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예상을 부수다 (2)
대결이 시작되었다.
황제의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십 수백 귀족과 수천 시민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그곳에 황태자와 2황자가 있었다.
누가 먼저 달려들까.
아마도 당연히 2황자겠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드넓은 다리 위에 난데없는 쇳소리가 울렸다.
철그렁!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황태자 라키엘이 들고 있던 대련용 철검이었다. 2황자의 검격을 막아내다가 놓쳐서? 아니었다. 철검은 황태자가 스스로 놓은 것이었다.
아니, 버린 것이었다.
“설마…… 대결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2황자, 테오도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안도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역시, 형님은 무리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건가.’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황태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였다. 그런 형제에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 이 상황이 내심 부담스럽던 터였다.
그렇기에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실망감도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형제도 그런 상황이 많이 무서웠을 테지. 중압감이 상당했을 테지.
이해가 되긴 했다.
하지만 이건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혈통이 대결을 앞두고서 포기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황가의 명예가 실추될 터다.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할까.’
모두에게 들리지 않도록 형제를 설득하고 달래야 할까. 다시 검을 집어들게 하고, 형식적으로나마 대결을 이어가서 황가의 명예를 지켜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판단을 내린 테오도르는 형제를 쳐다보았다. 나직한 설득의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스윽.
검을 놓은 형제, 라키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방패 안쪽의 상단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왼팔은 내부 팔걸이에 걸어 방패 중앙부를 지지했다. 오른발을 한 걸음 뒤로 빼며 강하게 땅을 디뎠다.
그것은 굳건한 전투 자세였다. 동시에, 어쩐지 능숙해 보이는 방어 자세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2황자 테오도르는 깨달았다. 자신의 형제가 대결을 전혀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방금 검을 버렸던 행위 또한 일종의 선택과 집중이었음을.
‘어설픈 공격은 포기. 대신 적극적인 방어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겠다는 건가.’
생각해보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형님은 검술을 익힌 적이 없으니까.
그런 어설픈 검술로 이쪽에 대항해봤자 승산이 없으리라 여겼을 터다. 하니 큼지막한 방패로 이쪽의 공격을 버텨내는 쪽을 선택한 거겠지.
‘이 대결은 이기고 지고의 여부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형님이 나와의 대결에서 쓰러지지 않고 5분을 버티느냐로 승부가 판가름나는, 그런 조건의 대결이니까.’
어설픈 공격 대신 확실한 방어. 배다른 형제의 선택에 2황자는 내심 찬사를 보냈다.
‘훌륭한 판단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이 대결을 마무리하여 편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스릉!
테오도르의 대련용 철검이 뽑혔다.
동시에 그의 기세가 변했다.
키이이이잉-!
2황자의 심장이 포효했다.
심장을 둘러싼 한 줄기 써클이 날뛰었다.
황가의 비전, 아스라한 심법이 사나운 기세의 짐승이 되어 2황자의 전신 혈맥을 일깨웠다. 부추겼다. 모든 방어를 부수고, 씹어먹으라고.
그 순간, 2황자의 발이 땅을 박찼다.
투확!
돌진과 검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2황자의 몸이 검이었고, 검이 몸을 이끌었다. 온전한 체중이 실린 부드럽고도 강맹한 내리치기였다.
‘이걸로 끝내드리겠습니다.’
2황자는 확신했다.
끝이라고.
이걸 막을 수는 없으리라고.
자신의 형제가 제아무리 크고 튼튼한 방패를 앞세웠다고 해도, 이걸 막지 못함은 필연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건 정직하게 막는다고 해서 막아질 일격이 아니니까.’
솔직한 사실이었다.
자신의 체격이 형제의 것을 압도한다. 병약하고 왜소한 형제에 비해 자신은 더없이 건장하다. 그렇듯 압도적인 체중과 근력, 속도를 모두 실었다. 마나까지 실었다. 한데 이런 공격을 정직하게 방패로 막으면?
무조건 무너진다.
방패로 검은 막을 것이되, 방패 뒤의 몸이 무너질 것이다. 충돌을 버티지 못한 팔뚝이 부러질 것이며. 충격을 감당치 못한 무릎이 꿇릴 것이다.
뒤로 나동그라지지만 않아도 다행일 터.
2황자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뒤로만 넘어지지 마십시오. 그냥, 무릎만 꿇으십시오!’
자신의 형제가, 황가의 혈통이 사람들 앞에서 꼴사납게 뒤로 넘어져 구르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찍어누르는 내리치기를 선택했다.
패배하더라도 격조 있게. 제자리에서 조용히 꿇을 수 있도록. 나름으로 형제를 배려하는 일격이었다.
한데 그의 배려는 뜻밖의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스륵.
검이 방패를 내리치기 직전.
방패의 각도가 묘하게 틀어졌다.
‘……음?’
2황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검의 궤도를 수정할 여유는 없었다. 그의 검이 그대로 방패를 내리쳤다. 방패를 긁으며 옆으로 흘러나왔다.
콰카가각-!
“……!”
검에 실었던 체중과 근력, 속도, 마나까지. 전부 제대로 방패에 전달되지 못했다. 자신의 검은 그저 비스듬히 내밀어진 방패의 면을 긁어내듯 흘러내려 갔을 뿐.
‘……비껴냈어? 내리치기를?’
2황자는 경악했다.
‘어떻게?’
비껴막기는 쉬운 기술이 아니었다.
각도와 타이밍이 모두 완벽해야 했다. 비껴막는 순간의 충격을 감당하는 팔꿈치와 어깨, 견갑의 관절 컨트롤도 필요한, 나름의 중급 기술이었다.
한데 그걸 자신의 배다른 형제, 황태자가 해냈다. 방패 너머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 생생하게 살아서 이글거리는 황태자의 눈빛이 그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야.’
깨달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2황자는 잠시 떠오른 놀라움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부의 결과가 바뀌진 않을 겁니다.’
꽈드득!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껴막기에 흘러내린 그의 검이 다시금 사나운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태자 라키엘은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어욱, 생각보다 빡쎄구나.’
그는 방패 손잡이를 쥔 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한데 힘을 주는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손아귀가 온통 얼얼했다.
얼얼한 것은 손아귀뿐만이 아니었다. 상단 손잡이를 움켜쥔 오른손 손목과 팔뚝도. 방패를 지지하는 왼팔과 왼쪽 어깨도. 심지어 허리와 허벅다리마저도 저릿저릿했다.
단 한 번.
내리치기를 비껴냈을 뿐인데도 그랬다.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다. 예상보다 더해.’
아니면 이쪽의 육체가 상대적으로 나약한 탓인 걸까. 어쩌면 둘 다인 건지도.
‘하지만 할 수 있어. 못 막을 정도는 아니다.’
까드득!
다시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불현듯, 십수 년 전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은 한의대생이었다. 하지만 동기들처럼 졸업 후에 공보의가 되지 못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의대 입학 전에 군 복무를 마쳤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러긴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그렇게 됐다.
어쨌건 힘이 넘쳤던 이십 대 초반 시기, 나라의 부름에 끌려가 복무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의 자신은 전경, 전투경찰이었다. 체격이 괜찮다는 이유로 방패를 잡게 되었다.
덕분에 당시 사용하던 알루미늄 방패와 얼마나 친해져야 했던지. 거의 7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방패를 들고서 그 얼마나 많은 땀을 단내나도록 흘려야 했던지.
‘지긋지긋했지.’
빡쎄던 훈련들.
방패 검열.
종종 출동했던 시위 현장들.
방패로 정말 온갖 물건을 다 막아봤다. 각목이나 파이프는 물론이고, 죽창이나 야구 배트는 기본이었다. 도리깨, 쌍절곤, 유리병, 벽돌, 액자, 쇠사슬, 빠루, 죽도, 강아지똥 봉투 등등, 그 밖에도 온갖 인간의 창의력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다양한 도구와 물건들을 죄다 막아본 경험이 있었다.
‘심지어 내가, 어! 러버덕이랑 까나리 액젓도 방패로 막아본 놈이란 말이다!’
그는 외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방패로 바닥을 찍었다.
무게중심을 한껏 낮추었다.
오른손으로 상단 손잡이를 잡고서. 왼손으로 중앙 손잡이를 잡고서. 왼쪽 어깨로 방패 안쪽 면을 지지했다. 모든 체중을 싣고서 방패를 지면을 향해 짓눌렀다.
그 직후, 막강한 충격이 방패 하단을 때려왔다.
쐐애액!
최초의 내려치기가 비껴막힌 직후, 하단을 횡으로 쓸며 날아온 2황자의 검이 방패 하단을 직격했다.
하지만 그 순간, 라키엘은 체중으로 방패를 지지하면서도 절묘하게 각도를 틀었다. 마치 튕겨내며 뿌리치듯이 온몸을 이용해서.
콰텅!
방패와 라키엘의 몸이 옆으로 반걸음 주르륵 밀려 나갔다.
하지만 단지 그뿐.
그는 비틀거리지 않고 자세를 유지해냈다. 검격으로 받는 충격을 절반 이상 측면으로 흘려낸 덕분이었다.
“……!”
2황자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하지만 라키엘이라고 해서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었다. 같은 순간, 라키엘의 눈도 고통으로 찡그려져 있었다.
‘그윽, 흘려내긴 했는데…… 어우야.’
온몸이 저릿했다.
비명을 지르는 근육이나 관절과는 별개로, 기가 쭉쭉 빨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단지 기분 탓은 아니었다.
‘이게 아스라한 심법의 위력인 거구나.’
아까 처음 내리치기를 비껴냈을 때도.
방금 하단치기를 막아냈을 때도.
충격이 생겨나는 순간 이쪽의 마나가 쑥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자신은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고 있었다. 소설 ‘마검황’에서 자주 언급된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아스라한 심법의 특징, 마나 흡수.’
황가의 비전, 아스라한 심법.
이 심법은 마나의 흡수와 증폭, 발출에 특화된 심법이었다. 그러한 특징은 대결을 할 때도 잘 드러나는데, 검격을 나눌 때마다 상대의 마나를 흐트러뜨리고 흡수를 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우욱. 이건 무슨 흡성대법도 아니고.’
속이 울렁거렸다.
무협지에서 종종 봤던 기술이 떠올랐다.
한데 이건 무기를 부딪치면서도 마나를 강탈해 버리니,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슴속 한쪽에서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내 예상보다 마나를 흡수해가는 기세가 훨씬 강렬해. 그렇다면……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어.’
라키엘은 의지를 다졌다. 울렁거리는 속을 누르며 2황자의 세 번째 공격을 주시했다.
이미 2황자는 지척까지 돌진해 오고 있었다.
타아앗!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듯.
이것도 흘려낼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
2황자의 사선 베기가 강렬한 기세로 짓쳐들어왔다.
예상대로였다.
소설에서 공명정대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2황자. 그랬던 녀석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쪽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지 않았다. 방패를 걷어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직 정면승부로 당당하게 이쪽을 누르겠다는 의지만을 보였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보였다.
느껴졌다.
방어를 하며 충격을 흘려낼 타이밍도. 격돌의 순간 마나를 흡수당할 타이밍 또한.
‘이게 마지막 기회야.’
세 번째가 끝이다.
더는 못 버틴다.
이 나약한 육체는 이미 한계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 번째 방어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지난 시간 동안 나름 단련해온 체력과 하체. 공들여 꼼꼼하게 준비한 방패. 거기에 어젯밤 마무리한 마지막 준비까지.
이 순간에 다 쏟아부어야 한다.
‘바로…… 지금!’
터컹-!
2황자의 사선 베기가 방패를 내리쳐 왔다.
그 순간 방패를 튕기듯 꺾었다.
앞선 두 번의 방어처럼.
충격을 흘려냈다.
그 순간이었다.
2황자의 아스라한 심법이 이쪽의 체내를 헤집고 들어왔다. 이쪽의 마나를 인정사정없이 강탈하고 흡수했다. 무자비한 침략자의 약탈 같았다.
하지만 그 앞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을 활짝 열었다.
써클 슬롯을 발동했다.
[1번 슬롯의 방출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방출량을 설정해주십시오.]
‘0.2리터!’
힘껏 외쳤다.
동시에 이쪽의 써클 슬롯이 개방되었다. 슬롯에 저장해두었던 물질을 왕창 방출했다.
키이이이잉!
내로라하는 술고래도 한 모금만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는 독주. 그래서 지난밤, 가르딘 경이 가져오길 주저했던 독주. 그러한 독주 스무 가지를 무자비하게 섞은 폭탄주를 활짝 방출했다. 건네주었다.
2황자의 아스라한 심법이 폭탄주를 낼름 흡수했다. 무방비하게 가져가 버렸다.
그 순간.
“……커…… 헉, 딸꾹?”
2황자의 오장육부가 제멋대로 폭탄주 아모르 파티를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