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오장육부와 춤을 (2)
[당신의 허파가 깨어났습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따봉을 보냅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00]
“……뭐?”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의문사를 내뱉었다.
중부혈에 셀프로 침을 놓았을 뿐인데.
눈앞에 웬 희한한 메시지가 떴다.
‘뭐지. 나 아무 약도 안 먹었는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도 고개가 움직이며 바뀌는 시야와 함께 옮겨졌다. 마치, VR 게임을 체험하며 보는 풍경 같았다.
‘대체 뭐냐 이건.’
하지만 라키엘은 더 의문을 느낄 수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마저 살펴보기도 전에, 가르딘 경의 염려 섞인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뾱뾱 찔러온 까닭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돌아보니 가르딘 경은 이미 안절부절. 마치 물가에 병아리 내놓은 어미 닭 같은 안색이었다.
그렇게나 걱정되는 걸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전하. 바늘이…….”
“쉿. 하던 것부터 마저 하고.”
“…….”
가르딘 경을 간단히 침묵시켰다.
두 번째 바늘을 들었다.
중부혈 바로 위쪽.
어깨뼈 부리돌기 안쪽.
찾아냈다.
조준했다.
망설임 없이 찔렀다.
톳.
수태음폐경의 두 번째 혈자리, 운문혈(雲門穴)에 따끔한 자극이 왔다. 동시에 라키엘은 눈앞에 떠오르는 추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딩동!
운문혈을 찌르자마자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이윽고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당신은 정확한 방법으로 운문혈을 시침하였습니다.]
[당신의 기관지가 시원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관지천식 증상이 소폭 완화됩니다.]
[당신의 가슴 답답한 느낌이 소폭 해소됩니다.]
[허파가 당신을 그윽하게 바라봅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00]
또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메시지가 떴다.
“…….”
이 메시지는 대체 뭘까.
이젠 놀랍다기보단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라키엘은 세 번째 바늘을 들었다.
조준했다.
‘다음은 천부혈(天府穴).’
천부혈은 위쪽 팔뚝에 자리했다.
위팔두갈래근(biceps brachii muscle)의 바로 바깥쪽 모서리, 앞겨드랑이 주름에서 아래로 3촌 위치. 그곳을 5푼 깊이로 찔렀다.
톳!
“……윽.”
맨정신인 상태에서 생팔뚝을 셀프로 폭폭 찌르는 기분을 아는가. 라키엘의 미간이 콱 찡그려졌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새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딩동!
[당신의 기침 증상이 조금 가라앉습니다.]
[허파가 기쁨의 들숨날숨을 내뱉습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300]
……역시 또다.
이젠 확실하다.
눈앞의 메시지는 착각도, 환각도 아니다.
‘그럼 뭔가 의미가 있다는 건데.’
일단은 계속 시침해보자. 그러다 보면 이 메시지의 보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겠지. 이걸 어떤 형태로든 써먹고 활용할 수도 있겠지.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더욱 시침에 집중했다.
톱!
협백혈(俠白穴)을 보람차게 찔렀다.
가슴이 아프고 구역질이 나거나, 호흡곤란, 기침이 올 때 주로 다스리는 혈이었다. 과연 혈에 자극이 가해지니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던 감각이 살짝 내려갔다.
한데 거슬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가르딘 경?”
“…….”
라키엘은 옆을 돌아보았다.
가르딘 경이 무릎을 꿇고서 뭔가를 간절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설마 기도라도 하는 걸까.
‘……시침이나 마저 하자.’
톳!
가르딘 경이 걱정하건 말건.
이번에는 척택혈(尺澤穴)을 찔렀다.
팔오금주름(cubital crease)과 위팔두갈래근 힘줄(biceps brachii tendon) 사이의 오목한 곳, 한마디로 팔꿈치가 접히는 주름 안쪽의 야들야들한 곳에 있는 혈자리였다.
“쓰읍.”
이번엔 진짜 따끔했다. 이쪽을 보는 가르딘 경의 표정도 통증으로 물들었다. 라키엘은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물었다.
“허. 내가 찔렸는데 왜 그쪽이 아파해?”
“그, 그게, 구경하다 보니…….”
“그보단, 내가 골라놓은 바늘 끄트머리 좀 촛불로 소독해줄 수 있을까?”
“……예?”
“그게 기도보다는 나한테 더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아, 알겠습니다, 전하.”
가르딘이 엉거주춤 바늘을 소독하는 가운데.
이번에는 공최혈(孔最穴)을 찔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톳! 토돗! 톳!
바늘을 연달아 꽂았다.
아래팔 엄지의 힘줄이 지나가는 곳의 열결혈(列缺穴). 손목 가까운 곳 요골동맥이 만져지는 자리의 경거혈(經渠穴). 손목의 태연혈(太淵穴). 엄지 뿌리 바깥쪽의 어제혈(魚際穴)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찔렀다.
그제야 오랜만에(?) 메시지가 떴다.
딩동!
[당신의 능숙한 침술이 여러 혈자리에 두루두루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허파가 편안하게 늘어졌습니다.]
[허파가 안마 의자를 찾고 있습니다.]
‘뭐냐. 네가 왜 안마 의자를 찾아. 게다가 이번엔 왜 HP 안 주는 건데.’
저도 모르게 오기(?)가 솟아났다.
라키엘은 11번째 바늘을 집어들었다.
바늘을 정조준했다.
소상혈(少商穴).
위치는 엄지손가락 손톱 뿌리 바깥쪽 0.1지촌.
쉽게 말하자면?
급체가 왔을 때 할머니들이 손을 따주는, 바로 그 유명한 자리였다.
톳!
그 순간이었다.
[당신은 자신의 좌반신 수태음폐경에 대한 적절한 방법의 시침을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의 허파가 환호의 탭댄스를 춥니다.]
[탭댄스의 리듬이 폐부와 짝을 이루는 전도지부(傳導之府)의 장기, 대장을 일깨웁니다.]
[당신의 대장 융털돌기가 리듬에 맞추어 기분 좋은 꿀렁임을 선보입니다.]
[대장이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2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600]
‘어?’
허파뿐만 아니라 대장까지?
깨어나서 HP를 후원했다는 메시지가 주르륵 떴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신이 보유한 HP가 스킬 개방 가능 수치에 도달하였습니다.]
[당신은 첫 스킬을 선택/개방할 수 있습니다.]
[개방 가능한 스킬은 현재 당신이 보유한 분야의 지식/능력에 기반합니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YES / NO]
“…….”
라키엘은 눈을 끔벅였다.
황당하고 신기했다.
자신의 오장육부에게 포인트를 후원받는 것도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인데. 이제는 그 포인트로 스킬을 개방할 수 있단다.
하지만 라키엘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뭐, 황당한 걸로 치면 소설 속의 인물이 된 걸로 이미 게임 끝 아닌가.’
그러니 겨우(?) 이런 정도로 놀라지 말자.
놀랄 시간이 있다면 이득부터 챙기자.
그는 다짐하며 ‘YES’를 선택했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을 열람합니다.]
화아악-!
눈앞에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메시지가 위아래로 길어졌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
[1. 진맥]
[2. 침술]
[3. 부항]
[4. 뜸]
[5. 탕약 조제]
[6. 약재 감별]
[7. 약초 탐색]
[8. 약술 주조]
[9. 진료비 청구]
[10. 아스라한 심법]
‘……후우.’
진짜로 떴다.
그것도, 생각보다 제법 많이 떴다.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배어났다.
‘이거, 전부 한국에서 내가 밥벌이로 하던 것들이네. 딱 하나만 빼고.’
그의 시선이 목록 제일 아래쪽을 향했다. 그곳에 ‘아스라한 심법’이라는 스킬 후보가 있었다.
‘저건…… 소설에서 봤던 거구나.’
문득, 소설 마검황의 설정들이 떠올랐다.
아스라한 심법.
그것은 마젠타노 황실의 직계 후손에게만 전수되는 강력한 심법이었다. 몇 번 지나가듯 언급된 바로는 약 300년 전, 전설의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과, 그가 모셨던 ‘로이드 프론테라’가 공동으로 창안한 심법이라 했던가.
‘뭐, 지금 내가 황태자니까. 이 몸도 어린 시절에 아스라한 심법을 익히긴 했겠지.’
다만 지병 때문에 건강이 만신창이라서. 그래서 심법 활용을 전혀 못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저 심법이 목록에 뜨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지금은 저걸 선택할 때가 아니야.’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스라한 심법은 전투용이다.
한데 지금 자신은?
누군가와 싸움을 벌일 일이 없다.
아니, 지금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은 병마다.
‘그러니까 신중하게 골라야 해.’
라키엘은 목록을 노려보았다.
깊게 고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1번, 진맥.’
모든 진료의 시작은 진단부터다. 그게 기본이다.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정확한 처방과 진료가 가능해지는 법이니까.
[목록 1번. 진맥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개방(1회차) 비용 : 500 HP]
[500 HP가 소모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00]
HP가 왕창 소모되었다.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딩동!
[당신이 지닌 진맥 지식과 경험이 스킬로 개방됩니다.]
[스킬명 : 진맥 Lv.1]
[대상의 맥을 짚어 대략적인 건강 상태를 진단합니다. 진맥 결과는 <초급 종합검진표>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됐다.
아니, 진짜로 된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종합검진표라.’
라키엘은 확인을 위해 오른손을 움직였다.
왼쪽 손목 맥을 짚었다.
집중했다.
그러자 스킬이 저절로 발동됐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안내에 따랐다.
이윽고 눈앞에 간단한 양식의 표가 떠올랐다.
[초급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1세]
[신장 : 176.2 Cm]
[체중 : 53.3 Kg]
[혈액형 : Rh+ O]
“…….”
이 몸,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멸치구나. 라키엘은 내심 뜨악하는 기분으로 검진표를 살폈다.
[아직 스킬 레벨이 낮아, 각 항목의 결과가 간략히 표시됩니다.]
[심장기능 : F]
[폐기능 : F]
[간기능 : F]
[비장기능 : F]
[신장기능 : F]
[오장(五臟) 종합지수 : F]
[위장기능 : F]
[소장기능 : F]
[대장기능 : F]
[쓸개기능 : F]
[방광기능 : D]
[경락기능 : F]
[육부(六腑) 종합지수 : F]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심각한 예후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발성 장기부전 및 급성 폐렴, 심근경색의 징후가 있습니다. 위험 수준의 면역력 저하가 감지됩니다. 심각한 영양 결핍 상태입니다. 현재 흡수 중인 영양 성분이 전무합니다. 위장의 부담이 적은 음식 섭취를 권장합니다.]
여러 의미로 엄청난 결과였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검진표 제일 아래쪽을 보고 있자니 입안에서 마른침이 트위스트를 추었다.
[예상 기대수명 : 91일]
‘……후아, 미친.’
절로 욕이 나왔다.
딸랑 3개월 뒤면 죽게 된다니. 막상 저 시한부 카운트 숫자를 직접 보게 되니, 공포심이나 막막함보다는 오히려 오기가 치솟았다.
‘그렇게 만만하게 죽어줄 줄 알고. 내가, 어? 진료실에 들어온 코로나 확진자 두 명이랑 대면하고도 검사 결과 음성 뜬 사람이란 말이다.’
라키엘은 콧김을 풍 내뿜었다.
이대로 죽기 싫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마음을 먹으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왼쪽 쇄골에서부터 팔뚝을 거쳐 엄지까지. 11개의 수태음폐경 혈자리에 꽂힌 바늘들을 차례대로 뽑았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정확하고 야물딱지게.
“후우.”
숨을 내쉬는 순간.
염전보사(捻轉補瀉)의 보(補)법에 따라 바늘을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호흡보사(呼吸補瀉)의 사(瀉)법에 따라 내쉬는 호흡과 함께 바늘을 뽑았다.
그동안 라키엘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산다. 꼭 산다, 내가.’
그래서 황족이라는 지위가 주는 달달한 꿀맛 라이프를 마음껏 즐기리라.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리라. 집념을 불태우며. 마침내 11개의 바늘을 전부 뽑는 순간.
딩동.
집념에 대답해주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이 (+)1일 증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