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0화 (10/468)

10화. 프로 갑질러의 다짐 (2)

‘회초리질?’

시녀가 꺼낸 뜻밖의 애원.

라키엘은 뜨악하고 말았다.

‘뭐야. 회초리질이라니. 고작 잔 하나 떨어뜨려서 깨진 것뿐인데. 꿀물 조금 쏟은 것뿐인데.’

그 정도 잘못에 회초리질을 걱정하며 납작 엎드린 시녀라니.

그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 몸의 주인인 황태자 라키엘. 그가 시녀들을 회초리질한 적이 있었단 말인 걸까. 시녀의 겁에 질린 태도나 반응을 보면 정말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는 확인차 물었다.

“혹시 내가 너를 회초리질한 적이 있나?”

제발 없다고 해줘.

그런 쓰레기는 아니라고 해줘.

속으로 맹렬히 염원했다.

그 염원이 통한 것일까.

“어, 없사옵니다, 전하.”

시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전하께서 직접 회초리를 든 적은 없사옵니다.”

“……음?”

라키엘이 ‘직접’ 회초리를 든 적은 없다고?

잠깐만, 설마.

“그럼 혹시…… 다른 이를 시켜서?”

“…….”

“정말로?”

“어, 어디까지나 소녀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쪽에게 추궁받는다고 느낀 걸까.

시녀가 더욱 사색이 되었다.

라키엘의 표정도 더욱 굳었다.

“정말이었구나.”

설마 했더니 진짜였다. 다른 이들을 시켜서 시녀를 회초리질한 적이 있단다.

황태자 라키엘.

그저 병약한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넌 무슨 짓을 했던 거냐.

오만가지 의문이 다 들었다.

그는 다시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하나 더 묻자. 당시에 네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회초리질을 당했던 거지?”

“그, 그것이…….”

“괜찮아. 말해 봐.”

“물방울을 튀겨서…….”

“뭐?”

“전하의 소매에…… 물방울을 튀겨서…… 소매가 젖어서…….”

“잠깐만.”

“…….”

“설마, 소매에 물방울 조금 튀었다고 그랬던 거야?”

“소, 송구하옵니다.”

“허, 참.”

아무래도 시녀의 태도를 보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도 차지 않았다.

‘뭐냐. 황태자 라키엘. 그런 놈이었어?’

문득, 소설 ‘마검황’이 떠올랐다.

그 소설 속에서 황태자 라키엘은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조연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분량도 적었다.

평소에 어떻게 생활했는지. 주변인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런 면들이 세세하게 묘사된 적이 없었다. 그저 허약해서 각종 지병에 시달리며 골골대다가 요절했다, 정도로 요약되는 캐릭터였으니까.

그래서였다.

그저 병약가련.

딱 그 정도의 캐릭터를 상상하고, 예상했었다. 한데 그 껍데기를 한 꺼풀 들춰서 디테일한 면모를 살짝 엿보자니?

‘이거, 생각보다 쓰레기 같은 놈이었던 건가.’

저렇듯 사소한 실수에도 벌벌 떠는 시녀. 그 모습을 보자니 황태자 라키엘 이놈이 평소에 어땠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씁쓸함을 느끼며 혀를 찼다.

“쯧. 됐으니까 그만 빌고 일어나. 회초리질 안 할 거니까.”

“네?”

“못 들었어? 일어나라고.”

시녀가 빛의 속도로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겁을 먹은 건지, 쭈뼛쭈뼛 이쪽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깨진 잔만 치우고 가.”

“아, 알겠습니다, 전하.”

시녀가 허둥지둥. 의외로(?) 쉽게 용서받은 듯한 상황에 살짝 당황하며 움직였다. 그걸 지켜보던 라키엘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성급하게 치우다가 손 다친다.”

움찔!

깨진 유리를 급하게 집으려던 시녀의 손이 움찔했다.

“빗자루 쓰면 되잖아. 급하다고 손으로 치우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송구하옵니다, 전하. 하마터면 누추한 피로 귀한 바닥을 더럽힐 뻔했습니다.”

“아니, 내 말뜻은 그게 아니고…….”

“피, 피가 나도 절대로 바닥에 흘리진 않겠습니다, 전하.”

“그게 아니라니깐…….”

“하오니 회초리질만은 제발…….”

“그 뜻이…… 아닌데…….”

깊어가는 오해 속에 다급한 빗자루질만 바삐 이어졌다.

그렇게 깨진 잔과 쏟아진 꿀물을 치운 시녀가 허둥지둥 바람처럼 물러났다. 아니, 도주했다. 꿀물을 다시 가져올 필요 없다는 이쪽의 말에 울먹이며 감사를 표하기까지 하면서였다.

“…….”

저 도망치는 모습.

꼭 미치광이 성격파탄자한테 감금되어 있다가 탈출하는 사람 같은 표정인데.

‘황태자 라키엘, 이놈, 대체 뭐지.’

상황이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다행히도 마침 이쪽의 질문을 받아줄 사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가르딘 경.”

“예, 전하. 부르셨습니다.”

“어. 불렀지. 그런데 말이야.”

“예, 전하.”

“경은 왜 그런 묘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어?”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부터 이쪽을 보는 가르딘 경의 눈빛이 참으로 오묘했다. 마치 뜻밖의 훈훈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의 눈빛 같달까.

그게 어쩐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질문 하나 더. 방금 저 시녀, 왜 저래?”

“으음, 그야 전하의 너그러움에 감격하며 물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쯧.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말고.”

“예?”

“아까 저 시녀도 그랬잖아. 내가 다른 이를 시켜서 회초리질을 한 적이 있다고.”

“예, 그랬습니다.”

“사실은 요즘 내가 많이 아팠던 바람에 기억이 좀 뒤죽박죽이거든. 그래서 묻는 거야. 엄청나게 큰 잘못도 아니고, 고작 소매에 물방울 조금 튀겼다는 이유로 그랬다며.”

“……예, 그랬습니다.”

“그래서 재차 묻는 건데, 혹시 다른 시녀들이나 시종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어?”

“전하.”

“내 물음에 대답부터.”

“……예, 겪었습니다.”

“서로 회초리질을 하게 했다고? 내가?”

“예, 전하……. 하지만, 저희는 전하를 믿습니다.”

“믿는다니, 뭘.”

“어린 시절의 전하는 너그럽고 인자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셨으니까 말입니다.”

“크면서는 안 그랬다는 말로 들리는데?”

“아닙니다. 그것은 전하의 잘못이 아니십니다.”

“그럼?”

“고약한 병마가 전하를 괴롭히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탓입니다.”

“쯧. 그건 핑계잖아.”

“아닙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이쪽의 말을 극구 부인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거, 말만 그럴싸하게 포장한 면피용 멘트 같다.

라키엘은 정색했다.

“솔직히 내가 요즘 몸이 안 좋다 보니까 기억력이 확 떨어진 거 같아서. 지나간 일들이 잘 떠오르지가 않거든. 그래서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

“예, 전하.”

“난 어떤 사람이었지? 경이나 이곳의 시녀, 시종들에게 말이야.”

“전하께서는 물론…….”

“객관적으로 말해. 거짓말하지 마. 다른 사람한테도 확인해볼 거야.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그땐 확, 이상한 약 보글보글 끓여서 경이 보는 앞에서 벌컥벌컥 마셔 버린다?”

“예?”

“약에 뭘 넣을지는 내 기분에 따라서 달라질 거고.”

“전하?”

“자, 그럼 말해 봐. 난 어떤 사람이었지?”

“그, 그것은…….

셀프 인질 협박(?)의 효과는 대단했다.

가르딘 경의 입이 술술 열렸다.

반 시간가량의 이야기가 끝났다.

수많은 증언과 목격담.

객관적인 평가와 회고.

그걸 들으며 라키엘은 냉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그놈, 초 예민보스 갑질러였네.’

근본이 나쁜 놈까지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엔 나름 썩 괜찮았단다.

한데 병마에 시달리며 점점 예민해졌다나.

‘처음엔 조금씩 예민해지나 싶었는데, 나중엔 수시로 선을 넘은 것 같고.’

가르딘 경의 증언.

그걸 통해 엿본 황태자 라키엘은 히스테리의 화신이었다. 아주 조금만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벌컥 화를 냈단다.

소리를 버럭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며.

심지어 시녀와 시종들을 회초리질하기도 했단다. 물론 본인의 기력이 달리니까 다른 시종이나 시녀를 시켜서.

덕분에 이곳 별궁의 시종 시녀들은 근처에 황태자만 지나가면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단다. 행여나 신경 거스르게 해서 날벼락을 맞을까 봐.

그만큼 황태자 라키엘의 히스테리와 갑질은 엄청났다.

‘숨 크게 쉬는 게 거슬린다고 회초리질하고. 자는데 재채기 소리 들렸다고 이틀간 안 재우고. 식사하는데 소스 한 종류가 빠졌다고 요리사와 시종 시녀 모두를 나흘이나 굶기고. 옷자락 움직이는 소리 듣기 싫다고 뺨까지 때리고. 어휴. 사람 새끼냐, 그게.’

갑질도 그런 갑질이 없었다.

당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따질 수도, 대들 수도 없는 황족 레벨의 갑질이기에 더욱 그랬다.

‘최악이었네.’

이제야 아까 시녀가 보였던 반응이 이해가 됐다. 얼마 전, 써클 슬롯을 시험하다가 물폭탄을 터뜨린 밤, 이쪽의 조악한 변명을 쉽게 믿어주던 근위병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 난 화가 나서 병을 깨뜨렸다고 핑계를 댔지. 그런데 황태자 라키엘은 실제로도 평소부터 그런 짓을 벌였던 거야. 덕분에 근위병들이 내 핑계를 자연스럽게 믿었던 거고.’

하필이면 이쪽이 댔던 핑계가 평소 황태자의 행실이었다니. 우연치고도 묘한 우연에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가르딘 경.”

“예, 전하.”

“경의 말은 잘 들었어.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맙고. 그런데 말이야. 아직 궁금한 부분이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전하.”

“어. 다른 시종이나 시녀들이 날 두려워하는 이유는 알겠거든. 그런데 경은 왜 그래?”

“……예?”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 내가 그렇게 심하게 굴었다며. 한데 지금까지 경은 내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날 두려워한 적이 딱히 없었던 듯해서.”

“저야 전하를 믿으니까요.”

“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가르딘 경의 대답.

듣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믿는다니? 내 뭘?”

“그야, 으음, 원래는 착하셨던 분이셔서…….”

“그래서?”

“제가 병을 낫게 해드리면, 다시 예전의 품성으로 돌아가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최근엔 그 믿음에 보답을 받기 시작했고 말입니다.”

“보답이라니?”

“최근의 전하 말입니다.”

“…….”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바뀌셨습니다. 바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날, 일기를 쓰다가 피를 토하며 혼절하셨던 날 이후부터 말입니다.”

“아, 그날?”

그날이라면 이쪽이 라키엘의 몸에 들어온 날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가르딘 경은 조금은 감격한 투로 말했다.

“그날부터 전하께서 바뀌셨습니다. 말투와 행동이 조금…… 거칠어지시고 예법을 벗어나게 되셨지만, 그래도 저나 시종 시녀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으셨거든요. 한 번도.”

“흐음. 그래서 좋았어?”

“뭉클했습니다.”

“감동적이었어?”

“지금도 하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아니라 나한테 감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전하.”

“그렇지. 그거지.”

“…….”

“아무튼, 내가 바뀌어서 좋아?”

“물론입니다, 전하.”

“바늘로 막 자해도 하고. 그치?”

“어, 그건…….”

“막 독초 뿌리도 펄펄 끓여서 원샷하고. 그치?”

“…….”

“참 좋겠다, 우리 가르딘 경은.”

“…….”

가르딘 경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한데 가만히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경의 입꼬리엔 훈훈한 미소가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그건 나도 비슷하려나.’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말로는 이렇게 놀리고 있지만, 고마우니까. 이렇듯 충실한 사람이 내보인 진심 앞에서 고맙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라키엘은 그런 본심을 애써 갈무리하며 짐짓 짓궂게 웃었다.

“어휴. 그나저나 식사 중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 빵이나 마저 먹자. 그런데 가르딘 경은 저녁 먹었어?”

“아직 안 먹었습니다, 전하.”

“같이 먹을래?”

“……예?”

“여기, 빵이 좀 남을 거 같은데.”

“전하, 저는…….”

“받어 그냥.”

“…….”

반으로 뚝 잘라서 건넨 빵조각. 그걸 들고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가르딘 경.

그 모습에 다시금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남몰래 다짐했다.

충성심 하나로 이쪽의 곁에 남았다가 처형되는 최후를 맞이한 소설 속 가르딘 경. 여기선 그런 불운을 겪지 않게 해주겠다고.

이쪽이 죽는 일도, 그쪽이 책임을 덮어쓰고 죽는 일도, 결코 없게 하겠다고. 살아남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황제의 부름이 별궁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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