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자격을 증명하라 (1)
“전하,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호출하셨습니다.”
뜻밖의 기별이 전해져 온 것은 아침 무렵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셀프 진맥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데 가르딘 경이 소식을 전해 온 것이었다.
“음? 어째서?”
“저기, 그게…….”
가르딘 경이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의 기행이 폐하의 귀에 닿은 듯합니다.”
“내 기행?”
기행이라면, 설마.
“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경이 내 행동을 알린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가르딘 경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별궁에는 눈과 귀가 많으니까요.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하의 기행…… 아니, 몸에 스스로 침을 꽂은 행동이나 약재를 스스로 달여서 드신 행동이 황궁에 전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쯧.”
라키엘은 혀를 찼다.
기행이라니.
‘그런데…… 그것 때문에만 날 부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느낌이 그랬다.
뭔가 있다.
단순히 얼굴이나 보자고. 혹은 요즘 이상한 짓을 벌이는 거냐며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황궁까지 오라는 건 아닐 것이다.
‘가보면 알겠지.’
문득 소설 마검황의 초반 전개와 설정이 떠올랐다. 초반에 등장했던 황제의 모습도 되새겨보았다.
‘황제는 사자처럼 엄격한 사람이었지. 자신에게도, 주변에게도.’
물론 자신의 아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아들들을 시험했다. 특히 장남이자 후계자인 황태자를 가장 많이 시험했다.
황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지.
과연 그 지위를 누릴 수 있을지.
수시로 심사하고, 판단하고, 평가했다. 말 그대로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사자 같은 자였다.
한데 원작 소설 속의 황태자 라키엘은?
‘그 기대를 완벽히 저버렸지.’
나약한 육체와 정신을 지닌 황태자였다. 너무나 나약해서 그 약한 면을 가리고자, 주위에 행패마저 부렸던 인물이었다.
‘그 나약함에 황제가 실망했다던 언급이 있었어. 그리고 황태자가 죽기 두 달쯤 전이었나. 황제가 마지막으로 황태자를 호출했지. 그게 아마 이때 무렵이었을 텐데.’
소설 속의 황태자 라키엘은 그 마지막 호출에 응하지 못했다. 이미 병세가 너무나 악화되어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억지로 업히다시피 해서 마차를 탔지만, 결국 황궁까지 반도 못 가서 피를 토하며 별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결과로 라키엘은…… 실질적인 황태자의 권한을 모두 박탈당했지.’
그날부터였다.
황제가 라키엘을 포기했다. 절벽을 기어 올라온 다른 아들에게 황태자위를 넘겨주었다.
냉정한 심사와, 판단과, 평가의 결과였다.
한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 꽤 많이.’
소설에서처럼 침대 신세가 아니다. 황궁에 다녀오는 일 정도는 거뜬하다.
라키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야지. 마차 준비해.”
“알겠습니다, 전하.”
그 뒤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롤x로이스급 황족 마차를 타고 다그닥다그닥. 호위들과 함께 별궁을 출발했다. 한 시간가량의 여정 끝에 황궁에 도착했다. 광대한 정원과 수많은 층계, 복도와 모퉁이를 지났다. 마침내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를 알현하게 되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나이다.”
나름 소설 속 대사를 떠올리며 자연스러운 예를 올렸다.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까.
언제나 유약하고 나약했던 맏아들, 라키엘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서렸다.
‘……아스라한 심법?’
황제, 아스테리온은 저도 모르게 되뇌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스라한 심법.
오직 황가의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비전.
황태자가 갓난아기였던 시절, 자신이 직접 황태자의 작은 심장에 정성껏 심어주었던 심법이엇다. 하지만 타고난 허약체질 때문에 황태자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던 심법이었다.
‘한데 어찌하여 방금은 심법의 공명이 느껴진 것인지.’
아스라한 심법을 지닌 이는 다른 이의 심법이 지닌 공명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황제는 더블 써클을 보유한 실력자였다. 방금, 그가 맏아들에게서 느낀 공명은 분명 아스라한 심법의 것이었다.
‘설마.’
황태자 라키엘을 굽어보는 황제의 눈길이 깊어졌다. 맏아들의 창백한 안색을 면밀히 살폈다. 그 내면의 공명을 다시금 파악하려 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허약한 맏아들에게서 어떠한 긍정적인 징조도 느낄 수 없었다.
‘……착각이었던가.’
황제의 눈가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잠깐 느껴졌다 여겼던 공명이 더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가 본 황태자의 신색은 여전히 초라했다.
비쩍 마른 몸은 잘못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걸음걸이며 몸짓 어디에서도 튼튼한 정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입술의 혈색 또한 초라했다.
즉, 황태자의 모습은 전형적인 병자의 그것이었다. 그것도, 어찌 손 쓸 수도 없을 중환자의 것이었다.
‘쯧쯧.’
아무래도 자신이 잠시 착각을 하였던 것인가 보다. 끝내 놓지 못하고 있던 일말의 기대가 혼동을 불러왔던 것이었나 보다.
황제는 안타까움과 실망감에 내심 혀를 찼다. 저토록 나약하게 병든 육신으로 아스라한 심법을 일깨웠을 리 없다. 아스라한 심법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찌하여 하필이면.’
황제는 탄식했다.
하필이면 맏아들이 저런 지경이다. 기껏 제국을 이끌어갈 후계자로 삼았건만. 제국은커녕 제 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수많은 치유 마법도 소용이 없었다. 성직자의 축복과 가호도 마찬가지였다. 곁에 붙여준 무수한 명의들도 손을 털고 떠났다.
그 의미는 자명했다.
손 쓸 방법이 없다.
답이 없다.
아마도 황태자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명의들조차 침몰선에서 탈출하는 쥐떼처럼 떠난 것이겠지.
‘너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인가.’
처음부터 둘째를 후계로 삼았어야 했던가.
황태자를 굽어보는 황제의 눈길이 딱딱해졌다. 그는 아버지가 아닌 황제로서, 아들이 아닌 황태자를 향해 물었다.
“그래, 별궁에서는 지낼 만하였느냐.”
“예, 폐하.”
돌아오는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황제의 눈길이 더욱 굳었다.
“짐이 듣기로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태자. 그 정수리를 향해 나직하지만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들어 별궁에서 기이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지?”
“…….”
“왜 대답이 없느냐.”
“그것은…….”
“자해를 한다고 들었다.”
“…….”
역시 뜨끔한 걸까.
입을 다물어 버린 황태자를 향한 황제의 시선이 딱딱하다 못해 위압적으로 변했다.
“바늘을 제 몸에 꽂아두는 짓을 벌였다지. 독초를 달여 마시기까지 하였다지. 실로 구차하고 또 구차하다. 네가 그러고도 황가의 후예라 할 수 있겠는가.”
“…….”
“평소 아랫것들을 혹독하게 대한다고는 들었다. 힘들어서였겠지. 나약해서였겠지. 한데 이제는 그 나약함의 화살로 자신을 겨누기까지 하는가. 어찌하여 고작, 육신의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까지 무너져 그런 작태를 보였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한 번도 든든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자신의 후계자가. 그런 후계자의 나약함이 차차 치유될 것이라 여긴 자신의 어리석었던 믿음도. 지금 이 순간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어리석음마저.
갈 곳 없는 원망과 후회가 되었다.
시리디시린 목소리에 배어들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너는 자랑스러운 황가의 적통이며, 또한 황가의 일원이다. 하니 그 어떠한 순간에라도, 설령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에라도.”
속이 곯고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적어도 겉으로는.
“위엄과 품격을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죽는 순간까지도.
“적어도 추태는 부리지 말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
황태자 라키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허. 저 아저씨 말하는 거 보소.’
듣고 있자니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은 엄청 위엄있게 하는데.
황가의 품격을 거론하는데.
그 말을 살짝만 곱씹어 보니까?
‘그냥 집안 이미지에 먹칠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다가 죽으라는 거잖아.’
과연 저게 아들에게 할 소리일까. 만약 자신이 아닌, 원래의 라키엘이 저 말을 들었다면?
‘엄청나게 상처받았겠네.’
다른 이도 아닌 아버지의 입으로 저런 말을 듣는다면 그랬을 터다. 하지만 이한은 아니었다.
‘대강 따져 봐도 내 아버지 아니니까.’
황제는 라키엘의 아버지일지언정 자신에겐 아니었다. 아버지는커녕, 오늘 처음 본 초면인 아저씨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황제의 가혹한 발언이 쏟아졌지만, 그의 멘탈엔 스크래치도 나지 않았다.
“또한, 일신의 건강이 문제가 되어 황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현명한 판단?’
라키엘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쌔한데. 지금까지 나 갈군 건 그냥 인사치레고, 이제부터 꺼낼 이야기를 위해서 날 부른 거였구만.’
어쩐지 감이 왔다.
결국, 그 감이 정확히 맞았다.
“둘러 말하지 않겠다. 황위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것을 보다 적합한 다른 이에게 양보하는 것 또한 미덕이 아니겠느냐.”
“……예?”
“네 아우,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넘기라는 뜻이다.”
황제의 일방적인 말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거라. 그것이 너에게도, 모두에게도 도움이 되는 결정일 터. 또한, 이것은 짐의 배려이기도 하다.”
“…….”
배려라.
이걸 거절하면, 황명으로 황태자위를 몰수하고 2황자에게 주겠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이쪽을 엄하게 바라보던 황제의 눈빛이 딱 라면스프 한 톨만큼 너그러워졌다.
“어떠한가?”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 아니, 압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은 비결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의사로 살았던 경험 덕분이었다.
‘환자들 중에도 뜬금포로 훅 치고 들어오는 말씀을 던지는 어르신들이 종종 있었거든.’
이 세상엔 별별 사람이 많았다.
애인은 있느냐는 둥.
그러다가 언제 결혼할 거냐는 둥.
사소한 오지랖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특히, 한의원을 찾아오는 어르신들 중에는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분들이 은근히 계셨다.
뜬금없이 이쪽을 아들로 대하는 어르신. 옛날에 헤어진 애인으로 보는 어르신. 심지어 아흔 먹은 어르신께 아빠라는 소리까지 들어봤다. 침 놓다가 팔자에도 없던 성인용 기저귀를 갈아드린 적도 있었다.
그런 상황들을 하도 겪다 보니 멘탈 단련은 자동이었다. 아마 별별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대한민국 자영업자 출신(?)이라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같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뭐. 조금 놀랍기는 한데, 그렇다고 판단력까지 깨질 정도는 아니고.’
그는 황제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엄한 눈빛의 황제. 그 눈빛 속의 의도가 어쩐지 훤히 보였다. 그것이 그가 당황하지 않은 두 번째 비결이었다.
‘그냥 황태자 라키엘이었다면 당황했겠지. 예상 밖의 상황에 충격을 받아 허우적거렸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그쪽의 의도, 알겠어. 소설을 읽었으니까. 이런 상황, 소설 마검황 속엔 없었으니까. 한데 그래서 더 잘 알겠어.’
소설과 달라진 상황.
황제가 내비친 의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예측되고, 그려지고, 파악되었다.
그 순간, 라키엘은 확신을 담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황제를 움찔하게 만드는 한마디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