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파는 황태자 # 문백경,망기 >
1화. 내 몸은 내가 챙긴다
차라리 내게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비틀비틀 양화대교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이러려고 내가 한의사가 된 건 아니었는데. 개원하고 3년도 못 버티고 문을 닫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빚더미에 깔리게 될 줄도 정말로, 몰랐는데.
하지만 이때의 나는 예감하지 못했다.
양화대교에서 떨어진 내가.
소설 속 제국 황태자가 되어.
뱀파이어 등짝을 쑥뜸으로 지지고.
드래곤 날갯죽지에 장침을 꽂으며.
소설 속 세상의 신의로 불리게 될 거란 사실을, 이때만 해도 나는 솔직히, 정말로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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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덥다.’
머릿속을 톡톡 두드리는 목소리.
낯선 알림음에 이한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찌 된 일인지 자는 와중에도 더위가 느껴졌다.
혹시 아직 술이 덜 깬 걸까.
아니면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 걷던 양화대교엔 한겨울 칼바람이 쌩쌩 불었으니까. 거기 구석에 쓰러져 잠들었다면 엄청난 추위가 느껴져야 할 테니까. 아니, 사실 나는…….
‘떨어졌어.’
이한은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떨어질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가슴이 너무나 갑갑해서.
취한 김에 속 시원히 외쳐볼까 싶어서.
양화대교 난간을 잡고서 목청을 높였더랬다.
그러다가 그만 난간 너머로 떨어졌더랬다.
‘그럼 나, 지금 한겨울 한강 물에 빠져 있다는 건데.’
마음에도 없던 죽음이라니. 덜컥, 겁이 났다. 한데 어쩐지 이상하게도 춥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입가에 히죽, 웃음이 배어났다.
한데 그때였다.
“……자 전하.”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려 왔다.
어딘지 걱정 가득한 느낌의 음성이 다시금 톡톡.
이쪽을 불렀다.
“황태자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감촉의 손바닥이 이쪽의 어깨를 꾹꾹. 염려하듯 흔들어 왔다.
……뭘까.
난 지금 온몸을 다 바쳐 한강 수온을 체크(?)하는 중일 텐데. 혹시 119가 벌써 재빠르게 출동했나.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물에서 건져준 걸까.
‘역시 갓한민국 119.’
이한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그럼 됐다. 살아 있으면 된 거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한의원 간판 내리면서 쌓인 빚, 그게 무섭긴 해도 최소한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이번엔 잘해보자.’
빚, 갚으려면 고생 많이 할 거다.
그래도 용기를 내보자고.
새출발 해보자고.
굳게 다짐하며 눈을 떴다.
그리고 멍해지고 말았다.
“……어?”
눈앞의 풍경이 한강과 너무나 달랐다.
앞에 있는 사람도 119대원이 아니었다.
“전하! 제가 보이십니까?”
울먹이며 이쪽을 흔드는 남자.
외국인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잘생김을 뿜어내는 미중년이었다. 매끈한 얼굴, 갈색 머리칼과 콧수염. 헐리웃 스타 브래드 패트와 톰 크루브를 5:5 비율로 얍얍촵촵 섞으면 짜잔, 하고 만들어질 것 같은 외모랄까.
이한은 얼떨떨함을 되삼키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저기, 누구세요?”
“……예?”
딱 한마디 물었을 뿐인데.
미중년 남자의 얼굴이 한층 울상이 되었다. 돌아오는 목소리에도 울음이 배어났다.
“흐, 흐흑……! 전하, 설마 제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저는 전하를 계속 따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전하의 주치의 가르딘이니까 말입니다!”
“…….”
뭔가 상황이 이상한데.
처음엔 장난이라도 치는 건 줄 알았다.
한데 가만 보니 아니었다.
연기치고는 울먹임이 너무 리얼했다.
저게 연기라면? 대종상, 아니, 아카데미 주연상도 넉넉히 가능할 거다. 게다가 미중년 너머로 보이는 이곳 풍경도 이상했다.
‘실내다. 게다가 엄청 화려해. 여기, 뭐지.’
이한은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다.
과장 좀 섞어서 100평은 될 법한 실내였다. 그런데 벽이며 천장이며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이쪽의 기색을 눈치챈 걸까.
자신을 ‘가르딘’이라고 밝힌 사내가 재빨리 말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전하의 침실입니다. 조금 전에 일기를 쓰시기에 제가 자리를 비웠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부르시질 않아 들어와 보니 피를 토하고서 혼절해 계셨습니다.”
침실? 여기가?
‘그런데 내가 전하라고? 왜?’
점점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이한은 냉철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여전히 울먹이는 미중년 사내를 향해 말했다.
“저기, 제가 목이 좀 마른데. 혹시 물…….”
“여기 있습니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사내가 빛의 속도로 물잔을 내밀어 왔다. 금이며 은이며 보석까지 알뜰살뜰하게 장식된 엄청난 물잔이었다.
“…….”
여기 박힌 다이아, 암만 봐도 큐빅은 아닌 거 같은데. 손잡이도 보면 볼수록 이거…… 24k 삘인데.
입을 대려니 어쩐지 황송해졌다.
하지만 목마름이 우선이었다.
물잔을 받았다.
기울였다.
벌컥, 벌컥, 크게 마셨다.
그러다가 우연히, 멀찍한 곳에 세워진 커다란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그 속에 낯설고 창백한 모습의 청년이 있었다.
“…….”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남자. 물잔을 마시다가 거울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남자. 한데 거울 속 남자가 들고 있는 물잔이 낯설지가 않았다.
24k 금 손잡이.
큐빅과는 차원이 다른 다이아마저 박힌.
엄청나고 황송해서 입이라도 댈까 싶은.
그런 물잔을 들고서 목을 축이다가…….
“……푸읍!”
뿜었다.
이쪽도, 거울 속의 남자도.
동시에 물을 왕창 뿜어내고 말았다.
“저, 전하!”
가르딘이 화들짝 놀라며 수건을 꺼냈다. 이쪽의 입가와 앞섶을 금이야 옥이야 닦아주었다.
그동안 이한은 거울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가르딘도 젊은 남자의 입가를 닦아주고 있었다.
‘저거, 나야?’
40대 초반의 아재가 아니었다.
20대 초반의 파릇한 나이였다.
게다가 그 모습이 어쩐지 묘하게 눈에 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기억이 났다.
분명하다.
저 창백한 얼굴.
까칠한 표정과 눈빛.
아까 오후까지 읽었던 소설.
‘마검의 황제’…… 일명 ‘마검황’의 등장인물이다. 그 소설에 나오던 황태자의 일러스트와 똑같다. 아니, 아예 판박이로 현실에 붙여놓은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라키엘이라고?’
이거, 실화 맞나.
아니, 꿈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현실이었다.
믿기지가 않지만 자신의 몸 감각도, 주위의 풍경도. 그저 꿈이나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생생했다.
“하, 하하…….”
새삼스러운 깨달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뭐랄까.
족쇄가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나, 소설 속의 황태자가 된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그 뜻은 명확했다.
한의원이 망하면서 남은 엄청난 대출 빚과 이자.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더는 빚을 갚으려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 하하하, 하하.”
길 가다가 로또 1등 용지를 주우면 딱 이런 기분이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벌떡 일어났다.
한데 그때였다.
“……어?”
피잉.
갑자기.
느닷없이.
세상이 빙글 돌았다.
빈혈? 어지러움증?
알 수 없었다.
그저 다리가 풀렸다.
덕분에 반도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 주저앉아야 했다.
“아앗? 저, 전하!”
기겁한 가르딘이 재빨리 이쪽을 부축해주었다.
“으읏, 나…… 왜……?”
이렇게 전신에 힘이 없는 걸까.
이상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나이면 한창 팔팔할 때인데. 그런데 이렇게 열흘쯤 굶은 것처럼 비리비리한 느낌이라니. 40대였던 원래 자신의 몸보다 훨씬 무기력했다.
“……잠깐만.”
이한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거울을 향했다.
“…….”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소설 마검황의 초반 스토리.
황태자 라키엘은 주인공이 아니다. 그저 초반에만 잠깐 등장하는 배경 인물, 조연에 불과하다.
어릴 때부터 앓던 지병이 악화되었다.
침대에서 겔겔거리다가 꽥.
고작 22살의 나이에 죽는다.
이후 제국은 대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그 혼란 속에서 진짜 주인공이 진정한 영웅의 길을 걷는다.
그것이 바로 소설 ‘마검황’의 도입부였다.
‘……요약해보자. 그러니까 이거, 내가, 소설 초반부에 지병에 시달리다가 켁, 하고 죽는 병약한 황태자로 빙의한 거잖아.’
황족이 되었다며.
고생 끝이라며.
날아갈 듯하던 기분이 쌔하게 가라앉았다. 비로소 깨달음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확실하게 말하는 건데.
이게 정말로 실화라면.
나는 ㅈ됐다.
♣
“후우. 이건 진짜구나.”
30분이 지났다.
이한, 아니, 라키엘은 예의 거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속에 창백한 외모의 은빛 머리칼 남자가 서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였다.
‘신기하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신기했다.
거울 속 저게 자신의 모습이라니.
솔직히 잘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황태자가 됐건 어쨌건.
권력과 돈을 쥐고 있든 말든.
꽥하고 죽으면 그냥 게임 끝인 거다.
게다가 알면 알수록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가르딘. 내 나이가 지금 21살이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
현재 나이 21세.
소설 속의 전개를 떠올리자면?
‘최대한 길게 잡아도 남은 수명이 1년밖에 안 된다는 건데.’
생각하자니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싶었다.
‘이건 무슨 소설도 아니고.’
어쩌다가 자신이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다만 확실한 팩트가 하나 있었다.
‘모처럼 높은 신분이 됐고, 탱자탱자 편하게 살 수 있게 됐어.’
그런데 장애물이 있다.
장애물이 좀 심하게 크다.
‘1년도 못 살고 죽어야 한다니.’
라키엘은 연신 흘러나오는 한숨 속에서 소설 초반의 전개를 떠올렸다. 다행히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이라, 대부분의 내용을 되짚을 수 있었다.
‘라키엘은 황태자였고, 황실의 모든 치료를 다 받았어.’
최상의 의료 혜택을 다 누렸다.
성직자의 축복도 무수히 받았다.
그러나 모두 소용없었다.
황실의 역량을 사골육수 붓듯 모조리 쏟아부었음에도, 소설 속 황태자 라키엘은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까 답은 하나야.’
이곳의 의술로는 살아날 희망이 없다. 뛰어난 성직자들을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그건 소설에서도 다 실패한 방법이니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곳의 의술에만 의존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라키엘은 결론을 내렸다.
‘약속된 부귀영화 황족 라이프를 놔두고 내가 소설처럼, 허망하게 죽을 거 같냐.’
절대로 죽기 싫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거다.
게다가 정말 다행스럽게도, 자신에겐 이곳에선 시도된 적 없는 한의술이 있었다.
“후우. 가르딘?”
“예, 전하?”
라키엘은 가르딘을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 침술…… 아니, 할 일이 있으니까 나가서 바늘 좀 가져와 줘. 크기는 상관없고 최대한 많이.”
“……예?”
움찔 놀라는 가르딘.
라키엘은 생긋 웃었다.
그리고 내심 굳게 다짐했다.
자신이 죽음을 앞둔 황태자라면.
한데 이곳의 의술로 자신을 살릴 수 없다면.
체질개선, 원기회복, 자양강장, 활력증진까지.
이제부터, 내 몸은 내가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