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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8화 (18/468)

18화. 예상을 부수다 (3)

모범생.

소설 마검황에서 묘사된 2황자의 모습은 그러했다. 매사에 성실하고, 열성을 다하고, 반듯하여 비뚤어짐이 없었다. 심지어 술도 거의 입에 대질 않았다. 아니, 술을 거의 못했다.

라키엘은 기억하고 있었다.

‘원작 마검황에서 네가 술에 취한 건 딱 한 번. 죽음을 앞두고서였지.’

마검황 속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제국이 몰락하던 때였다.

눈앞의 2황자 녀석이 황제가 되어 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황도 마젠타의 모습을 지켜보며 권좌에 앉아 있었다. 소리 없는 비탄에 잠겨 술잔을 들었다.

별로 독하지도 않은.

평범한 와인이었다.

한데 그 와인 한 잔에 취해 버렸다. 그렇게 취한 채로 침략자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소설 속 마젠타노 황가가 완전히 몰락하는 장면이었다.

‘어쨌건, 거기서 내가 얻은 교훈은 하나였지. 넌 술이 약하다! 무지막지하게!’

“……쿨룩! 콜록! 어째서…… 딸꾹?”

이쪽이 속으로 외치는 것과 동시에.

2황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게졌다.

녀석의 눈빛은 완전히 당혹감에 절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리는 벌써부터 비틀비틀.

현란한 영덕대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됐다!’

라키엘은 방패 손잡이를 불끈 쥐었다. 노림수가 제대로 적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써클 슬롯, 폭탄주 방출 타이밍 좋았고.’

마침 2황자의 아스라한 심법이 침범해 들어오는 타이밍을 딱 노렸다. 2황자가 이쪽의 마나를 흡수하는 순간에 절묘하게 맞췄다.

딱 그때.

써클 슬롯을 개방했다. 슬롯에 담아두고 있던 ‘독주 20종 폭탄주’ 0.2리터를 방출했다. 즉, 2황자는 아스라한 심법의 흡수력으로 폭탄주 한 잔을 졸지에 원샷하게 된 셈이었다.

‘이러려고 준비한 거지. 어젯밤에. 가르딘 경이 기겁하는 것도 무시하고.’

문득,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독한 술을 가져오라 명하니 가르딘 경이 어찌나 기겁하던지.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독주가 무조건 필요했다.

그렇게 강짜를 부려 독주를 가져오게 했고, 약 스무 병의 독주를 한 모금 분량씩 섞어서 폭탄주를 제조했다. 그리고 한 방에 들이켜서 써클 슬롯에 저장했다.

덕분에?

‘성능 확실하고.’

비틀!

“……크흡?”

2황자, 테오도르의 다리가 꼬였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테오도르는 말 그대로 당혹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뭐……지? 이거 대체 뭐지?’

이 상황이 뭔지.

왜 자신이 이토록 어지러운 건지.

다리는 물론이고 온몸이 말을 듣질 않고. 어째서 또 세상은 하늘이며 땅이며 빙글빙글 도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신마저 잃을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자신은 그저 형님과 대결을 벌이고 있었을 뿐인데. 방패 뒤에 숨은 형님을 몰아치고 있었을 뿐인데. 승리를 거의 목전에 두고 있던 참인데.

‘방금…… 방패를 쳤을 때…… 뭔가…….’

들어왔다.

이쪽의 아스라한 심법.

그 흡수력에 실려 뭔가가 들어왔다.

평범한 마나가 아니었다.

이질적인 뭔가를 품고 있었다.

그 뒤로 마치 폭탄이 몸속에서 터지듯, 뭔가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버렸다.

‘나…… 왜 이런 거야?’

당혹스럽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2황자는 검을 움켜쥐었다.

‘쓰러지면 안 돼.’

뭔지는 몰라도 당했다.

불의의 일격을 먹은 거다.

그래서 내가 어지러운 거다.

2황자는 필사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어차피 이건 대결인 거라고. 그러니 이쪽이 형님에게 당할 수도 있는 거고. 그 과정에서 한 방쯤 먹을 수도 있는 거라고. 그게 대결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혼란스러운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잠시 흐릿해졌던 목표가 다시금 보였다.

‘이긴다.’

오늘 자신은 형님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것이다. 5분 이내로 형님을 쓰러뜨릴 것이다. 그리하여 아바마마의 인정을 받고. 황도의 수천수만 시민들 앞에서 환호를 받고. 정통성을 거머쥔 당당한 황태자로 거듭날 것이다.

그것이 자신과 황실, 제국, 더 나아가 병마에 시달리는 형님을 위한 길일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이길 겁니다.’

콰앙!

2황자는 필름이 끊길 것 같은 취기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강한 발길질로 바닥을 박차 균형을 찾았다.

다소 흔들릴지언정.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그 끝에 황태자 라키엘이 있었다.

“후읍!”

심호흡과 함께 검을 치켜들었다. 둔해지고 둔탁해진 검격이 라키엘을 향해 날아갔다.

카앙!

검과 방패가 충돌했다.

라키엘이 비틀거렸다.

2황자가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심법으로 라키엘의 마나를 흡수했다. 한데 그렇게 흡수한 마나 속에 또 폭탄주가 들어 있었다.

‘자아, 또 원샷! 빼지 마시고?’

라키엘이 방패 뒤에서 사악한 미소를 짓는 순간.

[써클 슬롯에 저장된 폭탄주 0.1리터를 방출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폭탄주가 방출되었다. 2황자 테오도르는 또 무방비 상태에서 폭탄주 0.1리터를 흡입하게 되었다.

“……쿨럭! 딸꾹!”

테오도르의 얼굴이 더욱 시뻘게졌다. 눈동자가 거의 풀렸다. 저도 모르게 동네방네 갈지자 스텝을 밟으며 뒷걸음질쳤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무…… 무슨…… 딸꾹! 흐끅!”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젠 몸이 거의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마치 지독한 독에 당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구경하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2황자님께서 왜 저러시지?”

“나, 나도 모르겠는데.”

“꼭 술에 취하신 것 같잖아?”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그러려고. 아까까진 멀쩡하셨잖나. 도중에 술을 드시지도 않았고.”

“그 말도 맞긴 한데…….”

시민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숙덕거렸다. 당혹감을 느끼는 건 귀족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째서, 2황자 전하께서 저러시는 건가?”

“그, 글쎄 말입니다.”

“설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신 건가?”

“아니, 그건 아닌 듯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직 방어만 하셨을 뿐, 어떤 반격도 가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그럼…….”

“짚이는 구석이 있으십니까?”

“방패술 말일세.”

“예?”

“내가 듣기로는, 방패술에 극도로 능한 이는 방어 시에 발생하는 충돌의 충격을 고스란히 공격자에게 돌려주는 기예를 쓴다고 하더군. 전장에서 평생을 구른 최상급의 용병들이 그런 기예를 쓴다고 말일세.”

“그럼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기예를 쓰고 계시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래서 나도 혼란스럽다네.”

“……예,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귀족들은 혼란을 느꼈다.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결이 시작되고 몇 번 충돌하지도 않았다. 한데 벌써부터 2황자가 형편없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낯선 모습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그중에서 오직 단 한 명. 황제 아스테리온만이 나머지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다리 위의 대결을 바라보는 황제.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사이로 엇비친 눈동자에는 의혹과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라키엘, 아스라한 심법, 정말이었더냐?’

황제의 시선이 라키엘을 향했다.

정확히는 라키엘의 가슴 어름을 주목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래서 지극히 희미하지만.

분명 아스라한 심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써클이 회전하며 내뿜는, 아스라한 심법의 보유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공명이었다.

‘분명하구나. 확실하구나. 너는…….’

그걸 여태껏 숨기고 있었단 말이더냐.

황제는 침음을 삼켰다.

문득, 보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라키엘을 황궁으로 불러 제안을 했던 날이었다.

황태자위를 내려놓으라고. 동생에게 양보하고 물러나라고. 그렇게 억누르려던 날, 그때도 라키엘에게서 잠시나마 아스라한 심법의 기운을 느낀 바 있었더랬다.

‘그저…… 착각이었다 여겼거늘.’

어려서부터 내내 병약했던 맏아들.

그런 맏아들이 강대한 심법을 일깨웠을 리 없다고 여겼다. 자신의 헛된 희망이 신기루처럼 건네준 잠깐의 착각일 것이리라 치부했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틀린 것은 자신이었다.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토록 수많은 이들의 기운이 뒤섞인 장소임에도…….’

이토록이나 선명하게 포효하는 써클의 공명이라니. 황제는 저도 모르게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다리 위의 대결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이제는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후웅! 후우웅!

커다란 방패가 휘둘러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깡마르고 왜소한 황태자 라키엘이 전진하고 있었다. 끈질기게 전진하며 방패로 밀고, 후리고, 찍고, 쳤다.

그때마다 2황자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2황자의 손에 검이 들려 있건만. 그 검은 공격에 전혀 쓰이질 못하고 있었다. 그저 황태자가 더 접근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듯 휘두르는 모습이 다였다.

방패를 든 이가 공격하며 몰아붙이고. 검을 든 이가 수세에 몰려 물러나는. 이 기묘한 광경에 황도의 시민과 귀족들 모두가 거대한 침묵에 휩싸였다.

수천수만이 모인 군중 속의 고요.

이 기묘한 고요의 바다를 헤쳐나가듯, 라키엘의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다리 위에 울려 퍼졌다.

“후! 후웁!”

호흡이 끊어질 것 같다.

방패가 점점 무거워진다.

문득문득 하늘이 노랗게 변한다.

너무나 빠르게 찾아온 체력의 한계가 다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멈추지 않았다.

‘이 저질 체력! 그렇다고 내가 그만둘 줄 알고!’

그는 끈질기게 전진했다.

방패 상단손잡이를 더욱 거칠게 움켜쥐었다.

후우웅-!

원래 방패는 방어를 위한 무구였다. 인류가 처음 방패라는 물건을 발명한 때부터 쭈욱 그러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방패는 궁극의 발전 형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방패의 상단손잡이였다.

한번 직접 잡아보면 알게 될 것이다.

원래 있는 중앙의 손잡이에 왼팔과 왼손을 고정시키고 방패의 상단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쥐는 순간. 그렇게 양손으로 방패를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방패가 자신의 마음대로 밀고, 찍고, 치고, 후리고, 걷어내고, 휘두르며, 때로는 찌를 수도 있는 도구로 변모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건 거의…… 기마병으로 치면 등자와 비슷한 거지!’

혹은 컴퓨터의 마우스라거나.

자동차의 오토매틱 기어처럼.

그 물건의 활용도 자체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그런 옵션이었다.

물론 라키엘은 그 상단손잡이 활용의 숙련자였다. 대한민국에서 의무복무를 했기에. 원치 않게 전경으로 굴렀기에. 수없이 땀 흘렸던 날들 덕분이었다.

“쓰흡! 후! 후욱!”

터질 듯 숨을 들이마시며.

비틀거리려는 다리를 독려하며.

계속해서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압박했다.

방패로 밀고, 쳤다.

2황자가 검으로 저항하면 걷어냈다. 걷어내어 만든 빈틈으로 방패로 찍었다. 크게 허둥거리는 2황자를 더욱 압박하고 내몰았다.

마침내 2황자의 등이 다리 난간에 닿았다. 막다른 곳에 내몰렸다. 그 쇳덩이 난간의 차가운 감촉이 등에 닿는 순간, 2황자의 흐려졌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제정신을 찾았다.

“……딸꾹! 크으읍!”

거의 필름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2황자는 자신이 대결 중이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놓칠 뻔했던 승부욕의 끈을 다시금 부여잡았다. 검 손잡이를 더욱 거세게 그러쥐었다. 방패를 앞세워 압박하는 형제에게 전력으로 저항했다.

“……크하압!”

비록 만취하여 비틀거릴지언정.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일지언정.

이 순간, 모범생인 2황자는 지금껏 성실히 쌓아왔던 고된 훈련의 성과를 온전히 드러냈다.

쐐애액!

일순간 날카로움을 되찾은 2황자의 검격이 공간을 갈랐다. 짐승의 발톱처럼 번득이며 라키엘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라키엘은 그곳에 없었다. 앞으로 몸을 날리며 2황자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후욱.

검격이 스치듯 라키엘의 머리칼을 건드렸다.

라키엘이 2황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방패도 버렸다.

한 손은 2황자의 허리를 붙들었다.

한 손은 2황자의 명치를 짚었다.

그 순간.

키이이잉-!

2황자의 명치를 짚은 라키엘의 손바닥에서.

격전이 이어지는 내내.

격렬한 호흡을 통해.

써클 슬롯에 저장했던 10리터의 공기가 발사되었다. 공기 폭탄이 터지며 2황자의 명치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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