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5화 (15/468)

15화. 혼자만의 비책 (2)

‘그 다리 위에서 싸우리고? 오히려 좋아.’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황제가 이렇게 나온다면?

더더욱 이기고 싶어진다.

하지만 가르딘 경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전하.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아무리 폐하의 결정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아…….”

가르딘 경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이쪽의 소매까지 덥석 잡았다.

“전하. 이러실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입궁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입궁? 왜?”

“왜라니요. 폐하를 뵈어야지요.”

“뵈고 나면?”

“오늘 결정, 취소해달라고 청하십시오. 아니, 최소한 재고해달라고는 말씀해보십시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도 생각을 달리 하실 수도 있는 거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 것 같아?”

“……예?”

“아쉽게도 난 아닐 거라고 봐서.”

“그게 무슨 뜻이신지…….”

“황도의 시민 수천수만 명이 구경할 수 있을 로이-하비교 위에서의 대결 말이야. 폐하께서 그걸 그냥 즉흥적으로 결정하신 걸까? 아니. 절대로 아닐 걸.”

“하면…….”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이 있는 결정이란 뜻이야.”

물론 이쪽의 패배하는 모습을 황도 전체에 생중계하겠다는 뜻일 터다. 그렇게 2황자가 후대의 지도자에 보다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주입하겠다는 뜻일 터다.

그 결과로 2황자에겐 더욱 탄탄한 정통성이 생기겠지.

‘사람들은 패배자에게 연민을 보낼지언정, 그 패배자가 자신을 통치하게 되는 건 주저할 테니까.’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거다.

대결의 과정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지는 쪽이 아무리 동정과 연민을 산다 해도 그렇다.

패배자는 결국 패배자일 뿐이다. 패배자가 지도자가 된다는 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터다. 그 반대급부로, 대결에서 승리한 자에게 막강한 정통성이 주어질 것이다.

‘문제는 나 빼고 모두가 2황자를 승리자로 예상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생각하자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황제도, 귀족들도, 시민들도, 2황자도, 심지어 곁에 있는 가르딘 경조차도. 그 어떤 누구도 이쪽의 승리 가능성을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뭐, 부담은 없어서 좋네.’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쪽의 패배를 예상하고 바라는 모두의 기대(?)를 개박살 내겠다는 다짐도 생겨났다.

그날부터였다.

14일 앞으로 예정된 대결의 날. 라키엘은 그날을 위한 준비에 매진했다.

‘세 번. 딱 세 번만 2황자의 공격을 막아내면, 그땐 내가 이긴다.’

나름 준비한 비책.

나름의 계산과 예상.

그걸 토대로 세 번의 방어를 위한 기초 체력을 만들었다. 딱히 거창한 수준의 체력도 아니었다.

정말로 딱 세 번.

세 번의 방어를 하며 풀썩 주저앉지 않을 만큼의 체력이었다.

“후, 후욱.”

처음엔 별궁 복도를 걸었다.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20분을 걸었다. 성공했다. 5분을 쉬고 또 걸었다. 25분, 30분,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만큼 허약한 다리엔 온통 알이 배겼다.

“……그아악.”

다음 날 아침부터 지옥의 근육통이 시작되었다. 허벅다리 앞뒤는 물론이고 오금 안쪽, 엉덩이까지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앉거나 일어날 때마다 절로 신음이 새어나오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침실은 2층이었다.

‘크어오, 미친. 이 저질 체력! 고작 하루 복도 좀 많이 걸었다고 이 모양이야?’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염두에 둔 2황자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법. 그걸 위해서는 하체의 힘이 필수였다.

‘하체가 힘이 없거나 굳어 있으면 끝장이야. 어떤 충격도 흘려내거나 버텨낼 수 없게 되니까.’

그러자면 지금 최대한 하체의 힘을 길러야 했다.

‘최소한 일반인 레벨에는 근접하는 정도로.’

만들 수 있도록, 걷고 또 걸었다.

별궁 1층으로 내려와.

정원으로 나섰다.

아름답고 화사한 정원의 맑은 공기 속에서 노인네처럼 끙끙대며 걸었다.

‘어오, 끄윽, 빌어먹을!’

물론 그 와중에 음식을 잘 챙겨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심각한 건강 상태 때문에 고기를 무작정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소화력마저도 저질이었다.

별궁의 요리사에게 지시하여 모든 음식을 갈아서 수프로 끓이도록 했다. 끼니마다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었다. 영양 수프로 써클 슬롯을 꽉꽉 채웠다. 그리고 또 걸었다. 걷고, 쉬고, 비틀거리면서도 또 걷고, 쉬었다.

그 와중에 비명을 질러대는 건 하체 근육만이 아니었다.

딩동!

[당신은 과도할 정도의 활동을 이어가며 몸을 혹사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혹사는 자칫 병세의 악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갑작스러운 업무 과다에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시 퇴근을 바랍니다. 저녁이 있는 아름다운 생활을 바랍니다. 건강을 위해 오장육부의 워라밸을 지켜주세요.]

‘시끄러.’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심장 : 야! 인마! 여기 다 죽는다!]

[허파 : 허…… 파…… 허…… 파학…….]

[대장 : 괄약근 확 풀어 버리면 좋겠지 말입니다?]

‘……닥쳐!’

연달아 날아오는 불만 메시지를 모조리 뭉갰다. 이쪽도 필사적인 판국이었다. 2황자는 절대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이쪽이 비책이니 뭐니를 아무리 잘 준비해도 보장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냥 포기하고 싶다.’

당장 몸이 힘드니 그런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안 돼. 여기서 지면 2황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되고…… 이 나라를 말아먹을 거야.’

그러면 이쪽도 전란에 휩쓸려 죽거나, 살아남아도 알거지가 된다. 병상에서 죽는 것보다도 끔찍한 최후일 것이다.

그건 싫었다.

‘절대로 사양이지.’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 생각으로 버텼다.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걷고, 쉬고, 먹었다. 마나 슬롯의 영양 수프를 시시때때로 전신에 공급했다. 저녁엔 침술로 하체 근육의 피로를 다스렸다. 그리고 푹 잤다.

하루, 이틀, 닷새…….

시간이 흐르며 내딛는 걸음에 힘이 붙었다. 걸음이 안정적으로 바뀌니 체력 소모가 줄었다. 그만큼 한 번에 걸을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늘어난 시간만큼 근육을 더 많이 쓰고, 그만큼 힘줄과 근육이 단단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13일차가 되었을 무렵.

“……후! 후욱!”

그는 조금씩 뛸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뜻밖의 메시지도 접하게 되었다.

딩동!

[당신은 신체의 한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강도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이상적인 형태의 휴식과 영양섭취를 꾸준히 실행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이 당신의 건강 상태를 조금씩 호전시켰습니다.]

[그 결과, 당신의 심폐 지구력이 소폭 향상되었습니다.]

[심장의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심장 등급 : F -> D]

[당신의 심장은 신체활동의 한계를 뛰어넘은 상황에서도 10초간 일정한 심박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허파의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허파 등급 : F -> D]

[당신의 허파는 흉부, 복부에 가해지는 강한 충격에도 2회까지는 숨이 콱 막히지 않고 버텨내며 호흡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100HP를 후원하였습니다.]

[허파가 매우 기뻐하며 200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800]

‘허?’

라키엘은 뛰다 말고 눈이 동그래졌다.

심장과 허파의 등급 상승에 HP 후원까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깜짝 선물 같은 메시지였다.

‘이런 선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몸을 혹사시킨 보람이 있었다.

달라진 것은 심장과 허파의 등급뿐만이 아니었다.

‘진맥.’

그는 뜀박질을 멈추고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거칠게 뛰는 맥박 사이로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초급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1세]

[신장 : 176.3 Cm]

[체중 : 58.9 Kg]

[혈액형 : Rh+ O]

‘후우, 체중 또 늘었네.’

여전히 볼품없는 수치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전보다 나아졌다. 키는 0.1센티 자랐고, 체중은 무려 5킬로그램 이상 늘었다.

‘살이 붙어가고 있어. 근육도 약간은 붙었고.’

전보다 조금은 더 사람다운(?)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예전이 돋보기로도 안 보일 미세먼지 멸치였다면? 지금은 핵멸치라고 놀림 받을 정도로는 레벨업이 된 셈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대결이니까. 최소한의 요건은 갖춰졌어.’

승리를 위한 세 번의 방어.

세 번의 방어를 위한 준비.

나름 열심히 땀 흘렸다.

그러니 이제는 준비의 화룡정점을 찍어야 할 때였다.

“가르딘 경?”

마무리 운동을 마친 그는 가르딘 경을 불렀다.

“술을 가져와 줘. 제일 독한 것들로만.”

“……예?”

“예는 무슨. 별궁에 술 없어?”

“물론, 있긴 합니다만-”

“그런데?”

“술은 대관절 왜 찾으시는 건지.”

“당연히 마시려고 찾지.”

“……예에에?”

가르딘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황급히 대꾸해 왔다.

“수, 술을 드시겠다는 겁니까?”

“어. 그러니까 잘 골라서 가져와 줘. 제일 독한 것들로만 엄선해서.”

“…….”

“뭐. 왜. 뭐.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황태자 전하.”

“어.”

“사람은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언제나 가슴속 한구석에 희망이라는 꽃 한 떨기를 품고서 살아가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건 누구한테 배웠는데.”

“제 아버지한테서요.”

“음, 훌륭한 가르침을 남겨주셨네. 그런데 꽃엔 별로 흥미가 없어서. 미안.”

“꽃이 아니라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 충분히 희망적이고 낙관적이거든.”

“……즈어어언하아!”

“어오 씨. 깜짝이야.”

“아무리 내일의 대결이 걱정이 되신다고 해도, 두렵다고 해도, 그 몸으로 술을! 그것도 제일 독한 것들로만 드시겠다니요!”

“귀 아파. 살살 얘기 좀 해.”

“아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전하,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알긴 뭘 아는데.”

“지난 며칠 내내 전하께서 보이셨던 필사적인 몸부림 말입니다.”

“어, 하체랑 체력 운동. 그게 어때서.”

“분명…… 그렇게라도 애쓰고 땀을 흘리시며 두려움을 떨쳐내려 노력하신 거였겠지요. 그 몸부림치는 심정,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엿보려 발악하는 그 절박한 마음, 충분히 보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발악까지 한 건 아닐 텐데.”

“제겐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어, 그래서?”

“전하를 아주 조금이나마,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

“항거할 수 없는 미래를 앞두고서도! 예정된 패배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시는 그 모습이 얼마나 숭고해 보였는지! 전하는 알고 계십니까!”

“으음,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오, 귀 아프다니깐.”

“그러니까 전하! 이제 와서 무너지지 마십시오. 그 몸으로 독한 술이라니요. 아니 되십니다. 비록 내일의 대결이 두렵더라도, 지금껏 보여온 전하의 의지를 끝까지 지켜나가며 떳떳한 패배를 맞이하십시오, 전흐아!”

“떳떳한 패배? 싫은데.”

“하지만 전하, 패배하더라도 떳떳한 모습이야말로…….”

“안 질 거라고.”

“……예?”

“이긴다고, 내가.”

“…….”

애원하던 가르딘 경은 멈칫, 자신의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의 눈에 비친 황태자의 표정.

“이겨야 하니까, 그래서 필요한 거니까. 가장 독한 술, 전부 가져와.”

그것은 떳떳한 패배가 아닌, 사기적인 야비한 승리를 준비하는 자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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