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미안하다. 미안하다 상현아.”
“예? 뭐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케이를 올려다보던 주상현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입을 다물고 멍해졌다. 어딘가 죽은 듯한 눈동자. 이를 보는 케이의 마음은 무거웠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음을 안다.
죽어버린 눈동자, 멍한 행동은 곧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고 기억만이 조금 달라질 뿐이겠지.
저런 멍한 표정이야 다른 인간들을 세뇌하며 몇 번이고 보았던 얼굴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에 대한, 멤버들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케이의 마음이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게 마지막이다.’
케이가 주상현보다 더 죽어버린 자신의 눈에 결연함을 채웠다.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케이가 그곳 세계에 가는 것도,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모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정말 미안하다. 적어도 너희가 나와 그 두 사람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으로 생각해.”
케이마저 그곳 세계로 넘어가면 이곳의 사람들은 세 사람을 그저 사정이 있어 연락이 닿지 않는 곳으로 조금 더 긴 휴가를 간 멤버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성적으로 보았을 땐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사정을 용인해주고 따로 연락조차 취할 수 없는 채 콘서트를 앞둔 멤버들을 휴가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그것조차 이상하다 생각되지 않도록 만들어 행동하게 하는 게 마왕의 세뇌였다.
케이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주상현을 쳐다보다 얼른 숙소를 나와버렸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리라.’
케이가 영상 통신석을 만지작거렸다.
이젠 고향과도 같은 케이클랍스에 가더라도 얼른 이곳으로 돌아오고싶단 생각만 들 것 같았다.
* * *
어둡고 차가운 동굴 속, 주황색 빛줄기가 기둥처럼 솟았다 이내 사라졌다.
빛줄기가 사라진 자리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형의 남자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전율이 일 듯한 아름다운 미모, 차갑기 그지없는 인상을 가진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드디어 왔군.”
묘한 감명을 받으며 주변을 둘러보려던 순간.
“야 잡아!!!!”
“묶어!!!”
“묶어라!!! 죽여!!!”
“죽이… 진 말고…….”
“으어어어?”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붙잡아오는 손들에 케이가 당황하며 버둥거렸다.
비장한 마음으로 텔레포트에 올라 원래의 세계에 도착했다 했더니 갑자기 이게 뭐란 말인가?
멧돼지처럼 달려든 멧돼지, 아니 인간들은 반항도 안 하는 케이를 순식간에 엎어놓더니 제압해버렸다.
“끄으으……. 이, 이게 무슨 짓…….”
“잡았다! 내가 마왕을 잡았다!!!!”
“누님! 포박했습니다! 어쩔까요! 넘길까요?”
너, 넘겨? 케이가 덜덜 떨리는 눈을 굴려 제 위에 앉은 인간이 도대체 누군지 확인하려 애썼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이들을 채근하며 다가왔다.
“야,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 했지? 누가 그렇게 험하게 잡으래.”
“마음은 알겠지만 마왕은 협력자로 이곳에 왔다는 걸 잊지 마.”
“얼른 일으켜 세워. 밧줄 풀고.”
케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덴!!! 도화!!!”
“어쭈? 이게 우리 형님들의 이름을 함부로!”
동료들은 마지못해 밧줄을 풀어줬지만 영 경계심을 풀지 않은 눈으로 케이에게 무기를 겨눴다.
하이넬은 말없이 상황을 보고 있다 케이의 앞에 섰다.
“마왕, 실제로 보는 건 오랜만이지?”
“……그래.”
케이가 하이넬의 시선을 피했다. 하이넬은 당연하지만 아덴, 서도화와 마찬가지로 마왕에게 거세게 뒤통수 맞았던 동료 중 한 명이다.
물론 하이넬은 케이가 배신하는 그 날까지 케이를 온전히 믿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로 인해 동료 전체가 위험에 빠졌고 큰 상심에 빠졌던 걸 생각하면 케이의 얼굴만 봐도 이가 갈릴 것이다.
그 예로 통신석을 통해 케이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 누구보다 신랄하게 케이를 잘근잘근 까던 게 하이넬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막상 만난 하이넬은 의외로 침착했다. 다른 동료들처럼 밧줄부터 감는다거나 욕을 퍼붓고 공격을 하기는커녕 아덴, 서도화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다가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케이를 훑어보곤 말했다.
“진짜네. 진짜로 인간이잖아.”
“거봐. 내가 뭐랬어. 인간 된 거 맞다니까?”
“이제 마왕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해진 놈이라니까.”
하이넬은 흥미롭게 케이를 보다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로 마력이 미미하면 사고 치고 싶어도 못 치겠네. 됐어. 데려가자.”
“예?”
“괜찮습니까?”
동료들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 한들 한때 마왕이었던 자다. 이런 자를 마을에 데려가도 괜찮을까?
마을 사람들이 크게 불안에 떨며 어쩌면 소란이 일 수도 있었다.
“그건 걱정 마.”
서도화와 아덴이 동시에 착 케이의 얼굴에 손바닥을 붙였다.
“이 얼굴을 봐.”
“누가 이 얼굴을 마왕이라고 생각하냐?”
“내 말이.”
하이넬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누가 봐도 지금 케이의 모습은 예전 마왕일 적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덴과 비견될 정도의 근육질에 쇠처럼 단단한 피부, 머리에 난 뿔과 검게 올라온 혈관들.
인간형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던 마왕, 그에 비해 왜소한 몸에 흰 피부, 검은 머리의 잘생긴 인간의 모습인 지금의 케이는 너무나 다르게 생겼다.
심지어 마왕일 적 풍겼던 강인한 마력의 기운조차 없으니 이 모습을 보며 잘생겼다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도 마왕을 연상하는 사람은 결코 없을 거다.
“이런데도 마왕인 걸 알아차린다?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그래, 그럼 그냥 운명이려니 하고 돌 맞아 죽어야지 뭐.”
“그래…….”
케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넬이 획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지금은 저자가 필요해. 소수의 인원으로 케이클랍스를 없애버리려면 그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일단 마왕이 합류했으니 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도록 하자.”
* * *
마을엔 동굴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동료가 무기를 닦으며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로 절벽 등에서 서도화를 들쳐메고 이동하던 거인 둔투프, 통신석을 통해 형님들에게 막말하면 죽여버리겠다며 협박을 일삼던 막내 스콜피온, 그리고 아덴 다음가는 전투원이던 검귀까지.
그들이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다 케이가 들어오는 순간 은근슬쩍 무기를 세웠다.
“어유 무서워서 숨도 못 쉬겠네. 이야기 못 들었어? 임시 휴전이라니까.”
서도화가 서둘러 분위기를 풀며 케이를 방으로 쑤셔 넣었다.
심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았지만 그렇다고 동료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간 케이에게 당했던 걸 생각하면 죽이지 않고 경계만 하는 게 용할 정도이니까.
케이 또한 분위기가 이럴 줄 알고도 굳이 와서 직접 케이클랍스를 정리하겠다 말한 것일 테고.
서도화가 먼저 케이와 방으로 들어갔고 아덴이 동료들을 보며 말했다.
“좀 참아. 마왕과 함께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 일이 끝나면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겠다고 하니까. 우리한테는 오히려 좋은 거잖아.”
“그래, 좋은 거긴 하지. 그런데 아덴, 넌 괜찮나?”
“…….”
“마왕을 가장 싫어해야 하는 건 네가 아니던가.”
검귀가 냉철한 눈으로 말했다.
“도화야 제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이니 그 속을 알 수는 없다만 네 마음 정돈 쉽게 읽을 수 있지.”
“…….”
“넌 이미 마왕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군.”
동료에게 듣기 유쾌한 말은 아니다. 검귀의 말인즉슨 마왕이 우리에게, 가족에게, 인간들에게 했던 만행들을 모두 잊었냐고 말하는 것이니까.
아덴은 한참 말이 없다 겨우 입을 열었다.
“욕하려거든 욕해. 하지만 그를 완전히 받아들인 건 아니다. 내가 동료로서 받아들인 건 마왕이 아니야.”
그때 방문이 열리고 케이가 나와 검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이려거든 죽여라.”
“…….”
“지금 당장 죽여도 상관없어.”
표정 없이 말하는 케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죽이라고 대놓고 몸을 내놓고 있음에도 검귀는 그저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공격하진 않았다.
“죽이지 않을 것인가?”
“당장은 그럴 것이다. 내 동료가 널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케이클랍스를 정리하면 케이는 영원히 저쪽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 조건으로 동료들은 아덴과 서도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긴 하지만.”
“아덴과 서도화 또한 네놈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날 살려두고 곁에 있게 하는 것이다.”
검귀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케이에게 눈짓했다.
케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어도, 당장 죽이고 싶어도 저쪽 세계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이 날 필요로 하기에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해는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