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화 (4/468)

4화. 맹독도 때론 약이 된다 (1)

시한부 인생은 서글프다.

예정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기분. 거부할 방법도, 미룰 수도 없는 그 기분.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흔한 드라마, 영화.

수많은 매체들에서.

수없이 다루는 시한부 인생이지만, 그건 적어도 시한부 환자를 곁에서 보살피고 지켜본 사람쯤 되어야 어떤 기분인지 약간은 알 거라고, 라키엘은 생각했다.

한국에서,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막막하고도 승산 없는 싸움을 가족으로서 치러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건…….’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이 (+)1일 증가하였습니다.]

[예상 기대수명 : 92일]

꿀꺼덕.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떡하니 실현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진심 실화인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이 몸뚱이는 시한부 환자였다. 진맥 스킬로 살펴본 결과가 딱 그랬다. 앞으로 91일밖에 못 살 거라고 했다. 남은 인생이 휴대폰 약정보다도 짧았다.

분명 그랬는데.

‘침술 덕분에 기대수명이 늘어났다고?’

자신의 침술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던가.

라키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한의원에서 보통 환자들한테 해주는 침술, 그거보다 조금 더 각 잡고 했을 뿐인데.’

한데 그 침술이 분명 효과가 있는 게 느껴졌다. 일단 숨이 아까보다 편해졌다. 고장 난 피리처럼 쌕쌕거리던 소리도 한결 줄었다.

‘그럼 또 해보자!’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아라비아 유전 터지듯, 가슴 깊이 잠들어 있던 의욕이 팍팍 솟구쳤다.

“바늘, 다 소독했어?”

“예, 전하. 한데…… 설마 또 찌르시려는 겁니까?”

“당연하지. 이리로. 얼른.”

가르딘 경을 재촉했다.

새 바늘 11개를 건네받았다.

다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번엔 왼손으로 바늘을 잡았다. 우반신 수태음폐경에 바늘을 찔러갔다.

톳! 토돗! 톳!

아까와 똑같은 순서와 깊이로.

침착하고 신속하게.

중부혈을 시작으로.

운문, 천부, 협백.

계속해서 찌르고.

적절히 자극하고.

마지막으로 소상혈까지 빠짐없이 알차게 찔렀다.

그러자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자신의 우반신 수태음폐경에 대한 시침을 완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당신의 신체가 과도한 시침을 버거워합니다.]

[현재 당신의 체력 수준으로는 3일에 1회 시침을 권장합니다.]

[과도하고 무리한 침술에 오장육부가 난색을 표합니다.]

[허파꽈리가 지나친 자극에 어깨를 움츠립니다.]

[허파의 멘탈이 쑴펑쑴펑 증발하고 있습니다.]

[대장 융털돌기가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춥니다.]

‘……컥.’

깜빡했다.

침술은 만능이 아니다. 침으로 신경, 혈맥을 자극하는 행위는 엄연히 환자의 체력을 필요로 한다. 괜히 침몸살 걸린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한데 지금 이 몸뚱이는?

체력이랄 게 없었다.

이 몸에 깃들어 있을 체력보다는 차라리, 성급하게 부어 버린 탕수육 소스 속에 남아 있을 행복지수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후우, 후욱.”

살짝 현기증이 몰려왔다. 확실히 저 메시지대로 몸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라키엘은 숨을 골라 쉬며 바늘을 뽑았다.

한편으로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정리를 한 번 해보자. 눈앞에 떠오르는 저 메시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침술이 효과가 있긴 해. 기대수명이 하루 늘어났으니까. 그런데 단점이 있어. 3일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어.’

3일에 한 번 시침.

그때마다 기대수명이 하루씩 늘어난다면? 죽는 날을 대략 한 달 정도는 늦출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죽는 걸 미루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다.

‘아니면 체력을 길러서 매일 침을 맞을 수 있게 되거나.’

그러면 매일 기대수명을 늘릴 수 있으리라. 죽음을 팍팍 미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보약이 최고지!’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왔다.

자고로 자양강장, 원기회복에는 보약이 갑이다.

‘밥도 팍팍 더 챙겨 먹고. 보약도 챙기는 거야.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으면서 차근차근 운동도 해주고.’

그러면 저질 체력 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라키엘은 궁리의 정주행을 시작했다.

어떤 탕약을 조제할 것인지.

약재는 어떻게 구할 것인지.

생각하고, 소설 초반의 전개를 내심 정리해보며. 그는 탐색과 모색, 고민의 밤을 지새웠다.

새벽 어스름이 밝았다.

라키엘은 눈을 뜨자마자 손부터 들었다.

“…….”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어스름한 새벽 박명 속에서 자신의 손등을 물끄러미.

그런데 없다.

손등 중간에 새겨져 있던 흉터가 보이지 않았다.

‘진돌이하고 산책 나가다가 생긴 흉터였는데.’

너무나 신나서 날뛰던 덩치 큰 녀석.

그만 녀석의 발톱에 제대로 긁혔더랬다. 생각보다 크게 까졌던 터라, 몇 년이 지났어도 사라지지 않고서 손등 중간을 차지하고 있던 흉터였다.

한데 지금 자신의 손등은?

매끈했다.

흉터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고생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곱디고운 손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네.’

자고 일어나면 한국의 내 방이 아닐까. 잠결에 잠깐 기대도 해보았더랬다.

하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쯧.’

이제는 확실하다.

착각도, 꿈도 아닌 거다. 이곳의 삶이 현실이 된 거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인생을 살게 된 거다.

딱 91일 남은 시한부 인생을 말이다.

‘후우, 내 팔자야.’

라키엘은 넌더리를 내며 손을 뻗었다. 침대 옆, 손 닿는 곳에 자그마한 황금 종이 있었다.

딸랑딸랑.

종을 울리자마자 침실 저쪽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부스럭부스럭, 잠깐 끙끙거리나 싶더니.

“……전하? 부르셨습니까?”

침실 한쪽에 마련된 보조 방에서 가르딘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곤했던 걸까.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일어났나? 경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양심이 참 없네.”

“예? 양심이…… 없다니요?”

눈곱을 떼어내며 보조 방에서 나오던 가르딘 경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라키엘의 입가에 투덜거림이 걸렸다.

“얼굴도 잘생겼어. 키도 커. 참 번듯하지. 외모만 봐도 어디 하나 빠짐없이 완벽할 것처럼 말이야.”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난 지금 경을 책망하고 있는 건데.”

“……예?”

“내 주치의라며. 내 건강을 지키는 게 경의 일이라며. 한데 환자보다 늦잠을 자?”

“어, 그것은…….”

가르딘 경의 안색이 흐트러졌다.

제대로 정곡을 찔린 표정이었다.

그를 향해 말했다.

“물론 나도 알아. 경도 피곤하겠지. 온종일 날 보살피느라고 지치겠지. 하지만 한 시간 뒤면 해가 뜰 거야. 제대로 된 주치의라면, 보살피고 있는 환자가 중환자라면, 보통은 이 시간쯤엔 일어나서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는 게 기본인 거잖아.”

“……옳은 말씀이십니다. 송구합니다.”

가르딘 경의 잘생긴 미중년 얼굴이 자괴감으로 물들었다. 라키엘은 내심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다.

‘아침 댓바람부터 갈궈서 미안, 가르딘 경.’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가르딘 경은 이쪽의 주치의다. 그런데 새벽에 이쪽을 방치하고 편하게 잠을 자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내 남은 기대수명으로 봐선 새벽에 고열이나 발작, 호흡 곤란 등을 겪을 수도 있으니까.’

원래 대부분의 병은 밤과 새벽 사이에 기승을 부린다. 지독한 감기나 몸살 정도만 겪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한데 지금 자신은?

생명이 3개월 남짓 남은 중환자다. 도중에 어떤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하니 주치의를 조금 괴롭히는 한이 있어도, 새벽에 깨어서 곁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 목적을 새삼 되새기며.

라키엘은 짐짓 날카로운 눈초리를 했다.

“그러니 앞으로 늦잠 압수. 이제부터는 무조건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내 상태를 체크하도록.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수긍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쯤이면 됐을 거다.

어쨌거나 가르딘 경은 충직한 자니까.

‘소설 마검황의 초반 내용을 봐도 그랬어.’

가르딘 경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소설의 전개나 사건을 보면 가르딘 경이 충직한 자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었지. 그래서 처음엔 제법 많았던 주치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내려놓고 떠났어. 아니, 말이 떠난 거지 사실은 탈출한 거였다고 해야 하나.’

대부분의 주치의들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눈치를 챘을 것이다. 황태자에겐 가망이 없다는 걸.

아무리 치료를 해도.

정성껏 간호를 해도.

결국엔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되리라는 걸.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주치의들은? 갖가지 그럴듯한 개인적인 이유와 핑계를 대며 자리를 내려놓았다. 아니, 대탈출을 감행했다.

죽기 싫어서였다.

‘황족이 죽으면 그 황족을 담당하던 주치의도 책임을 지고 처형당하게 되니까.’

그러다 보니 결국, 보조 의사였던 가르딘 한 사람만이 주치의로 남게 되었다.

가장 우직하고.

가장 충직하며.

가장 책임감 있었던 사람이, 종국엔 모든 책임을 지고 원샷 참수형 당첨.

‘……이라는 새드엔딩을 맞이했던 거지.’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이쪽의 때아닌 모닝 갈굼에 안절부절못하는 가르딘 경. 낯선 세상의 병약한 몸으로 빙의한 자신에게 저런 충신이나마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어젯밤에 짜둔 계획을 실행하려면…… 이런 충신이 필수니까.’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또라이 같은 일을 벌여도.

이쪽을 믿고 함께 가줄 사람이 필요했다. 바로 눈앞의 가르딘 경과 같은 인재가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가르딘 경?”

“예, 전하?”

“내가 경에게 시킬 일이 하나 있어.”

“어떤…… 일입니까?”

“왜? 벌써 걱정되고 겁나?”

“…….”

“혹시 내가 어젯밤처럼 또 이상한 거 시킬까 봐?”

“…….”

“후우.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고 차라리 그냥 고개를 끄덕이지 그래.”

끄덕끄덕.

“…….”

이쪽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르딘.

라키엘은 그만 싱긋 웃어 버렸다.

“미리 안심을 시켜주자면,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지.”

“하오나 전하.”

“응?”

“어젯밤엔 바늘로 자해를 하셨지 않습니까.”

“……자해 아니라니까.”

“그래도 목덜미부터 어깨며 팔뚝과 손까지 바늘로 푹푹.”

“아니거든.”

“전 무서웠습니다.”

“…….”

“그런데 지금 전하의 표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왜. 내 표정이 어떻길래.”

“어젯밤에 바늘 가져오라고 하시던 때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날 걱정해주는 거야?”

“예, 전하.”

“설마 내가 미친 짓이라도 할까 봐?”

“……예, 전하.”

“쯧. 됐어.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진짜로 이상하거나 미친 짓 거들라고 시키진 않을 거니까.”

“그렇, 습니까?”

“당연하지.”

라키엘은 콧김을 풍 뿜어냈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이 별궁 식자재 창고에 말이야. 일반 음식 재료 말고, 좀 독한 것들도 있지?”

“예? 특별한 것이라면…….”

“독약 만드는 재료.”

“그거야 당연히 있습니다. 여긴 궁이니까 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투구꽃 뿌리도?”

“있습니다. 독약 만들기 좋은 재료니까요.”

“잘됐네. 그거 몸에 좋은 건데. 가져와.”

“예?”

“가져오라고.”

“……설마.”

“응. 먹을 거야.”

라키엘이 신뢰감을 팍팍 심어주듯 화사하게 웃었다.

가르딘 경은 ‘우리 미친 또라이 황태자님 어떡하죠’ 사연을 전국만방에 뿌릴 것 같은 눈빛으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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