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예상을 부수다 (1)
아침이 밝았다.
아니, 밝기 직전에 가르딘 경은 눈을 번쩍 떴다.
“……으음.”
자다 깼는데도 온몸이 피곤했다. 머리는 무겁고 눈꺼풀도 뻑뻑했다.
‘밤새 무슨 꿈자리가…….’
그렇게 사납던지.
무척 어지럽고 불안한 꿈을 많이 꾼 밤이었다. 덕분에 잠을 잤는데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어젯밤보다 더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후우, 오늘 어떡하나.’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바로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가 2황자와 대결을 벌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태자위를 내어주시겠지.’
아마 패배하실 거다.
거의 정해진 결과다.
아니, 그냥 필연이다.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어찌 이런 불합리한 경우가 다 있을까. 아무리 황태자 라키엘의 건강이 조금 안 좋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를 이렇게 잔혹하게 다루어도 되는가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이런 처사가 옳은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었다. 덕분에 밤새 사나운 꿈에 시달리며 잠을 설치고 말았다.
‘아니야. 이렇게 힘 빠진 모습으로 전하께 아침 인사를 드릴 수는 없어. 나라도 정신 차리자. 힘! 힘!’
짝! 짜악!
손바닥으로 양쪽 뺨을 찰지게 촵촵 때렸다.
없던 기운이 조금은 솟아났다.
지난 저녁의 일도 떠올랐다.
‘전하께서도 결국엔 술을 참으셨잖아!’
그랬더랬다.
대결을 앞둔 지난 저녁.
황태자 라키엘이 뜬금없는 명령을 내렸더랬다. 술을 가져오란다. 그것도, 가장 독한 술을 모조리 다 가져오란다.
자신은 기겁했었다.
환자가 술이라니.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시면 안 되신다고.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지만, 그렇게 스스로 무너지시면 안 된다고. 간절히 매달리는 마음으로 호소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막무가내이셨다.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명령이라고. 안 들을 거면 별궁에서 나가라고. 지금껏 보인 적 없는 단호한 모습까지 드러내셨다.
결국, 자신은 오열하는 기분으로 그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별궁에 보관된 술 중에서 가장 독한 것들을 골라 황태자의 침실로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침실 밖으로 쫓겨났던가.
‘그때까지만 해도 전하께서 기어이 무너지시는구나 싶었는데.’
안타까웠다.
슬펐다.
그렇게 얼마나 침실 문 앞을 서성였을까. 들어오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이 들려왔을 때. 자신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침실 문을 박차듯 열어젖혔더랬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술병의 밀봉이 전부 풀려 있었지. 그리고 딱 한 모금씩이 사라져 있었어. 모든 술이 전부 다.’
그걸 목격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명령에 떠밀려 가져다준 술. 그건 그냥 술이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술고래들도 한 모금에 인사불성이 되고야 마는, 지독하기로 소문난 종류의 술들이었다.
한데 그것들을 모조리 한 모금씩 마셨다니. 황태자 전하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기겁해서 전하의 상태부터 살폈더랬다.
한데 뜻밖에도…….
‘전하는 전혀 취한 기색이 없으셨지. 아니, 술 냄새도 풍기지 않으셨어.’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그토록 독한 술을 한 모금씩 돌아가며 섞어서 마셨는데도 취기 없이 멀쩡하다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전하께 물었더랬다.
‘전하?’
‘어. 왜.’
‘괜찮으십니까?’
‘보고 있잖아. 나 멀쩡한 거.’
‘……참으신 겁니까?’
‘뭐. 그렇다고 해야 하나.’
어깨를 으쓱이며 웃던 전하의 모습. 그건 아무리 봐도 술을 마신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제야 자신은 안도할 수 있었다.
‘안 마시셨어. 마실 뻔하다가 그냥 버리셨구나.’
혹시 창밖으로 주르륵 버리신 걸까.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괜스레 안쓰럽고도 대견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번민하셨던 거야. 중압감에 술을 마시고 싶으셨는데, 그래서 술병을 열고서 창밖의 달빛을 보시며 한참을 고민하시다가, 마침내 고개를 젓고는 창밖으로 술을 주르륵.’
아마도 그걸 여러 차례 반복하셨겠지.
그만큼 많이 번민하신 거겠지.
그럼에도 끝까지 참아내신 거겠지.
‘역시 우리 황태자 전하.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가르딘 경은 새삼스러운 자랑스러움과 흡족함을 느끼며 문고리를 잡았다. 황태자의 침실로 통하는 쪽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빠진 표정이 되고 말았다.
“……어?”
“일어났어? 뭘 그렇게 놀라?”
활짝 열어젖힌 쪽문.
그 너머에 황태자 전하가 있었다. 한데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 다른 모습이셨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는…….
“이런 거 들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지?”
황태자 라키엘이 ‘이런 거’라고 말하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 팔에 들린 커다란 방패가 번쩍거리며 위용을 자랑했다.
“왜…… 방패를 들고 계십니까?”
“왜냐니. 오늘 대결에서 쓸 물건인데.”
“그걸요?”
“어. 그래서 대장장이한테 미리 주문했던 거고. 마침 때맞춰 완성품이 와서. 시험해보는 중이야.”
휙휙, 라키엘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각도로 번득이는 방패의 모습이 다소 특이했다.
일단 컸다.
모양은 직사각형.
가로는 50센티 정도.
세로는 무려 120센티에 달했다.
그리고 상단에 가로 한 뼘, 세로 3센티쯤 되어 보이는 기다란 직사각형 구멍이 있었다. 방패로 몸을 가렸을 때, 방패 너머를 슬쩍 쳐다보며 시야를 유지하기에 딱 좋은 높이와 위치였다.
특이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방패 안쪽 상단에 커다란 손잡이가 하나 더 있었다. 처음 보는 위치의 손잡이였다.
“이거 좋은데. 생각보다 착용감도 좋고. 내 주문사항을 거의 정확하게 지켰어.”
황태자 전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 무거우십니까?”
딱 보기에도 무식하게 큰 방패였다.
당연히 무거울 텐데. 일반인보다도 병약한 전하가 어쩐 일인지 저 커다란 방패를 들고서도 부담 없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막상 들어보니 그닥. 단순한 철제가 아니라서. 대장장이한테 신신당부했거든.”
“신신당부라 하심은…….”
“튼튼하면서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달라고.”
“가볍게 말입니까?”
“어. 그래서 갖가지 희귀 금속을 제법 쏟아부었나 봐.”
“아…….”
그제야 가르딘 경은 상황을 이해했다.
단순한 철제 방패로 저 사이즈라면?
최소 7~8킬로그램은 됐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가 제대로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희귀 금속을 듬뿍 넣어 경량화를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략 느낌으로는, 음, 2킬로그램이 조금 안 되는 거 같네.”
저런 사이즈로 그 무게라니.
엄청난 경량화였다.
한데 그 순간, 가르딘 경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방패가 보기보다 너무 가벼워서? 혹은 방패가 굉장히 멋들어져서?
아니었다.
그는 황태자의 방패를 든 모습에서 뭔가 굉장히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째서? 왜…… 저걸 든 전하의 모습이 엄청나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아는 황태자 라키엘은 평생을 병마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검술은 물론이고, 방패 등의 무구를 들어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한데 지금 눈앞의 황태자 전하는 어떠한가.
저런 커다란 방패는 생전 처음일 텐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고 있었다. 그걸 들고서 움직이는 동작들도 그랬다.
마치 요리사가 국자를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혹은 목수가 톱과 망치를 다루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너무나 편하고 익숙해 보였다.
들고 있는 자세도.
사소한 동작들과 분위기까지도.
‘꼭…… 1, 2년쯤 방패를 끼고 살았던 사람 같은데.’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의문을 풀 틈은 없었다.
“그럼 가자.”
상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전하의 목소리.
“……예?”
얼결에 반문했다.
그러자 전하가 피식 웃었다.
“대결하러 가야지.”
“아직…… 많이 이른 시간인데 말입니다?”
“준비할 것들이 있으니까.”
전하가 다시금 빙긋.
“대결할 로이-하비교가 어떤 환경인지 살펴봐야지. 자리가 얼마나 넓은지. 바닥은 평탄한지. 햇볕이 어느 방향에서 비치며 눈을 부시게 하는지. 구경꾼들이 어느 장소에 많이 모여 소리를 지를 것인지도.”
“…….”
“그런 것들을 미리 살펴놔야 실전에서 뜻밖의 변수에 허둥거리는 일이 줄어들 거니까. 조금이라도 이길 확률이 생길 거니까. 그렇지 않겠어?”
“전하?”
“어. 왜.”
“아, 아닙니다.”
가르딘 경은 허둥대며 말꼬리를 흐렸다. 방금, 저도 모르게, ‘정말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겁니까?’라고 물을 뻔했다.
‘후우, 무례를 저지를 뻔했군.’
아마 오늘 대결의 결과를 전하도 예상하고 있을 거다. 이건 어떻게 해도 절대로 이기지 못할 승부니까. 자신이 패배할 거라는 사실도 알고 계실 거다.
한데 그럼에도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 전하였다. 그런 분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았느니 어쩌니’ 하는 질문을 함부로 던지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르딘 경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저도 서둘러 짐을 꾸리겠습니다.”
“짐이라니?”
“응급처치 도구와 붕대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건 좋네. 대신 좀 서둘러주고.”
그렇게 짐을 챙기고 별궁을 나섰다.
대결 장소인 로이-하비교에 도착했다.
약 300년 전, 전설적인 토목공학자 로이드 프론테라가 국왕 알리시아의 의뢰를 받들어 건설했다는 로이-하비교는 예상보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이거, 완전 광안대교 스타일인데?’
라키엘은 솔직하게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다리의 규모가 컸다.
심지어 무려 현수교였다.
게다가 인근엔 이미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 북적대고 있었다. 어림잡아 봐도 그 숫자가 천 단위는 훌쩍 넘어 보였다.
‘동네 구경났구만.’
기대감 가득한 시선의 시민들.
남자들은 흥분한 기색으로 떠들어댔다. 아낙들도 흥미진진한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뭣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 사이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저들 모두가 이쪽의 패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리라. 황태자가 패배하여 2황자에게 황태자위를 넘기는 역사적인 구경거리를 눈에 담으러 온 것이리라.
‘모두가 내가 질 거라 생각하겠지.’
라키엘은 마음을 다잡으며 대결 장소를 살폈다. 그 사이, 시간이 흐르며 귀족들이 단상에 착석했다. 2황자 테오도르도 다리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사위가 엄숙해졌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조리 침묵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광경은 라키엘에게도 경이로워 보였다.
그 침묵 사이로 황제의 연설이 이어졌다.
내용이야 뻔했다.
오늘, 황태자 라키엘의 청에 의해 이 대결이 펼쳐지게 되었다고, 제국과 황가의 미래를 위한 이 대결을 통해 황좌에 적합한 이를 가려낼 것이라고 등등.
“……하여, 대결이 시작되고 5분을 버텨내면 황태자 라키엘의 승리, 그렇지 못하다면 2황자에게 승리가 돌아갈 것이니.”
두 황자는 공정한 승부를 벌일 것이며. 이 자리에 모인 만인이 그 증인이 될 것이라고.
황제의 엄숙한 선포가 내려졌다.
그동안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동시에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상 이 대결은 황태자 라키엘의 폐위식이 될 거라고. 황제의 저 연설 또한 황태자 폐위 선언문이나 다름없다고.
수천, 수만의 시민들이.
수십, 수백의 귀족들이.
연설을 하는 황제도.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라키엘이 겪을 패배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라키엘이 겪어야 할 쓰라림과 수치심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
2황자가 얼마나 멋진 모습으로 자격을 증명할 것인가. 그리하여 얼마나 명예롭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남길 것인가.
다들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렇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이 대결의 결말이 가져다줄 충격을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대결을 시작하라.”
마침내 선언이 내려졌다.
두 황자가 다리 중앙에서 만났다.
격돌했다.
그때부터였다.
수천, 수만의 시민들이.
수십, 수백의 귀족들이.
대결을 지켜보던 황제도.
검을 휘두른 2황자조차도.
곧,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