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혼자만의 비책 (1)
“안 알려줄 거야.”
“……예?”
“말 안 해줄 거라고.”
“…….”
가르딘 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잖아도 덜컥 2황자와 대결을 치르게 되어 버린 자신의 황태자님이었다. 덕분에 이쪽만 걱정이 넘쳐나다 못해 저 푸른 초원 위에 넘실대는 알찬 곡식처럼 풍년일 지경이었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2황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아니,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봐도 넘보는 것조차 버거운 엘리트니까. 한데 평생을 병마에 시달린 깡마른 황태자님께서 그런 2황자에게 이길 비결이 있으시다고 했다.
잠깐이나마 희망을 품었다.
그래도 황태자 전하니까.
분명 뭔가 있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작은 희망의 빛이나마 엿보여 주시길 바랐다. 한데 이어지는 황태자님의 말씀은 너무나 잔혹한 것이었다.
“안 가르쳐줄 거야. 내가 그걸 왜 말해줘.”
“전하?”
“어, 왜.”
“괜찮으십니다. 그냥, 이길 자신이 없다고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무도 전하를 탓하지 않을 겁니다. 감히 어찌 탓하겠습니까. 이 별궁, 아니, 더 나아가 황도에서 전하의 사정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름 열심히 황태자님을 위로했다.
그러려고 애썼다.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하고 불리한 대결. 그걸 앞둔 황태자 본인은 얼마나 절망하고 있을까. 그러니 자신이 감싸주고 위로해주어야 한다. 자신은 황태자님의 주치의니까. 자신이 해주어야 한다.
주먹 꾹 쥐어 다짐하며 가르딘 경은 나름 정성껏 열변을 토했다. 한데 돌아오는 황태자님의 반응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뿐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는 무슨. 전혀 안 그런데?”
“예에?”
“괜찮아. 안 져. 이겨. 물론 아직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질 확률이 살짝 더 높긴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비벼볼 가능성은 있어. 작으나마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그럼 됐지?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아뇨, 전혀.”
“쯧.”
“전하께서 2황자님께 이길 비결을 말씀해주실 것처럼 구시더니, 안 그러셔서.”
“안 그러셔서?”
“예, 허세를 부리신 게 아닐까 하고.”
“쯧쯧. 그럼 영업비밀을 덜컥 밝히기라도 할까.”
“예?”
가르딘 경은 움찔했다.
영업비밀?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생각을 해보라고. 누가 봐도 내가 2황자에게 질 것 같지. 내가 남이 되어서 봐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런데 나한텐 이 대결에서 시도해볼 비책이 있어. 특별한 방법이지. 한데 그런 방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리 발언할까?”
“아…….”
“이제 감이 오지?”
“예, 전하.”
“그렇지. 일찍 새어나간 비책은 더 이상 비책이 아니게 되는 거지. 2황자가 그 소식을 듣고 대비하면 나만 망하는 거잖나. 안 그래?”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만-”
“다만?”
“서운합니다.”
“뭐?”
이쪽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는 황태자 전하. 가르딘 경은 풀죽은 모습으로 대꾸했다.
“마치 꼭, 전하께서 지금 비책을 밝히시면 제가 그걸 떠벌리고 다닐 것처럼 말씀을 하시니까 말입니다. 저, 그렇게 입 가벼운 사람 아닙니다.”
“허허. 우리 가르딘 경, 그랬어?”
“예, 전하.”
“그래서 서운했나?”
“솔직히 좀 그렇지 말입니다, 전하.”
“두 번 솔직하면 막 대들겠다?”
“물론이지 말입…… 아, 아닙니다, 전하.”
“쯧. 됐고. 나 잘 거야. 눕기 전에 진찰 좀 해줘.”
“……알겠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은 가까스로 표정을 숨겼다.
걱정으로 굳은 표정이었다.
‘전하께선 허세를 부리고 계시는구나.’
누가 봐도 2황자가 이길 수밖에 없는 대결이다. 한데 이길 비결이 있다고 저렇듯 호언장담을 하신다.
과연 그 비결…… 존재하는 걸까.
‘아마도, 아니.’
가르딘 경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그 어떤 희망적인 색안경을 쓰고 상황을 살펴보아도, 황태자가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비결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답이 없어 보였다.
‘2황자님은 체격도 헌앙하고,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스승 밑에서 검술을 지도받은 분이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미 기사 후보생의 수준을 뛰어넘으셨다던데.’
그 정도면 이미 일반인은 감히 대적하지 못할 수준이다. 한데 황태자 전하는? 일반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체력을 지닌 분이시다.
‘그걸 어떻게 이겨…….’
여전히 태연한 표정의 황태자.
그 모습에 가르딘 경은 내심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켜야 했다. 마음속 가득 먹구름이 드리우는 기분이었다.
♣
이른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 보니 어느새 하늘 가득 자신의 기분 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한데 황태자는 조금 다른 것처럼 보였다.
“어, 가르딘 경, 깼어? 일어났으면 잠시만 좀 나가 있어줘.”
“……예?”
“여기, 지금 손님이 와 있어서.”
아닌 게 아니라 황태자의 침실엔 웬 낯선 자가 방문해 있었다. 가르딘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문객? 이 새벽에? 벌써?’
이제 겨우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진 시간이다. 한데 시장바닥도 아닌 황태자의 별궁을 이 시간에 찾아오는 이가 있다니.
게다가 방문객의 외양과 차림새도 이상했다. 지나치게 평범하고 수수했다. 귀족으론 보이지 않았다. 표현하자면, 마치 온종일 땀 흘리며 일하는…….
“황궁 대장장이야. 내가 불렀거든.”
“예에?”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네. 일단 자릴 좀 비켜줘. 이자에게 의뢰할 것이 있으니까.”
“아, 예, 전하.”
얼결에 떠밀리듯 침실 문밖으로 나왔다.
문을 지키는 근위병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근위병이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답했다.
“황궁 대장장이가 맞습니다.”
“…….”
대체, 전하께서는 이렇게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황궁 대장장이를 부르신 걸까. 가르딘 경은 치솟는 호기심과 의아함을 느꼈다.
굳게 닫힌 침실 문에 귀를 찰싹 붙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릴락 말락.
뭔가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달팽이관에 살랑살랑 닿을락 말락.
뭔가 은근히 핵심적인 말들만 깻잎 한 장 차이로 안 들리는 듯한 기분은 착각인 걸까, 아니면 의도적인 걸까.
한데 그렇게 발을 동동거리길 잠시.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낀 가르딘 경은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이쪽을 쳐다보는 근위병과 시선이 마주쳤다.
“…….”
“……흠! 커흠!”
머쓱함을 참으며 문에서 귀를 뗐다.
그리고 한편으로 다짐했다.
‘궁금해서 안 되겠구나. 조금 있다가 대장장이가 나오면 넌지시 물어봐야겠어.’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대장장이를 부른 것. 그리고 뭔가 제작을 의뢰하는 듯한 지금 상황. 이게 지난밤 황태자 전하가 말씀하신 ‘2황자를 이길 비책’이라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걱정이 들었다.
‘대체 제작 의뢰를 왜 하시는 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시도를 하거나 괜한 일을 벌여서 건강이 더 상하시면 안 되는데.’
제발 그런 것이 아니길 바랐다. 혹여나 무모하거나 위험한 시도를 하시는 거라면 말리겠노라 결심했다.
그러니 확인해보리라. 다짐하며 대장장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한데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별궁의 시종장이었다.
“시종장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그리 바쁘십니까?”
아닌 게 아니라 시종장의 표정이 어쩐지 다급해 보였다. 돌아오는 대답의 내용 또한 그랬다.
“무슨 일이긴. 큰일이오, 가르딘 경. 방금 폐하께서…… 믿기지 않는 내용을 공표하셨소.”
“믿기지 않는 내용이라니요?”
“그게 글쎄, 하아.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께서 치르신다는 대결 말이오. 폐하께서 그 대결을 치를 장소를 공표하셨지 뭐요.”
“장소라니, 그게 어디길래 그러십니까?”
“로이-하비교외다. 믿기시오? 황도 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시민 수천 명이 지켜볼 다리 위에서 대결을 치르게 하실 거라 하더이다.”
“……예에?”
시종장의 대답을 들은 가르딘은 경악하고 말았다.
♣
“로이-하비교 중앙에서 대결을 벌이라는 명은…… 너무 잔혹한 처사이십니다.”
이곳은 황궁 가장 깊은 곳.
2황자, 테오도르는 이른 아침부터 황제를 뵙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 앞에 조아려 주먹을 불끈 말아쥐고 있었다.
분노 때문이었다.
“저와 대결을 원한다는 형님의 제안을 수락하신 것은…… 그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형님이 원한 것이었으니까, 스스로 희생을 자처한 것이었으니까, 큰 뜻을 위해서라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더냐.”
황제의 묵직한 물음.
2황자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로이-하비교에서 대결을 벌이라니……. 그 다리는 황도 시가지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다리입니다.”
“알고 있다.”
“하면, 황도 시민들의 수많은 눈과 귀가 대결이 벌어지는 다리 위로 향하게 될 것임도 알고 계신 것입니까?”
“물론이다.”
황제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느냐는 듯, 성가신 듯 말했다.
“게다가 로이-하비교는 황도에서 가장 큰 다리지. 자리가 넓으니 대결을 벌이기에도 썩 편리하지 않겠느냐.”
“폐하.”
“방금 네가 말한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다. 아니, 짐은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되도록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이번 대결을 목격하고, 가슴에 담길 바란다. 그것이 짐의 뜻이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형님이 희생을 자처했다지만,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형님을 만인의 눈앞에서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으셔야 하겠습니까?”
“그것이 너에게 더욱 굳건한 정통성을 안겨줄 길이기에 그리 결정하였다.”
“그런 방식으로 얻게 될 정통성, 필요 없습니다.”
“너에게는 필요가 없겠지만, 이 제국에는 필요할 것이다.”
“아바마마!”
“나는 아비이기에 앞서 이 제국의 통치자다. 두 아들의 아비이기에 앞서 제국에 몸담은 수백, 수천만의 목숨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한데 너는 지금, 사사롭고 작은 혈육의 정에 이끌려 대의를 그르치려 하고 있구나.”
“하오나…….”
“됐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사사로운 혈육의 정보다 제국의 안정이 더 중요한 법이다. 이번 대결을 통해 너의 마음에는 몇 년간 응어리가 생길 것이나, 대신 더욱 탄탄해진 후계자 구도를 확립함으로써 이 제국은 수십 년간 안정과 번영을 누릴 것이다.”
“…….”
“그 정도면 라키엘, 그 아이가 만인 앞에서 수모를 겪는다 한들 대수로울 것이 있겠느냐?”
“…….”
테오도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굽어보는 아버지, 아니, 황제의 눈길. 그 단단한 눈길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어떠한 호소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애원과 원망에도 황제는 아랑곳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린 결정에 의해 만인 앞에서 무너지는 형님의 모습을 태연히 감상하겠지.
그것이 정치니까.
‘형님.’
문득, 어젯밤 만났던 황태자가 떠올랐다. 인간적으로 딱히 존경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같은 아버지를 두었을 뿐인, 배가 다른 반쪽짜리 형제에 불과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여 제 권세에 맞는 구실을 한 번도 해내지 못한 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런 식으로 형제의 자리를 강탈하게 될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온건한 방법이길 바랐어. 이런 식은 아니었어.’
하다못해 대결을 하더라도 몇몇 귀족들 앞에서라면 괜찮았을 텐데. 그것도 아닌 수천수만 명의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라니. 그 앞에서 무너져야 할 형이라니.
새삼 자신의 형제가 너무나 불쌍해졌다.
‘죄송합니다. 저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결정을 무를 생각이 없으시니, 저는…….’
꽈드득!
황제의 어전에서 물러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님, 대결이 시작되면…… 형님이 괴롭지 않도록, 형님의 명예가 최대한 지켜질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고 깔끔하게 끝내드리겠습니다.’
2황자는 굳게 다짐했다.
물론 그는 꿈에조차 몰랐다. 그가 비장한 다짐을 품는 이 순간, 라키엘은 황제의 결정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다리 위에서? 수천, 수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결하라고?’
그러면…… 오히려 좋아.
흐뭇한 미소가 라키엘의 입가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