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3화 (13/468)

13화. 자격을 증명하라 (3)

“흐음.”

황제의 손이 턱을 짚었다.

모두가 물러나 홀로 남은 권좌. 그곳에 군림하듯 앉은 황제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자신과 2황자…… 둘 중에 누구에게 자격이 있을지 증명할 기회를 달라니. 허허. 허.”

황제는 조금 전에 물러난 자신의 맏아들, 라키엘을 떠올렸다.

맏아들이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을 되짚었다. 떠올리고 되짚을수록 놀라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에게 그런 면모가 있었던가.”

감히 자신을 향해 강단 있게 대들던 모습. 지배자의 권위와 압박에도 굽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꼿꼿하게 서서 이쪽의 눈빛을 받아냈다.

한데 더욱 놀라운 점은, 라키엘이 그 과정에서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권위와 압박에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 그 과정에서 반항적으로 선을 넘기도 하고. 그것이 보통이라면 응당 내보일 반응일 터인데.”

라키엘은 그러지 않았다.

반항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했다.

일말의 흔들림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듯 선을 지키며, 시종일관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이쪽의 압박을 받아냈다. 즉, 이쪽의 기세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기에 역제안까지.”

애초에 녀석이 쉽게 무릎 꿇으리라고. 이쪽의 제안 앞에 금방 허물어지리라고. 그렇게 여기며 꺼낸 제안이었다.

한데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역제안을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자격을 증명할 기회라.”

라키엘 녀석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전혀 들뜨지 않은 차분한 기색으로 이쪽을 보던 눈동자. 마치, 자신의 역제안이 반드시 통하리라 확신하듯.

‘……허락만 해주신다면 보름 후, 2황자와 검술로 대결을 치르겠습니다.’

녀석의 말에 차분함을 잃은 것은 이쪽이었던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검술?’

되묻자마자 라키엘이 대답하였다.

‘예, 폐하. 저는 지금 병약한 몸과 나약한 체력 때문에 자격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황태자위를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고, 무게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말입니다. 하여 저는 그 시선이 틀렸음을, 제게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너의 건강과 건재함을 알리고 싶다는 말인가?’

‘네, 폐하. 하여 2황자와 검을 맞대고 싶습니다.’

‘2황자와 검을 맞대면, 네가 이길 성싶더냐?’

‘길고 짧은 것은 대어봐야 아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가당찮구나. 너는 2황자가 아스라한 심법 싱글 써클의 보유자이며, 유명한 기사에게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지도받았음을 알고 있을 터인데.’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여 검술은커녕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였다는 사실 또한 자각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한데도 2황자와 겨루어 자격을 증명하겠다고?’

‘예, 폐하.’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5분을 버티는 것도 버거울 것 같다만.’

‘역시나 승부는 뚜껑을 열어봐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나 자신이 있느냐?’

‘예.’

‘짐에겐 만용으로 보인다만.’

‘제게 나름의 생각이 있으니 너그러이 보아주소서.’

‘그러한가?’

‘예, 폐하.’

맏아들이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자신은 직감했다.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질 것을 염두에 둔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자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더랬다.

‘좋다. 너의 제안을 수락하마. 대결 장소는 짐이 정하여 통지할 터이니, 너는 소원대로 보름 후, 2황자와 검술을 겨루어 스스로의 건강함을 증명토록 하여라. 단, 승부의 조건은 승리가 아닌 5분 동안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너를 향한 짐의 작은 배려라고 여기거라.’

그것은 정말로 배려였다.

사실 첫째가 2황자를 이길 수 없음은 필연이니까. 아니,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5분을 버텨내는 것도 기적일 테니까.

“실제로 대결이 시작되면 1분…… 아니, 30초라도 버틸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중얼거렸다.

이내 그가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이 대결은 무조건 2황자의 승리다. 그것이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라키엘 또한,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을 것이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어. 내가 너를 잘못 보았구나. 너의 총기는 여태 흐트러지지 않았구나.”

어쩐지 라키엘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맏아들은 이쪽이 제시한 말랑한 ‘양보’가 아닌, 정당한 대결을 통한 ‘계승’을 선택한 것이리라. 아무런 간섭도 없는 대결에서 패배하고,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넘겨줄 생각인 것이리라.

그럼으로써 2황자에게 더욱 큰 상징성과 정통성을 안겨주려는…….

“희생을 택한 것이로구나, 너는.”

황제 아스테리온은 뭉클한 마음에 권좌를 꽉 움켜쥐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복잡한 미소가 내걸려 있었다.

대견했다.

언제나 실망만 안겨주었던 첫째가. 그리하여 어느새 포기하고 있던 맏이가. 이런 훌륭한 선택을 스스로 했다는 사실이 한없이 기쁘고 대견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저토록 영민한 첫째가 황위를 물려받아야 할 터인데. 현실적으로 그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또한, 녀석이 스스로를 희생할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안타까웠다. 황제가 아닌 아비의 입장에선 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꿈에도 몰랐다.

지금 자신이 라키엘의 의도를 제대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라키엘은 지금…….

‘희생은 개뿔. 내가 왜 져줘? 이겨야지, 무조건.’

달그락 달그락 별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라키엘은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대면했던 황제를 떠올렸다. 황제가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을 되짚었다. 떠올리고 되짚을수록 웃음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양반, 내 제안을 제대로 오해한 것 같던데.’

2황자와 검술 대결을 하겠다는 제안을 꺼냈다. 한데 처음엔 가당찮다던 반응을 보이던 황제가, 점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쪽을 향해 보내주던 대견하다는 눈빛은 덤이었다.

설마하니 이쪽의 제안을 통 큰 셀프 희생쯤으로 생각한 걸까.

‘아마도 그런 거겠지.’

차라리 잘됐다.

그런 오해를 받는 게 편하다.

덕분에 황제가 이쪽의 제안을 냉큼 물었으니까.

한데 오해를 한 이는 비단 황제만이 아닌 듯했다. 황제를 만나고 돌아온 날 저녁, 뜻밖의 방문객이 별궁으로 찾아왔다.

2황자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아니, 황태자 전하.”

“…….”

“실은 오늘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어서…… 염려되는 마음에 곧장 찾아온 길입니다.”

“…….”

“전하?”

“쯧.”

라키엘은 혀를 차고 말았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다짜고짜 별궁으로 찾아와 눈앞에 나타난 녀석. 2황자가 분명하다. 소설 마검황의 일러스트로 본 모습과 똑같으니까. 한데 어쩐지 이놈도 이쪽의 제안을 제멋대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염려라니, 뭘.”

라키엘의 대꾸가 자연 퉁명스러워졌다. 2황자가 간곡한 표정으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나치게 무리하시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무리? 내가?”

“예.”

“무리라니, 대체 뭘.”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술 대결이라니요. 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두려운 마음부터 생겨났습니다.”

“뭐가 두려운 건데.”

“이미 지병 때문에 힘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검술 대결을 준비하다가 픽 하고 쓰러질까 봐 걱정이란 뜻인가?”

“전하. 아니, 형님.”

“왜.”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하지만, 어차피…… 결과는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결과?”

“예.”

“네가 이길 거다?”

“정말로 대결이 시작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뭐 그건 그렇겠지.”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황태자위를 놓고 벌이게 될 대결이다. 어설픈 배려나 양보 따윈 씨알 하나 들어갈 틈이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2황자의 말이 이어졌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결과에 이변은 없을 겁니다. 그런 결과를 위해 형님이 건강을 희생하는 건…… 저는 못 참겠습니다.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되십니다. 저를 위해 일부러 그런 희생을 자처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

“사실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 폐하를 뵙고 왔습니다. 폐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형님께서 일부러 무리한 대결을 벌이고, 그 대결을 통해 제게 더 큰 정통성을 안겨주려 하신다고 말입니다.”

“…….”

“저는 그런 희생, 원치 않습니다.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

“형님?”

“어. 왜.”

“혹시 저를 못 미더워하시는 겁니까?”

“못 미더워한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제게 황태자위를 넘긴 후에 말입니다. 혹여나 제가 형님을 해할까, 숙청할까 걱정이 되어 미리 제게 정치적인 빚을 안기시려는 거라면……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맹세코 절대로 형님께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 형님을 견제할 생각도 품지 않겠습니다. 그저 형님이 물려주신 권좌에 더욱 큰 책임감을 품고서 제 의무에만 매진하겠습니다. 그러니 형님, 만약 저를 의심하신다면…….”

“의심한 적 없는데.”

라키엘은 2황자의 말을 잘랐다.

계속 듣고 있자니, 녀석이 한도 끝도 없는 오해의 바다로 셀프 다이빙을 풍덩 하고 있는 듯해서였다.

‘후아. 다들 오해를 단단히 하셨구만 아주.’

황제도, 2황자도.

이쪽의 검술 대결 제안을 아주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난 져줄 생각 전혀 없는데, 쯧.’

워낙 평소 라키엘의 이미지가 병약해서. 아니, 실제로도 오늘내일할 정도로 허약해서. 2황자와의 검술 대결에 기대를 거는 이가 아무도 없을 터다.

그게 정상인 거다.

라키엘은 그저 피식 웃었다.

“네 마음은 알겠다.”

정말로 알겠다.

소설 속 2황자,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는 정말로 좋은 녀석이었다. 나름 성실하고, 명민하고, 책임감 있는 인물이었다. 황태자 라키엘이 죽었을 때도 진심으로 슬퍼한 몇 안 되는 등장인물이었다.

‘대전쟁, 그 전란에 제대로 대응만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제일 중요했던 그 역할을 못 해내서 안습으로 끝나는 캐릭터.

그게 눈앞의 2황자 테오도르였다.

그런 녀석을 보며 말했다.

“됐고.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난 폐하께 제안을 올렸고, 폐하는 그걸 수락하셨어. 한데 이제 와서 그걸 무르겠다고? 천만의 소리.”

“형님…….”

“돌아가라. 쉬고 싶다.”

“정말 그렇게 덧없는 희생을 선택하실 겁니까?”

“됐고. 대결하는 날 보자.”

손을 휘휘 저었다.

근위대가 2황자를 정중히 밖으로 모셨다. 2황자는 침실에서 물러나면서도 이쪽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그 눈빛에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쓴웃음은 침실 구석에서 꿈지럭대고 있던 가르딘 경 때문에 한결 짙어졌다.

“가르딘 경?”

“예, 전하?”

“뭐 하고 있어?”

“아, 보시다시피 짐을 싸두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가르딘 경은 뜬금없이 제 쪽방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라키엘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짐을?”

“예.”

“무슨 짐?”

“이삿짐이요.”

“……이삿짐?”

“예, 전하.”

“설명.”

“아, 그게…… 전하께서 보름 후에 2황자님과 검술 대결을 벌이실 것 아니십니까.”

“그렇지.”

“예, 그래서 검술 대결이 끝나면 황태자위가 2황자님께 넘어갈 테고, 그땐 황태자 전하께서 더는 황태자가 아니시게 될 거니까…….”

“황태자가 머무르게 되어 있는 이 별궁에서 짐 싸고 나가 다른 궁으로 옮기게 될 거다?”

“예, 전하.”

“아하. 그래서 미리 짐 싸두는 거다?”

“옙, 전하.”

가르딘 경이 뿌듯한 표정을 했다.

마치, 나 잘했죠? 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야. 우리 가르딘 경, 알뜰살뜰 준비성 철저하네? 아주 야물딱져, 응?”

“감사합니다, 전하.”

“응, 그래. 그런데 어떡하지.”

“예?”

“나 대결에서 이기면 우리 가르딘 경, 잘라야겠네.”

“……예?”

“자른다고.”

“……예에?”

“골라봐. 직업을 잘라줄까, 모가지를 잘라줄까?”

“하지만 전하?”

“어. 왜.”

“제 뭘 자르시든 괜찮은데 말입니다. 다만-”

“다만?”

“전하의 몸 상태로 검술 대결이라니,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신지…….”

“……쯧.”

오늘은 아주 오해가 풍년이다.

가르딘 경마저 똑같은 소리라니.

라키엘은 울상이 된 가르딘 경을 향해 혀를 찼다.

“무리는 무슨. 이길 거야.”

“예?”

“이길 방법이 있다고.”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2황자와 대결해서 5분 버텨내기.

그 승부에서 모두의 예상을 깰 방법.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비결을 말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