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타악-
케이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도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덴과 동료들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말뜻은 이해했다. 한 마디로 아덴이나 서도화도 너희들처럼 어쩔 수 없이 함께해야 하는 상황이라 케이를 챙기는 것이라는 뜻이잖은가.
하지만 그래서 뭐?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이 뭐란 말인가?
동료 모두가 떨떠름함과 의아함을 띤 눈으로 아덴을 바라보았다.
아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랑 마왕이 한편이 아님을 어필하고 싶었겠지.”
“참나 그걸 누가 몰라. 누가 마왕따위랑.”
“또 배신할 줄 어떻게 알고.”
동료들의 욕설을 넘겨버린 아덴이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아덴이 한숨을 푹 쉬었다. 동료들은 케이가 아덴, 서도화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려 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덴도 이젠 그 말의 뜻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동료들이 아덴과 서도화를 배신자로 의심하지 않도록 미리 선수를 친 것이겠지. 그것도 나름의 보호라고.
아덴은 괜히 동한 마음에 입술을 주억거리곤 두 사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덴이 안으로 들어가자 서도화와 대화를 나누던 케이가 슬쩍 눈길을 주며 입을 열었다.
“대화는 잘 끝났나?”
“끝나고뭐고 할 게 뭐가 있어. 그냥 말 좀 주고받은 거지. ……새끼,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아덴이 투덜거리며 서도화의 옆에 앉았다.
서도화는 헛웃음을 치며 뒤로 물러서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내가 살다 살다 이 꼴을 다시 볼 줄이야.”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봐도 참 어이 없는 상황이다. 아덴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뭐가 또 불만인데.”
“다 불만이다. 왜!”
내가 어떻게 원래 세계로 돌아갔는데!
살다 살다 다시 이 땅을 밟는 것도 이상하고 용사와 마왕이 이세계에서 같은 방에 있는 것도 이상하고 어쩌다 보니 마왕의 편에 선 것 같은 그림이 되는 것도 이상하다.
아덴이 서도화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뭘 새삼.
서도화는 한숨을 벅벅 쉬며 막막하다는 듯 아덴과 케이를 번갈아보더니 툭, 케이의 발치에 보석 하나를 던졌다.
“무슨…….”
케이의 눈이 커졌다. 그가 던진 보석은 케이클랍스를 가득 채운 검붉은색의 수정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핵. 나의 핵이구나.”
“극히 일부지만. 하이넬이 연구를 위해 가지고 있던 거야.”
최후의 순간, 마왕의 핵은 깨져 케이의 심장에서 제거되었고 이를 수습하거나 할 새도 없이 세 사람은 텔레포트 되어 저쪽 세계로 넘어갔다.
그럼 제거된 핵은 어떻게 되었을까?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숙주와 마기가 사라진 핵의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소멸해버렸다.
하지만 그 일부는 연구재료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 하이넬이 즉시 손에 잡히는 케이클랍스의 수정에 흡수시켜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고마운 줄 알아. 하이넬한테 얻어맞으면서 받아온 거니까.”
아덴이면 몰라도 서도화가 하이넬에게 얻어맞는 경우는 잘 없다. 더군다나 동료들에게 지탄을 받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서도화는 하이넬과 함께 동료들을 돌보고 먹고 자고 쉴 곳을 마련하는 역할이었으며 전투 시 몇 번이나 제 목숨을 살려준, 평소 게으르고 겁많은 걸 빼면 꽤 존경받는 포지션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서도화가 이 보석을 달라고 했을 때 서도화는 과장 안 보태고 동료들의 발차기와 하이넬의 파이어볼에 죽을 뻔했다.
이 보석을 사용할 상대가 다름 아닌 케이였으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도화가 이것을 가져와 케이에게 건네준 이유는 케이가 이곳에 와서 케이클랍스를 무너트리기로 결정한 이상 이 보석에 들어있는 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잊었나 본데 너 지금 그냥 인간이야.”
“…….”
그렇다. 케이는 이제 인간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인간으로서의 케이는 치유사이자 음유시인, 그러니까 그저 앉아서 동료들의 보호를 받으며 연주하던 서도화보다 약한 수준이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했기에 심장을 버리고 대신에 핵을 사용했고, 그 덕에 마기를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심장이 생긴 케이는 무척 약해 아마 케이클랍스에 가는 순간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만든 공간에 짓눌려 죽는다는 게 무척 우스운 일이지만 그랬다.
하지만 만약 그에게 극히 일부나마 핵의 힘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일부라고 하는 건 상대적인 것이다. 핵의 힘이 워낙에 컸기도 하고 이곳에 있는 동료들 또한 하나같이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의 기준에선 극히 일부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라 하나 정도는 갈아엎고도 남는다.
단신으로 마족들을 지배하고 세상을 멸망시키기 직전까지 가게 했던 인물의 핵이니까.
케이는 서도화가 던져준 핵을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표정 없이 서도화를 올려다보았다.
“이걸 나한테 넘겨도 괜찮겠나? 이 정도 힘이라면 나에게 여지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여지? 배신 때리면 넌 이번에야말로 그냥 뒤지는 거야.”
아덴이 제 검을 집어 들며 말했다.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서도화는 전혀 흔들리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이건 그저 감정에서 튀어나온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냉정히 봐도 지금의 케이는 믿을 만하다.
“그 보석에 든 건 딱 우리 전투원들이랑 힘 합쳐서 케이클랍스 없애버리면 사라질 정도의 마력이지.”
그 힘을 케이클랍스에서 모두 쏟아부을지는 케이에게 달렸다. 이미 한 번의 배신 전과와 마왕이라는 타이틀이 있긴 하지만 지금의 케이라면 틀림없이 그리해줄 것이라고 서도화는 믿었다.
케이는 말없이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신이 한때나마 가졌던 막대한 힘의 일부. 그러나 이건 서도화가 자신에게 보내는 신뢰였다.
그는 한참이나 이를 들여다보다 아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보석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너는? 아덴 너는 내가 이 보석을 가져도 상관없는가?”
“뭘 나한테까지 물어? 도화가 그렇게 하기로 정했으면 나는 그냥 따르는 거야.”
저렇게 말해도 정말 싫었다면 맹렬히 반대를 하거나 당장 보석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을 것이다.
케이의 시선이 다시 보석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보석을 쥐었다.
이것을 가진다는 건 정말로 케이클랍스와의 이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보석을 통해 서서히 핵의 힘이 몸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리고 마른 몸에 근육이 채워진다. 그리고 잠시 후 서서히 마력이 단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야… 이거 하나 줬다고 얘가 이렇게 변하네…….”
서도화가 헛웃음을 쳤다. 팬들이 말하던 병약 미소년은 어디로 가고 이곳엔 그저 아덴과 똑 닮은 체격의 마왕이 있을 뿐이다.
아니, 이곳에 함께 있는 건 아덴이 아닌 로건 리의 몸을 차지한 아덴이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이 순간만큼은 케이가 아덴보다 더 덩치가 커졌다 할 수 있겠다.
“그래. 이랬지 나는. 이 힘이지. 하하하!!!!”
케이가 그 어느 때보다 사악하게 웃었다. 누가 보면 힘 되찾자마자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했을 텐데 저 꼬락서니를 보고도 서도화와 아덴은 어떠한 경계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옛날이었으면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일 년 동거동락해 보니 알았다. 저놈은 원래 기쁘면 저렇게 사악하게 웃더라.
정작 걱정되고 불안한 건 따로 있었다.
“덴아 내가 이제 와서 할 말은 아닌데…….”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어. 마침 나도 그 걱정을 하고 있었거든.”
서도화가 빠르게 말라오는 입술을 축였다.
그래, 강해 보이네. 듬직해. 케이클랍스에 가도 아주 잘 싸우겠어.
그것까진 좋다 이거야. 그런데 만약, 정말 만약에. 저 모습에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어메스의 명실공히 비주얼 담당. 얼굴을 보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흥미를 가지고 찾아보며 결국엔 입덕을 시키고 만다는 병약계 미인.
우리 케이는 사라지고 저 근육 우락부락한, 누가 봐도 인간과는 좀 동떨어진 피부색의 마왕 놈만 남는다면?
“……그러면 쟤 어메스 활동 못 하는 거 아니냐.”
“아, 안 돼. 돌아와야지.”
서도화는 소름 끼치는 느낌에 서둘러 생각을 떨쳐내고 냅다 드러누웠다.
“아, 아무튼. 내일 케이클랍스로 출발해야 하니까 얼른 자. 케이, 너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고. 애들이 불안해서 안 되겠다고 무기 들고 보초 서겠대.”
“……그래. 근데 우리 연습은?”
“지금 체력 빼면 내일 다친다.”
아덴이 서도화의 옆에 벌러덩 누웠다. 그 옆으로 케이가 어색하게 떨어져 누웠다.
“예전에 살던 숙소에서 자는 것 같다.”
“그러게.”
어색하지만 묘하게 익숙한 느낌을 받으며 서도화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