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2화 (12/468)

12화. 자격을 증명하라 (2)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하오나, 거절하겠습니다.”

드넓은 대전에 황태자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언제나 병약하고 허약했던 황태자. 그렇기에 제 아비인 황제 앞에서도 단 한 번도 당당하지 못했던 황태자였다.

한데 오늘만은 어쩐 일인지 달랐다.

다른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뭣?”

황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무런 겸양이나 미련조차 보이지 않는 거절이라니. 거절치고도 너무나 직설적이었다.

자신의 아들, 그중에서도 특히 나약했던 황태자에게서 이런 거절을 들을 줄이야. 오늘 황태자를 부르면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아니,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확인차 거듭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폐하께서 내리신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씀이옵니다.”

“…….”

황태자가 내보인 뜻밖의 당당함에 놀란 것도 잠시.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길에 노기가 서렸다.

“거절? 짐의 제안을?”

“예, 그렇습니다.”

사자 같은 황제의 은은한 진노.

그 목소리 속에 깃든 압박감.

라키엘은 그걸 생생하게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의 의사를 무르지 않았다. 아니, 무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지금 황제의 저 제안, 원작에는 없던 거야. 이런 상황, 소설 마검황 속엔 없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쫄 이유는 없잖아. 왜 저러는지 이유가 훤히 보이니까.’

그랬다.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넘기라는 황제의 제안. 그에게는 저 제안의 이유와 의도가 훤히 보였다.

‘간단해. 2황자에게 보다 적법한 명분을 주려는 거지.’

사실 황태자위를 넘기는 일이야 어렵지 않다. 솔직히 이쪽의 동의를 얻을 필요도 없다. 그저 황제의 명령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그런 편한 절차를 놔두고 굳이 내게 양보를 권유하는 건…… 황가의 체면을 살리는 것과 동시에, 이후 2황자에게 더 큰 권한과 명분을 주기 위함인 거겠지.’

이쪽이 양보를 해줘야 한다.

그렇게 ‘좋은’ 그림으로 황태자위를 넘겨줘야 한다.

‘국내외에 일종의 선전 효과를 주겠다는 거지. 보다 능력 있는 아우의 존재를 인정하고서 선의와 미덕으로 흔쾌히 자리를 양보한 장자와, 그런 장자에게서 황태자위를 물려받은 자격 있는 아우…… 라는 그럴듯한 그림 말이야.’

그렇게 일이 진행된다면?

황태자를 갈아치우는 일을 벌이면서도 황가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2황자에게 능력 있는 존재라는 이미지가 붙게 된다. 근본과 정통성 타이틀도 붙일 수 있게 된다.

썩 괜찮은 정치적 광고, 프로파간다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나한테서 강제로 황태자위를 떼어내서 2황자에게 붙여주는 것보다 모양새도 좋게 나올 거고 말이지.’

만약 이쪽의 ‘양보’ 없이 황태자위를 떼어내 버리면? 그렇게 2황자가 황태자가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라키엘에겐 그게 훤히 보였다.

‘이쪽이나 2황자의 이미지가 아까의 양보 시나리오와는 완전히 달라지겠지. 건강 문제로 황태자위를 빼앗긴 장자와, 그것을 강탈한 2황자…… 라는 이미지.’

말 그대로 2황자에게 ‘찬탈자’적 이미지가 붙게 된다. 아마도 그건 황제가 바라는 바가 아닐 터다. 2황자의 정통성이 훼손될 터다.

평생 2황자를 따라다닐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되겠지.

‘황제는 그걸 피하고 싶은 거고.’

라키엘은 눈길을 들었다.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짐짓 진노한 것처럼 보이는 황제.

하지만 그 눈길 속에는 희미한 초조함도 함께 엿보였다.

‘초조하겠지. 내가 여전히 허약해서 미덥지가 못한데, 자격이 없어 보이는데, 애매하게 버티면서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서.’

문득, 소설 마검황 초반의 전개가 떠올랐다.

이 시기의 황태자 라키엘은 지금의 이쪽보다 훨씬 위독한 상태였다. 일기를 쓰다가 심한 각혈을 했던 날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아예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누가 봐도 오래 살지 못할 신세였다.

덕분에 원작에서는 황제가 오늘과 같은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늘내일하는 라키엘에게서 황태자위를 거두어 자연스럽게 2황자에게 넘길 수 있었으니까.

한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나 때문인 거네.’

라키엘은 내심 어깨를 으쓱였다.

이쪽이 죽지 않으려 나름 애쓰고 있어서. 몸에 좋다는 음식과 약을 알차게 챙겨 먹고 있어서. 심지어 꾸준한 셀프 침술도 야물딱지게 펼치고 있어서. 덕분에 원작 속 황태자 라키엘보다 훨씬 쌩쌩한 상태가 되었다.

‘물론 아직 시한부 인생 신세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저질 체력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사람 구실을 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황제가 엿보이는 저 일말의 초조한 기색은. 이쪽을 향해 끝내 내비치는 실망의 기색 또한.

“너는, 정녕 짐의 배려를 모르겠느냐?”

황제의 음성이 묵직해졌다.

진노와 실망.

안타까움과 책망이 뒤섞인 눈빛이 이쪽을 훑어왔다.

“비록 네가 허약하고 병약하다 하나, 짐은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적어도 그 정신만은 끝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최소한의 현명함과 총기만은 잃지 않았으리라고 말이다. 한데 그러했던 내 기대가 틀렸구나.”

서릿발처럼 서늘해지는 목소리.

마치 절벽 아래로 제 자식을 던지듯.

냉엄한 말들이 이어졌다.

“실망이다. 실로 실망이야. 그래, 고작 허울뿐인 황태자위가 그리도 중하더냐? 쥐고 있어보았자 평생 쓸 일도 없을 그 자리가 그렇게나 탐나는 것이었더냐? 하여 너는, 짐과 황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끝내 많은 이들을 번거롭게 만들어야 성이 차겠단 말이더냐?”

“…….”

“어째서 대답이 없는가. 정녕 네가 원하는 바가 그러한 것이더냐?”

이제 황제의 눈길은 아예 얼음장 같았다. 자신의 제안이 나름의 배려라고 여겼는데, 그걸 이렇게 거절당하니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삼켰다.

‘쯧. 거절 한 번 했다고 아주 뼈를 부술 기세로 디스하네.’

그냥, 솔직한 심정으로는 황제의 제안을 넙죽 따르고 싶었다. 사실은 그게 제일 편한 길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황제 같은 거 해서 뭐해. 잘할 자신도 없는데.’

어디까지나 자신은 대한민국에서 한의원을 하다가 망한, 그저 그렇고 평범한 모솔 한의사 이한일 뿐이다. 그저 남는 시간에 소설이나 영화 보며 낄낄거리고, 게임 좀 하는 게 여가의 전부였던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한데 황제라니.

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뭔 황제를 해. 자신 없어. 나라 말아먹기 딱 좋을걸.’

그래서였다.

황제 같은 거, 되기 싫었다.

가능하다면 황태자위도 넙죽 넘기고 싶었다. 그저 황족의 지위와 부유함만 누리며 평생 백수 건물주처럼 살고 싶었다. 당연히 지금 황제가 건네는 제안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저 제안을 받으면?

망한다.

자신도.

황가도.

제국도.

전부.

‘2황자 때문에.’

황태자위를 물려받게 될 2황자가 문제였다.

멍청하거나 악한 놈이라서?

아니었다.

2황자는 나름 명민하고, 성실하고, 유능했다. 그건 소설 마검황에서도 여러 번 대놓고 언급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2황자의 그러한 명민함도, 성실함도, 유능함도, 모두 평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특성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2황자는…… 나름 괜찮은 놈이었어. 썩 훌륭한 군주가 될 재목이었지. 만약 평화의 시대가 계속 이어졌다면 분명 그랬을 거야. 최소한 평타 이상은 친 황제로 역사서에 새겨졌겠지. 하지만…….’

곧 전란의 시대가 온다.

소설을 읽은 그는 알고 있었다.

어떠한 혼란과 참화가 제국을 덮쳐오는지. 그 앞에서 제국이 얼마나 처참한 몰락을 맞이하는지. 2황자 또한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겪게 되는지 또한.

모두 알고 있었다.

‘2황자는 전란의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지. 아니, 최악이었어.’

평화의 시대에 통했던 2황자의 명민함과 유능함, 성실함은 전란의 시대엔 통하지 않았다.

‘대놓고 고구마 군주였으니까.’

빠른 결정이 필요한 때에 망설이고. 결단의 시기와 기회를 놓쳐 버리고. 끝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을 맞이하고야 마는, 우유부단한 고구마 군주. 그것이 소설 속 2황자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라키엘은 그렇게 제국이 무너지게 두기 싫었다.

‘제국과 황가가 무너지면…… 내가 비빌 언덕도 사라지는 거잖아.’

어디까지나 황족으로 떵떵거려야 한다.

그게 최고의 인생 계획이다.

그러자면 제국이 멀쩡해야 한다.

한데 2황자는 전란의 시대에서 제국을 지켜낼 능력이 없다. 그런 녀석에게 황태자위를 넘겨줄 수는 없다. 이쪽이 모처럼 얻은 크고 아름다운 금수저, 아니, 황족 수저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양보해선 안 된다.

라키엘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황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여전히 서릿발 같은 기세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 솔직히 좀, 많이 부담스러웠다.

‘하. 초면부터 진짜.’

라키엘은 황제의 아들이겠지만, 이쪽은 가짜다. 자칫 너무 많은 말을 하는 와중에 이쪽의 정체를 들킬까 살짝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입만 다물고 있다간?

황제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갈 것이다. 결국 2황자에게 황태자위가 넘어갈 것이다.

‘쯥. 어쩔 수가 없구만.’

라키엘은 슬쩍 안면 근육을 움직였다.

긴장감으로 굳었던 볼을 풀고.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랑하게 만들고. 혓바닥에 촵촵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저는 억울합니다.”

“억울?”

“예, 폐하.”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과 표정에 확신을 담아 말했다.

“물론 저는 폐하의 말씀처럼 병약합니다. 하지만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현명함과 총기 또한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폐하의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다.”

“뭣이?”

“사실 제겐 황태자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욕심과 미련을 지닌 것도 아닙니다. 대신 저는 다른 것에 욕심과 미련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것?”

“예. 이 제국의 번영과 황가의 안녕입니다.”

어디까지나 이 몸의 탱자탱자 라이프를 위해서.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기에 황태자위를 넘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허. 나약한 그 몸으로 황태자위를 붙들고 있으면, 이 제국이 번영하고 황가에 안녕이 찾아온단 말이더냐?”

“물론, 그렇습니다.”

“허. 허허.”

황제가 처음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호의를 품은 웃음이 아니었다.

“가당찮구나. 실로 가당찮고 구차해. 그렇게까지 황태자위가 소중하단 말이더냐, 네게는?”

“말씀드렸다시피, 황태자위가 아니라 황가의 번영과 안녕이 소중합니다.”

“끝까지 말은 그럴싸하구나.”

“말만 그럴싸하진 않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이더냐.”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예.”

“말해보라.”

황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제국의 지배자다운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러한 압박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참 쪼들리던 시절, 한의원이 있던 상가 빌딩의 건물주가 저 황제보다 훨씬 무섭고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는 얼굴 가득 철판을 깔았다. 아까 처음, 황제의 제안을 거절하던 때부터 내심 준비하고 있던 제안을 꺼냈다.

“저와 2황자, 둘 중에 누가 더 황태자위의 무게를 잘 버텨낼 수 있을지, 자격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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