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데미안 카이엔 (1)
데미안 카이엔.
그 이름을 수백, 수천 번은 읽었다. 그의 일러스트 수십 장을 보았다. 당연했다. 그가 바로 이 소설, ‘마검황’의 진짜 주인공이니까.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핵사이다를 선사하며 마지막엔 황제까지 되는 녀석이지.’
라키엘은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코로나 때문에 한의원이 한창 망해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꿈도 미래도 희망도 답도 없던 시기였다.
그 당시 자신의 유일한 낙이 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안 그러곤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 발길 뚝 끊긴 진료실의 적적함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하여 시간이라도 때우려고 원래는 별로 즐기지도 않았던 소설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더랬다.
막상 읽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가끔 취향이 안 맞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소위 인생작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도 있었다.
그게 바로 마검황이었다.
덕분에 마검황만 몇 번이고 정주행을 했다. 심지어 팬카페에도 가입했다. 나름 정리한 설정집을 올리기도 했다. 소설 내의 중의적 전개와 설정의 숨은 뜻을 해석하며 다른 회원과 밤샘 키배도 떠봤다.
그런 덕분이었다.
‘데미안, 난 지금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두 알고 있어.’
그는 황도에 있다.
엄청난 재능을 품고서.
그럼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서.
지하 세계에 붙들려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금단현상을 부르는 중독 때문이지.’
지독한 마약성 진통제가 그를 묶어두고 있다. 매일 밤 치러지는 살벌한 전투 때문에. 그 전투의 후유증을 버텨내느라. 언제나 달고 살아야 하는 진통제가 그를 지하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게 데미안 카이엔이 지금 시기에 겪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분명 그렇겠지. 앞으로 2, 3개월 뒤까진 계속 그 상태일 거야. 원래 소설의 전개대로라면.’
라키엘은 소설 마검황의 초반 전개를 떠올렸다. 초반 데미안의 상황은 암울,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곧 변화가 찾아왔다.
변화의 불씨는 바로 황태자 라키엘의 죽음이었다. 황태자 라키엘이 죽으며 황도의 상황이 급변했다. 2황자가 황태자위를 받으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노력했다. 불법시설과 범죄조직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였다.
그 영향이 지하세계에도 미쳤다.
소위, 나비효과라고 부를 만한 변화였다.
덕분에 데미안에게 우연한 기회가 생겨났다. 자신을 얽어매던 지하조직을 탈출할 기회였다. 그렇게 그는 암울했던 중독에서 벗어났다. 황태자 라키엘의 죽음이 그에겐 행운이 된 셈이었다.
한데 지금은?
‘미안. 내가 죽어줄 생각까진 없어서.’
설정을 되짚던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사실 이 시기의 소설 속 라키엘은 스스로 걷지도 못했다. 병세가 너무나 악화되어 오늘내일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반면, 지금 자신은 훨씬 쌩쌩하다.
멀쩡히 걷는 것은 물론이고, 가볍게 뛸 수도 있다. 아침저녁으로 피를 토하지도 않는다. 물론 여전히 시한부 인생 신세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기대수명을 연장할 방법도, 자신도 있었다.
‘그러니 이미 소설 초반의 전개와는 많이 달라져 버린 셈이지.’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소설 초반 황도에 생겨난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생겨난 나비효과가 지하세계에 번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연히’ 데미안이 겪었던 행운도 없을 것이다.
즉, 데미안이 암울한 지하세계를 탈출할 계기도 마련되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아마도 거기서 못 벗어나겠지. 중독자 신세의 굴레를 떨쳐내지도 못할 거고. 아마 그 상태로 계속 망가지다가 죽지 않을까.’
확실히 그럴 터다.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한 결과지만, 인생이란 게 따지고 보면 그런 우연한 나비효과의 연속이 아니겠는가.
‘뭐, 그런 셈이지. 누군가는 생각 없이 10년 전에 샀다가 까먹고 있던 비트코인 덕분에 수백억 갑부가 되고. 또 누구는 회사 신입 갈궈서 눈물 흘리게 했다가 달래주느라 퇴근 후에 술 사줬더니…… 3년 뒤에 정신 차리고 보니까 그 신입 엄마를 장모님이라 부르고 있고.’
그리고 자신은?
소설 사이트에서 우연히 접했던 추천글 때문에 마검황 팬이 되어서 이렇게 소설 속 설정들을 이용해먹고 있지 않은가.
‘어쨌건, 지금 굴러가는 상황대로라면 데미안은 지하세계에서 못 벗어나. 눈부신 재능이고 뭐고, 거기 묶여서 중독자 신세로 몇 년 안에 죽겠지. 창창한 미래도 다 날아가는 거고. 한데 그런 녀석을 내가 구해주면? 중독증을 치료해주면?’
몇 년도 못 살 녀석을.
편안하게 늙어 죽게 해줄 수 있다.
말 그대로 기대수명이 수십 년은 확 늘어나는 거다.
‘그럼 나도 진료비 청구 스킬을 써먹는 거지. 녀석의 늘어나는 기대수명만큼 2000 대 1 비율로 보너스 수명을 받을 수 있는 거야.’
예를 들어 만약?
이쪽의 진료를 통해 데미안의 기대수명이 50년 늘어난다면?
‘총 600개월. 어림잡아 18,000일. 그 2000분의 1이면? 9일의 보너스 수명을 받을 수 있는 거야.’
9일.
누군가는 ‘겨우?’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엄청난 시간이다. 이쪽이 한 사람만 치료하며 지내겠는가.
아니다.
‘한 번에 수십 명씩 진료할 수도 있잖아. 예를 들자면 그곳에 있는 데미안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까지.’
그러면 계산이 달라진다.
모두 합쳐 수십 일의 보너스 수명을 퍼 받을 수도 있다.
‘게다가 난 소설을 읽은 덕분에 데미안이 어떤 중독을 겪고 있는지, 그걸 어떻게 치료해줄 수 있는지도 모두 알고 있으니까. 이건 거의 공짜로 거저먹는 진료인 거지.’
라키엘은 흐뭇하게 웃었다.
진료방법이 딱 나와 있다.
확실하게 치료해줄 수 있다.
이건 대놓고 남는 장사다.
확신한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준비할 게 조금 있어.”
“……예?”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이던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비라고 하심은……?”
“쑥.”
“……예에?”
“3일 안에 쑥을 준비해줘. 수량은 한 부대 가득 정도? 그렇다고 아무 쑥이나 가져오면 안 되고. 바닷가에서 해풍을 맞으면서 자란 쑥을 구해오면 딱 좋겠네.”
“대관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흘 줄 테니 구해오라고.”
“…….”
“사흘은 너무 긴가. 이틀로 할까?”
“아닙니다!”
“그래. 믿을게.”
진심이다.
이쪽이 믿을 사람은 가르딘에 없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해주긴 싫었다. 너무 오글거리니까.
“무조건이야. 해풍을 맞고 자란 쑥이어야 돼. 사흘 안에 별궁 창고에 입고되도록 해줘.”
충실한 가르딘 경이라면 충분히 해낼 것이다. 신신당부한 라키엘은 그제야 길었던 하루를 끝내고 쉴 수 있었다.
♣
사흘이 지났다.
가르딘 경은 이쪽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전하! 구해왔습니다! 이거, 해풍 맞고 자란 쑥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가져온 커다란 자루. 과연 그 안엔 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심 반가웠다.
‘다행이다. 이 세계에도 쑥이 있어서. 마침 상태도 이 정도면 충분히 좋고.’
덕분에 데미안을 진료할 준비를 착착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난 저녁.
행동을 개시했다.
“나가자.”
“……예?”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외출 선언에 가르딘 경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너무 야심했기 때문이었다.
“밖은 캄캄하고 이제 곧 잠자리에 드셔야 할 텐데, 어디로 나가시겠다는 겁니까?”
혹시 정원에서 밤 산책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가르딘 경의 그 온건한 예상은 황태자의 빙긋한 미소와 함께 한 큐에 박살 났다.
“만나러. 데미안.”
“예?”
“내가 며칠 전에 물었지? 데미안을 아느냐고.”
“예, 분명 그러셨습니다만…….”
“지금 만나러 갈 거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대꾸. 가르딘 경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전하께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이 외람되지만, 대체 그 데미안이라는 자가 누구인 겁니까?”
“보면 알아.”
장차 이 세계관의 최강자가 될 인물이다. 이쪽이 반드시 얻어야 할 사람이다. 그래야 앞으로의 인생이 편해진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라키엘이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입지.”
가르딘 경에게 옷가지를 건넸다. 옷가지의 정체를 알아본 경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이건…… 정복 아닙니까?”
“맞아. 내 것도 있어.”
가르딘 경은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황태자도 턱시도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암갈색 가발까지 썼다.
마치,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는 사람처럼.
“대체 데미안이라는 자를 만나러 어딜 가려 하시는 겁니까.”
“그런 데가 있어. 나쁜 곳.”
그게 대답의 끝이었다.
가르딘 경은 얼결에 황태자에게 이끌려 별궁을 나서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잘 아는 장소였다.
“여긴…… 소렌티노 가든이 아닙니까?”
“맞아.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10대 레스토랑 중의 하나. 경도 잘 알지?”
“예, 제가 여기 단골이기도 합니다.”
“잘됐군. 들어가지.”
대체 이 레스토랑에서 뭘 하겠다는 걸까. 아니, 이 레스토랑의 어디가 나쁜 곳이라는 걸까. 가르딘 경은 황태자를 따라 테이블에 착석했다. 평소 종종 즐겨 찾던 레스토랑이었다.
한데 황태자와 함께하니?
어쩐지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점원에게 주문하는 황태자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소스 없는 파스타, 피를 빼지 않은 등심, 원 없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 포도주를 곁들여서. 달이 뜨기 전까지. 가능한가?”
“……물론 가능합니다.”
“언제쯤?”
“지금 드시겠습니까?”
“그쪽이 대신 먹어줄 순 없겠지?”
“그럼 일어나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의 조심스러운 대답.
태연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황태자.
그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리듯 가르딘 경도 주섬주섬 일어섰다. 황태자 뒤를 황급히 졸졸졸 따라갔다.
“방금 주문, 대체 뭐였습니까?”
“은밀한 장소로의 입장 절차.”
“…….”
꿀꺽.
가르딘 경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뭔가 있다.
기분 탓이 아니다.
조금 전 황태자와 점원이 나눈 요상한 대화도. 그 대화 직후에 보인 점원의 조심스러운 태도도. 그리고 어딘가로 안내받고 있는 이 기이한 상황 또한.
‘이 레스토랑에…… 이런 게 있었어?’
은밀한 장소라니.
단골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전혀 몰랐다. 한데 황태자는 이걸 이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굴고 있었다. 아니, 사실 라키엘은 이 레스토랑의 비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행이다. 소설 내용 그대로야.’
점원을 따라 걸으며 라키엘은 내심 안도했다.
혹시나 소설과 실제가 다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소설에서 나오던 암호와 절차를 따르니 예상외로 프리패스였다.
그렇게 점원을 따라 레스토랑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점원들만 출입하는 문을 지나쳐 몇 개의 복도와 계단을 거쳤다. 그곳에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있었다.
두 번째 입장 절차가 이쪽을 맞이했다.
“이 안쪽은 우리 레스토랑만의 특제 소스가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죄송하지만 레시피의 공개는 절대로 불가능하고, 외부인의 출입 또한 금지되어 있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건장한 사내 다섯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을 향해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허어, 이런. 그럼 나랑 같이 고기 먹으러 갈까?”
“죄송합니다. 제가 채식주의자라서.”
“그럼 목장에 같이 풀 뜯으러 가는 건?”
“……통과.”
철컹, 묵직한 문이 열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펼쳐졌다. 그곳부터는 안내 없이 가르딘 경과 둘이서만 내려갔다. 벽에 걸려 일렁이는 횃불,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기이한 열기, 그리고 아스라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함성.
“이 아래는…… 뭐 하는 곳인 겁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가르딘 경의 물음.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이쪽도 조금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소설에서만 읽어봤지, 이렇게 직접 와본 건 처음이니까.
하지만 짐짓 태연한 척.
이곳을 잘 아는 척.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말했잖아. 나쁜 곳이라고.”
그 말과 함께 계단 아래쪽 끝의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드넓은 공간이 활짝 열렸다.
수많은 이들로 북적이는 공간의 중앙. 높다랗게 마련된 철창. 얼룩진 핏자국과 투쟁의 열기로 가득한 무대 위. 도박사들의 함성과 탄식이 한데 얽혀 들끓는 바로 그 검투장에. 한 자루 검을 송곳니처럼 품은 남자가 있었다.
바로 이쪽이 찾던 그 남자.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
지하 검투장의 폭군.
데미안 카이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