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화 (2/468)

2화. 오장육부와 춤을 (1)

“나가서 바늘 좀 가져와 줘. 크기는 상관없고 최대한 많이.”

“……예?”

가르딘이 움찔 놀랐다.

이내 잘생긴 얼굴로 고개를 갸웃. 아무래도 이쪽의 말이 다소 뜬금없었나 보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뭐,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바늘로 뭘 할지는 차차 보게 될 테니까.

“부탁일까, 명령일까?”

“……!”

혹시나 해서 슬쩍 찔러봤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가르딘 경이 빛의 속도로 뛰어나갔다.

그 사이, 라키엘은 호흡을 골랐다.

‘일단은 진단부터 해보자. 이 몸뚱이의 뭐가 문제인지.’

그걸 정확히 파악해야 제대로 된 진료를 시작할 수 있다.

천천히 맥을 짚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쓰읍.”

혀를 차고 말았다.

당혹감이 쑴펑쑴펑 치솟은 까닭이었다.

‘이 맥은 대체 뭐냐.’

그는 어처구니가 실종되는 심정을 느꼈다. 진심 이런 맥은 처음이었다. 살필수록 당혹감이 커져만 갔다.

맥이 이상했다.

아니, 끔찍했다.

생각할 수 있는 나쁜 예후가 모조리 다 느껴졌다.

일단 맥이 고르지 않았다. 잘 뛰다가 맥이 돌연 멈추곤 했다. 호흡 열 번을 채우지도 못하고 멈추고. 또 멈추고. 전형적인 대맥(代脈) 증상이 느껴졌다.

심각한 정도였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란 점이었다.

‘대맥 증상 사이에도 불규칙한 맥이 더 섞여 있어. 갑자기 빨라졌다가, 멈췄다가, 이건 ‘촉맥(促脈)’ 증상인데.’

오장에 열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기이한 맥이 손에 손잡고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더 느껴졌다.

‘부비맥(釜沸脈), 어상맥(魚翔脈), 탄석맥(彈石脈), 해색맥(解索脈), 옥루맥(屋漏脈), 하유맥(鰕遊脈), 작탁맥(雀啄脈), 언도맥(偃刀脈), 전두맥(轉豆脈), 마촉맥(麻促脈)까지…… 와나. 이거, 치료 난이도 실화인가.’

절로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이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이른바 십괴맥(十怪脈)이라고 불리는 증상들. 하나라도 증상이 보인다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특이한 맥상이 모조리, 싸그리,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알차게 다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무슨 조기사망 종합패키지도 아니고.’

한의사로 제법 많은 맥을 짚어본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개막장 맥이 한몸에 죄다 모일 수가 있는 걸까. 이게 가능은 한 걸까.

아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한데 그게 실화라는 게 문제다.

라키엘은 침대 옆 거울을 돌아보았다.

병약한 인상의 얼굴이 그 속에 있었다.

‘쯧쯧. 이래서 1년도 못 살고 죽은 거구나, 너는.’

문득, 소설 ‘마검황’ 속 초반 전개가 떠올랐다. 소설에서 황태자 라키엘의 병명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수많은 의사가 달라붙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엔 전부 포기했다.

아무도 병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마법에 의한 저주라는 의견까지 냈을 정도였다.

‘근데 이건 나도 진심 모르겠네.’

어디 한 군데가 확실하게 안 좋은 게 차라리 낫다. 그곳에 관련된 질환을 추적하고, 치료하면 되니까.

한데 지금은?

‘그냥 전부 다 안 좋아. 어디 하나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곳이 없는 몸이야, 이건.’

어처구니도 없고.

황당하고.

‘인생 난이도 진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의 삶도 쉬운 인생은 아니었다.

‘그놈의 대출, 쉽게 갚을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의 마지막 몇 개월을 떠올린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한의원을 개업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대출을 풀로 땡겼지만.

금방 갚을 수 있으리라고.

후딱 메꿀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고, 확신했더랬다.

‘목이 좋은 자리였으니까.’

나름 괜찮은, 수도권 신도시 중심상권의 상가 2층이었다. 그만큼 임대료가 비싸긴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유동인구가 충분했다.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덕분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데 그 확신과 믿음이 한 큐에 날아갔다.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전국적인, 아니,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 사태가 터졌다. 그 여파로 한의원을 꾸준히 찾던 발길이 줄어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의원 방문 환자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심지어 2명이나 연달아 나왔다. 그 소식이 지역 아파트 인터넷 카페에 입소문으로 좌악 돌았다.

그게 결정타였다.

환자가 아무도 오지 않게 됐다.

수입이 거의 끊겨 버렸다.

대출 이자는 물론이고, 건물 임대료마저 내기가 빠듯해졌다. 개원할 땐 장점이라 생각했던 상권의 좋은 자리가, 팬데믹 사태에선 높은 임대료라는 치명타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한의원이 망했다.

억 소리가 7옥타브로 나오는 어마어마한 대출금만 남긴 채였다.

한데 지금은?

‘겨우 그 신세에서 벗어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더 난리가 난 것 같다.

라키엘은 한숨을 되삼키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한국에서의 자신이 금융적 위기에 내몰렸다면? 지금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게 됐다.

‘얼 타면서 있다간 초고속 다이렉트로 염라대왕이랑 면담 일정 잡겠지.’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뭐라도 해야 한다.

어떻게든 치료해봐야 한다.

안 그러면 연고도 없는 이 낯선 동네에서, 팔자에도 없던 병약 요절 크리티컬에 당첨될 것이다.

‘그건 싫어. 산다. 꼭 살아남아서 떵떵거리며 살 거다.’

어차피 한국에는 미련도 없었다.

부모님은 진즉 돌아가셨다.

형제나 친척도 딱히 없다.

여자친구도 없…… 다.

빚만 잔뜩 남았다.

‘그래도 뭐…… 원호야, 은수야. 나 여기서 잘 살아볼게, 짜식들아.’

그나마 한국에서 유일하게 정 붙이던 친구놈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꼭 살아남겠다는 다짐을 새삼 되새겼다.

그때쯤 가르딘 경이 돌아왔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한 아름 안고서였다.

“후, 후욱! 전하? 분부대로 바늘을…… 모조리 가져왔습니다.”

털퍽!

그가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최소 백 개는 훨씬 넘어 보이는 바늘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

“전하?”

“어.”

“분부대로 바늘을 가져왔는데…….”

“응.”

“시키신 대로 최대한 많이 가져오려고 뛰어다녔는데…….”

“그래…… 잘했어.”

“감사합니다!”

“그럼 보따리 좀 펼쳐줄래? 바늘 좀 골라보게.”

“명 받들겠습니다.”

쏴르르!

가르딘 경이 보따리를 뒤집었다.

갖가지 다양한 크기의 바늘 수백 개가 테이블 위를 점령하며 반짝반짝 존재감을 뿜어냈다.

라키엘은 그중에서 그나마 가늘고 작은 바늘들을 골라냈다.

‘이거 제법 따끔하겠네.’

골라낸 바늘을 보자니 숨이 절로 거칠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걱정이 되어서였다.

‘이렇게 큰 바늘로 셀프 침술을 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짜.’

사실 한의원에서 침술에 쓰이는 침은 보통의 바늘과 달랐다. 훨씬 가늘었다. 끝도 살짝 둥글었다. 병원에서 쓰는 주삿바늘보다 덜 아픈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데 그런 침에 비하자면 지금 골라낸 바늘들은?

‘이건 뭐 몽둥이네, 몽둥이.’

그래도 시침을 하는 데에 지장은 없으리라.

라키엘은 열심히 바늘을 골라냈다.

바늘 끝을 촛불로 소독했다.

그런 이쪽의 행동이 생소했던 걸까.

“저기, 전하?”

“으음?”

“이렇게 여쭙는 것이 외람되지만…… 그 바늘로 지금 무얼 하시려 함이신지…….”

가르딘 경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답해주었다.

“간단해. 이걸로 내 몸을 살짝 찌를 거야.”

그러니까, 시침(施鍼)을 할 거다.

소설 속 라키엘은 갖은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엔 죽었다. 즉, 이곳의 의술이나 성직자의 축복이 도움이 안 됐다는 소리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뭔가 다른 걸 해야 한다.

한데 마침 이쪽에겐?

한의술이 있다.

이곳에 없는 방식의 의술이다.

이 한의술이 어쩌면, 일말의 희망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다.

‘일단 침술부터 시작해보자. 약재는 구하려면 시간과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걸로는 이게 최선이겠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대답이 가르딘 경에겐 경악스러웠던 걸까.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에?”

“뭘 그리 놀라. 찌를 거라고. 살짝.”

“…….”

“괜찮아. 안 죽어.”

“……즈어어언하-!”

가르딘 경이 빛의 속도로 찰싹 무릎을 꿇었다.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에 울상을 새록새록 새기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자해만은 아니 되십니다아!”

“…….”

“전하께선 황가를 이어가실 분이십니다. 한데 아무리 병마에 시달려 심신이 고단하고 힘겹더라도 이런 식의 자해라니요. 전하? 그러니 제발 진정하시고…….”

“진정은 그쪽이 해야 할 거 같은데.”

“즈어어언하아아-!”

“귀 떨어지겠네. 자해 아니라니깐.”

“하지만 전하?”

“쯧. 그만. 거기까지.”

가르딘 경의 애원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경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오해를 지우려면 간단하게나마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라키엘은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이걸 안 하면 내가 죽어.”

“……예에?”

“그래서 하는 거야.”

“그게 무슨…….”

“경이 주치의로서 날 걱정해주는 마음은 알겠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일단 한 번만, 내가 하는 걸 믿고 지켜봐 주면 안 될까?”

“전하.”

“만약 문제가 생기면 다시는 안 할게. 대신-”

망설이는 가르딘 경을 향해 쐐기를 박듯 말했다.

“별일이 없으면 앞으로도 날 믿어줘.”

“…….”

“그래 줄 수 있겠어?”

“…….”

가르딘 경은 얼결에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어째서였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전하께서, 원래 이런 분이셨나?’

이상했다.

아까 혼절했다가 깨어났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말투도, 행동도, 심지어 표정이나 눈빛도 미묘하게 달라지셨다.

한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은 판단이 잘 서지가 않았다.

‘적어도 전처럼 맥없이 흐릿한 눈빛은 아니신데.’

오히려 또렷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언제나 병약했던 황태자.

나약하기 짝이 없던 황태자.

그런 황태자에게서 처음으로 보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그 눈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르딘 경은 황태자의 말을 수긍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전하.”

“그래. 고마워.”

라키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단 작은 산 하나는 넘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는 첫 번째 바늘을 들었다.

엉망진창인 자신의 몸.

어디에 침을 놓을지는 내심 정해둔 바였다.

‘역시 시작은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이겠지.’

아까 진맥했던 게 떠올랐다.

온몸이 다 엉망진창.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곳을 딱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호흡기일 것이다.

‘일단 숨이 편안해져야 뭐라도 하니까.’

호흡이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그게 원활해야 병마와 싸울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기엔 인체 십이정경(十二正經)의 시작점이자, 폐부와 가장 크게 연관되는 수태음폐경부터 다스림이 옳을 듯하였다.

“후…….”

누워서 셔츠를 벗었다.

숨을 골랐다.

바늘을 왼쪽 쇄골뼈 끄트머리로 가져갔다.

어깨와 쇄골이 이어지는 어름의 아래.

빗장아래오목(infraclavicular fossa) 귀퉁이.

앞정중선에서 바깥쪽으로 6촌 부위.

늑간신경통과 흉통, 기관지천식.

호흡곤란, 기침 등을 다스릴 때.

가장 중하게 다루는 폐의 모혈.

일명, 응중수(膺中兪)라고도 불리는 혈자리.

중부혈(中府穴)을 바늘로 찔렀다.

톳!

바늘 끄트머리가 정확히 5푼 깊이로 중부혈을 파고들었다.

‘읏.’

바늘이 커서 그런지.

생각보다 더 따끔했다.

한데 그때였다.

별안간, 예상치 못한 맑은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난데없이 고막을 콕콕 두드리는 벨소리. 동시에 눈앞에 주르륵, 뜻밖의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의 정확한 침술에 의해 신체가 기분 좋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약간의 제 기능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신의 허파가 깨어났습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따봉을 보냅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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