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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9화 (9/468)

9화. 프로 갑질러의 다짐 (1)

퍼어엉-!

딱 봐도 비싸 보이는 크리스털 병이 단숨에 박살 났다.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그저 탁자 위에 놓였던 병인데. 손바닥에서 폭발적으로 발사된 물 덩어리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당황스러웠다.

‘뭐, 뭐야.’

이쪽은 손으로 물을 배출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물이 마나에 실려 배출되면 그저 수돗물 정도로 쪼르륵 흘러나오지 않을까 여겼더랬다.

그래서 안 흘리고 받아내려고 빈 병도 야물딱지게 준비해놨던 건데. 물을 안 흘리긴커녕, 대놓고 물폭탄이 터져 버렸다.

‘허어. 이거 실화인가.’

직접 벌여놓고도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덕분에 망연자실 침실만 둘러보았다. 침실은 졸지에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사방이 물바다였다.

8리터가 넘는 물폭탄이 터지며 탁자는 밀려났고, 바닥이며 침대엔 물이 흥건했다. 심지어 천장까지도 물이 튀었다.

튄 것은 물뿐만이 아니었다.

“아큭.”

뒤로 걸음을 옮기던 라키엘은 돌연 느껴지는 따끔함에 발을 움츠렸다. 발바닥에 쌀알 크기의 크리스털 조각이 박혀 있었다.

“어오 씨.”

병이 얼마나 철저하게 박살 났는지, 사방이 크리스털 유리조각이었다. 유리조각이 튀지 않은 곳이 없어 침실 바닥이 구석구석 반짝거렸다. 제법 커다란 왕건이(?) 파편 몇 개는 대놓고 벽면에 살짝 박히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저 파편에 맞았으면 제법 다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엉망진창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황태자 전하!”

벌컥, 콰앙!

침실 두 곳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하나는 침실 안쪽의 쪽방 문이었다. 가르딘 경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다급히 뛰쳐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복도 쪽 문이었다.

“전하! 무사하십니까!”

열 명이 넘는 근위병이 침실로 우르르 몰아닥쳤다. 하나같이 긴장된 얼굴로 언제든 검을 뽑아들 태세였다.

한데 쪽방 문을 열고 나온 가르딘 경도. 침실로 들이닥친 근위병들도. 엉망이 된 침실 광경을 감상하고서는 똑같은 표정이 되었다.

“허?”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서 달려왔을 터다.

황태자에 대한 테러?

혹은 암살 시도?

대강 그런 위급한 상황을 상상하며 뛰어왔을 터다.

한데 이쪽은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고, 침실은 엉망진창 물난리고, 유리조각은 사방에 흩어져 있고.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겠지.

‘뭐라고 둘러대지?’

순간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기분이었다.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기도 좀 그랬다.

‘손을 뻗었더니 써클에 저장되어 있던 물폭탄이 증폭되고 터져서 이렇게 됐다. 오밤중에 근무하느라 고생 많을 텐데 놀래켜서 이거 참 미안하다, 허허.’

……라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할 테니까. 아니,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을 테니까.

잠깐 고민하던 그는 나름의 핑계를 댔다.

“어, 그게. 잠깐 화가 나서.”

“……예?”

근위병 조장이 긴장된 얼굴로 반응했다.

그를 향해 멋쩍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홧김에 그냥. 물이 담긴 병을 휘두르다가 탁자에 내리쳤어.”

“전하?”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미안.”

“…….”

근위병들도, 가르딘 경도.

다들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금방 후회가 들었다.

‘안 통하나. 쯧. 내가 생각해도 너무 조잡한 핑계이긴 한데.’

잘 있던 황태자가 오밤중에 갑자기 히스테리를 부리듯 유리병을 휘두르고 깨뜨려서 침실이 이렇듯 엉망진창 난리가 난 거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소 엉성하고 어설픈 변명이었다.

‘쯧. 안 믿어주겠네. 바보도 아니고 이걸 누가 믿어. 그럼 이젠 뭐라고 둘러대야 하…….’

그때였다.

근위병 조장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전하.”

“……어?”

“전하께선 다치신 곳이 없으십니까?”

“어, 유리조각에 발을 좀 찔린 거 말고는 그닥?”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쪽엔 유리조각이 많으니 이쪽으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어, 음, 그래.”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근위대 조장이 이쪽의 말을 너무나 쉽게 믿어주어서였다.

‘어째서? 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쪽이 황태자고 황족이라서?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나?

하지만 의문을 풀 겨를은 없었다.

근위병 조장이 군화로 유리조각을 바즈락바즈락 밟고 걸어와 이쪽을 업었다. 그리고 안전지대(?)로 옮겨주었다.

“여긴 엉망이 되었으니 제2 침실로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가르딘 경? 이동하기 전에 전하의 발을 우선 살펴봐 주시지요.”

“아, 예.”

그 뒤로 다들 분주해졌다.

근위병들은 침실에 남은 위험요소가 없는지를 살폈다. 가르딘 경은 이쪽의 발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고 약을 발라주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동안 라키엘은 떠오르는 의구심을 삼켜야 했다.

‘쯧. 암만 봐도 내가 댄 핑계, 진짜로 어설펐는데.’

그런데도 아무런 의심 없이 다들 믿어주는 눈치다. 이런 게 황족의 편리함이란 걸까.

‘뭐, 운이 좋았던 셈 치자.’

근위병 조장의 안내에 따라 제2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낯선 침대에 누워 눈만 말똥말똥.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한참을 뒤척였다.

‘그거, 뭐였지.’

마나와 융합된 물폭탄을 터뜨리던 순간의 감각. 그 느낌이 여전히 손바닥에 선명했다.

아니, 손바닥뿐만이 아니었다.

심장의 써클에서부터 주위의 혈맥, 어깨와 팔뚝을 내달리듯 질주하던 마나의 격류, 증폭, 폭발, 분출까지.

속이 뻥 뚫리는 듯 호쾌한 감각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느껴보고 싶은 감각이기도 했다.

“…….”

일단 자자.

이러다가 또 사고 칠라.

억지로 눈을 감았다.

아직 이쪽에겐 훨씬 중한 일이 있다고. 지금은 일단 빌어먹을 이 몸뚱이의 체질을 개선하는 게 훨씬 급하다고. 애써 되뇌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계획했다.

성능 테스트까지 확실하게 마친 써클 슬롯. 이걸 자신의 치료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생각하고, 궁리하다가, 마침내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 밝았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가르딘 경을 불렀다.

“탕약 달일 거야. 알지? 지난번처럼 주방 비워줘.”

역시 황족의 지위는 편리했다.

명령만 내리니 척척척.

탕약을 달일 세팅이 착착 완료되었다. 그렇게 비워진 주방에서 지난번처럼 마황부자세신탕을 달였다. 한데 이번엔 지난번보다 그 양이 조금 많았다.

조금 많이.

딱 10리터를 달였다.

그렇게 달여서 커다란 물병에 나눠 담은 마황부자세신탕이 식기를 기다리길 한참. 가르딘 경에게 말했다.

“가르딘 경? 잠깐 나가 있어줄래?”

“예? 전하?”

“잠깐 주방 밖으로 나가 있어달라고.”

“저기, 하오나 전하?”

이쪽이 마황부자세신탕을 달이던 내내 옆에서 불안감과 초조함을 내보이며 꼼질거리던 가르딘 경이었다.

마치 물가에 어린애 내놓은 부모 같았다. 혹은 미용실에서 머리 하던 도중에 집에 가스불 켜놨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사람 같았다.

“전하.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긴 송구하오나…….”

“송구하면 하지 마.”

“하오나…….”

“잠깐이면 돼. 나 혼자 할 일 있어.”

이제부터 10리터나 되는 마황부자세신탕을 원샷할 거다. 한데 그걸 가르딘 경이 봤다간 놀라 까무러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전하. 저는 심히 염려가 됩니다.”

“흐음, 혹시 이거?”

마황부자세신탕이 담긴 병을 가리켰다.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도 그걸 달여서 드셨다가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그땐 사레들렸던 거고.”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보다 너무 많이 달이셔서 좀…….”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야?”

“예, 전하.”

“괜찮아. 시험해볼 게 있어서 많이 달인 거야. 조금만 마시고 나머지는 버릴 거거든.”

주방 한쪽에 놓인 수챗구멍을 가리켰다. 그제야 가르딘 경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설마 내가 이 많은 걸 다 마실까.”

“역시.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상식적으로 봐도 사람이 저걸 다 마시는 건…….”

“그렇지. 말이 안 되는 거지.”

“예. 머리가 텅텅 빈 멍청이나 그런 무식한 짓을 하겠지요.”

“…….”

“전하?”

“나가!”

기겁한 가르딘 경을 반강제로 쫓아냈다.

주방 문을 닫아걸고 병을 들었다.

마황부자세신탕이 찰랑거렸다.

그대로 쭈욱 들이켰다.

꿀꺽꿀꺽, 1리터, 2리터, 5리터, 마침내 10리터 전부.

“……크어어. 꺼윽.”

마황부자세신탕이 써클 슬롯을 가득 채웠다.

그때부터였다.

아주 조금씩.

온종일 찔끔찔끔.

시시때때로 써클 슬롯을 개방했다. 정확한 양을 맞추어 몸속에 마황부자세신탕을 투약했다. 마치 24시간 내내 맞는 특제 링거 같았다.

그 효과는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딩동!

[심장이 환호합니다.]

[허파가 춤을 춥니다.]

[대장이 괄약근으로 줄넘기를 합니다.]

[심장이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허파가 2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대장이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500]

활성화된 오장육부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HP를 후원해주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만족하지 않았다.

‘기대수명이 늘어나야 해.’

그래야 확실한 효과를 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써클 슬롯을 돌렸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도록.

결코 지나치지 않도록.

마황부자세신탕을 투약했다.

그러는 동안 오장육부가 때아닌 수난(?)을 겪어야 했다.

[심장이 투덜거립니다.]

[허파가 투덜거립니다.]

[대장이 투덜거립니다.]

[오장육부가 마황부자세신탕에 질려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런 메시지가 가끔.

나중엔 대놓고 투덜거리는 녀석들의 대화가 메시지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심장 : 막내야 오늘 반찬은 뭐냐.]

[대장 : 마황부자세신탕이지 말입니다, 형님.]

[심장 : 막내야 그럼 내일 아침 반찬은 뭐냐.]

[대장 : 마황부자세신탕이지 말입니다, 형님.]

[심장 : …….]

[대장 : 내일 저녁도 마황부자세신탕인 것 같지 말입니다.]

[심장 : 그래서 좋냐?]

[대장 : 헤헷.]

[심장 : ……대가리 박어.]

하지만 라키엘은 오장육부의 반찬 투정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꼼꼼하고 야물딱지게 써클 슬롯을 돌렸다. 그렇게 닷새, 열흘, 보름이 지나고 마침내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이 (+) 50일 증가하였습니다.]

[예상 기대수명 : 133일]

“……됐다!”

마침 저녁 식사 후의 디저트를 먹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예고 없이 떠오른 반가운 메시지를 접했다.

라키엘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만세를 불렀다. 한데 그 외침이 너무 갑작스러운 탓이었을까.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시녀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앗?”

시녀의 다급한 소리.

화들짝 놀란 시녀가 식탁에 올리려던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챙그랑!

잔이 깨졌다.

꿀물이 쏟아졌다.

“아…….”

라키엘은 굳어 버렸다. 이쪽이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시녀가 놀라 실수를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녀에게 괜찮으냐 물어보려 했다.

한데 물어보기도 전에 시녀가 먼저 반응했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시녀가 사색이 되어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한데 그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뭐야. 그냥 잔 하나 깨진 건데. 그게 저렇게나 죽을죄를 지은 듯이 사죄할 일인 건가?’

혹시 황족에 대한 존중과 두려움 때문인 걸까.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시녀가 내비치는 두려움이 지나쳐 보였다.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시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한데 어쩐 일인지, 이쪽의 위로에 시녀가 더욱 사색이 되어 창백해졌다. 아예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하오니 지난번 같은 회초리질만은 제발…….”

마치 최악의 갑질러에게 간청하듯.

거의 울먹이며 꺼내는 애원.

그걸 들은 라키엘은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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