금방 돌아갈 수는 있을 것 같아. 근데 마력 소모가 커서 며칠 걸릴 것 같대.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이야기해두지.”
-그래, 부탁한다.
“부, 부탁…….”
그때 뾰로통하게 케이를 보던 아덴이 말했다.
-조금 있다 케이클랍스에 들린 건데.
“……거긴 왜! 다 무너져가는 곳을.”
-마저 무너트려야지. 마왕도 이제 없는데 필요 있어?
아덴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인간들에겐 케이클랍스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야 새끼야. 그곳에 남아 있는 마족들을 포함해 완전히 소멸시킬 거다.
“…….”
케이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제가 그곳에서 쌓은 모든 것이 이제 정말로 무너진다. 딱히 미련은 없지만 복잡한 기분만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