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데미안 카이엔 (2)
그곳에 그가 있었다.
피로 얼룩진 철창. 투쟁의 열기로 가득한 그 공간에. 한 자루 검을 송곳니처럼 품은 데미안이 있었다.
‘똑같다.’
소설에서 보던 일러스트와 똑같았다. 그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훤칠한 키와 균형 잡힌 체격도, 치렁한 검은 머리칼도, 굳게 다물린 입매도, 좌중을 쓸어보는 무감정한 눈빛도 모두.
‘다행히 검투가 시작되기 전이구나.’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철컹! 카르르륵!
철창이 크게 요동쳤다.
이윽고 반대편의 바닥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익…….
도박사들과 좌중이 숨을 죽인 가운데, 동굴처럼 비스듬하게 파인 지하 통로가 드러났다. 통로 안에서 정체불명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르륵……!
짐승?
아니었다.
일개 짐승이라면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으로 오싹 소름 돋는 느낌을 선사할 순 없으리라. 철창 너머 수많은 좌중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듯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침묵 속에서.
쿵, 쿠웅.
“……트, 트롤.”
누군가의 나직한 신음과 함께, 위압적인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약 3미터 정도. 철갑처럼 단단한 암회색 가죽 아래, 근육과 힘줄이 불끈거렸다. 길게 찢어진 입매 사이로는 누런 송곳니가 번들거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시뻘건 눈동자였다. 맹목적인 야성과 살기. 파괴적 광기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트롤이 포효했다.
- 쿼어어어억!
철창이 진동했다.
고막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다.
‘저런 거랑 싸운다고?’
검투장의 데미안.
소설로 이미 읽었던 장면이었다. 지금 이것과 비슷한 검투 경기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걸 소설로 접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엔, 연애를 인터넷으로 배우는 것과 진짜 해보는 것만큼의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장난 아니네.’
어떤 맹수도 이런 위압감을 사방에 뿌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트롤의 살기와 위용은 엄청났다.
실제로 덩치도 어마어마했다. 키는 충분히 3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 커다란 골격이 모조리 근육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히 마x 영화의 녹색 근육맨 헐x 같은 체형이랄까.
그때였다.
툭툭.
옆에서 누군가가 이쪽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가르딘 경이 있었다.
“저, 전하?”
가르딘 경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어왔다.
“저거, 뭡니까? 여기, 뭐 하는 곳입니까?”
“보면 알 거잖아.”
“그럼…… 저 불쌍한 사람을…….”
가르딘 경의 울먹이는 시선이 철창 속의 데미안을 향했다.
“저 사람의 트롤의 먹이로 던져주고 그걸 구경하는 곳이란 말입니까? 이게 대체, 무슨…….”
“…….”
아무래도 가르딘 경이 오해를 단단히 했나 보다. 하지만 라키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경이 불쌍하게 쳐다보는 쟤가 죽으면 소설도 여기서 끝났을걸.’이라는 따위의 말을 해줄 틈도 없었다. 트롤이 포효하며 돌진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쿼어어억!
쿵쿵쿵! 쿠쿵!
엄청나게 빠른 돌진이었다.
후와악-!
순식간에 5미터를 뛰어든 트롤이 기둥처럼 굵은 팔을 휘둘렀다. 그 끝에 데미안이 있었다.
콰우웅-!
트롤의 손톱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쇄도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움찔하는 반응조차 못 할 가공할 속도였다. 그러나 물론, 데미안은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스윽.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다.
단지 반 뼘.
상체를 뒤로 젖히며 고개를 트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트롤의 후려치기를 피해냈다. 고작 종이 한 장의 아슬아슬한 차이만을 남겨두고서.
- 쿼억?
트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격에 나약한 인간의 머리통을 뜯어내 버릴 줄 알았는데. 자신의 공격이 허공만 휘저었다는 사실에 트롤이 분노했다.
- 쿠워어어억!
그때부터였다.
트롤의 맹공이 쏟아졌다.
- 쿼어억! 쿼억!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때리고, 치고, 긁고, 후렸다. 올려치고, 휘젓고, 내리치고, 찍었다. 차고, 찌르고, 몰아치고, 또 몰아쳤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 한 걸음도, 서 있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이…… 저게 가능해?’
라키엘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어째서 데미안이 소설 속 동시대 인류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이때부터…… 떡잎부터 달랐구나.’
악마적 재능.
아니, 감히 재능이라 표현하는 것이 실례가 될 전투 능력. 그리고 그 재능과 능력을 여과 없이 살려주는, 가공할 감각까지.
가히 역사상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그랜드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에 비견되는, 악마의 재능이라 일컬어진 검술의 천재, 데미안 카이엔.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소설 속에서의 언급이었던가.
‘그래, 데미안은 17살에 처음 지하 검투장에 발을 들였지. 그리고 단 3개월 만에 기존의 검투사들을 모조리 꺾고 챔피언이 되었어.’
그야말로 무적.
가공할 무패의 행진이었다.
1년 정도의 시간 동안 무수한 도전자들이 그의 검에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었다. 그 후로는 도전자 자체가 씨가 말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덤벼봤자 요단강 프리패스 확정이니까.’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도박사들의 배당률도 무의미해졌다.
그때쯤부터였다.
‘데미안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게 됐지. 맹수, 고블린 무리, 혹은 오늘처럼 트롤까지. 온갖 흉악한 짐승이나 몬스터를 상대하게 됐어.’
심지어 그가 치르는 검투를 두고 벌어지는 도박 내용도 바뀌었다. 예를 들자면, ‘데미안이 트롤을 상대로 몇 군데의 상처를 입을 것인가’라는 식이었다.
그때였다.
- 쿠워억!
초조해진 트롤의 포효가 이쪽의 상념을 깨뜨렸다.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을 온몸으로 짓누르듯 달려드는 트롤이 보였다. 트롤이 거대한 덩치를 이용해서 데미안을 붙잡으려 두 팔을 뻗었다.
붙잡고 물어뜯으려는 걸까.
하지만 그 순간.
스핏.
그것은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다.
선명하고 서늘한 섬광이 데미안과 트롤 사이를 단 한 차례, 오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 ……쿠륵?
데미안을 붙잡으려던 트롤이 움찔. 기이한 소리를 내며 동작을 멈추었다. 불신과 불안이 반씩 섞인 눈빛을 떠올렸다. 그것이 트롤이 생전 마지막으로 보인 몸짓이 되었다.
투확-!
솟구치는 핏줄기.
트롤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 옆으로 깔끔하게 잘린 두 팔도 함께 허공을 날았다.
……쿠웅!
목과 두 팔을 잃은 트롤의 몸뚱이가 무릎을 꿇었다. 트롤 특유의 강력한 육체 재생?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느새 심장까지 깔끔하게 관통당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털썩…….
마침내 트롤의 거대한 육신이 허물어지듯 무너졌을 때, 장내의 그 누구도 환호하지 않았다. 아니, 환호할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 앞에 누군가는 쩍 벌린 입을 가리고, 또 누군가는 휘둥그레진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을 뿐.
함성은 두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솟구치는 피와 흥분.
열광의 도가니.
관객들의 살벌한 환호가 장내를 뒤덮었다. 도박사들의 엇갈린 희비가 갖가지 웃음과 외침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데미안은 철창 밖으로 퇴장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환호와 함성도.
그 어떤 욕설이나 찬양과 관심에도.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단지 쿨한 성격이라서?
‘그건 물론 아니지.’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이 시기의 데미안이 무엇에 시달렸는지, 무엇을 절실히 필요로 했는지, 자신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움직일 때였다.
“정신 단단히 챙기고 따라와.”
가르딘 경을 툭 쳤다.
“……헉? 예? 예!”
창백하게 질려 있던 가르딘 경이 황급히 뒤를 따라왔다. 라키엘은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걸었다. 그동안 수많은 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귓가를 푹푹 찔러왔다.
“하아. 오늘은 그래도 한 군데쯤은 다칠 줄 알았는데.”
“데미안 말입니까?”
“당연하지. 무려 트롤이 상대였잖나.”
“하긴. 사실은 저도 데미안이 두 군데 상처를 입는다에 배팅했습니다.”
“허허. 자네나 나나 오늘은 털렸구만.”
“그래도 상대가 트롤이라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지 말입니다.”
도박사들의 푸념이 들려왔다.
그걸 들으며 라키엘은 내심 웃었다.
‘저 사람들은 데미안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겠지.’
한낱 이런 지하 검투장에서 썩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훗날 이 세계를 전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인물이라는 사실도. 더 훗날엔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것이라는 미래 또한.
저들은 꿈에조차 모르고 있을 터다.
‘데미안은 댁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놈이라고.’
그걸 이쪽 혼자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뿌듯했다. 아무도 모르는 맛집을 혼자만 알고 있는 기분. 혹은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될 신인의 1호 팬이 된 느낌이 이럴까.
한데 그렇듯 혼자 뿌듯해하고 있던 도중, 뜻밖의 대화가 도박사들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 혹시 요즘 소문이 자자한 ‘황태자 패왕설’이라고, 들어봤나?”
“……푸읍!”
저도 모르게 뿜을 뻔했다.
라키엘은 시치미를 떼며 도박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렸다. 그들의 대화가 두런두런 이어졌다.
“황태자 패왕설이라니요? 금시초문입니다만.”
“쯧쯧. 자네는 소식이 이렇게 느려서야 도박사짓 해먹을 수나 있겠는가.”
“타박보다는 그 소식부터 좀 알려주시지요. 오늘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좋군. 황태자 패왕설이 뭐냐면…… 자네도 며칠 전에 로이-하비교에서 벌어진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의 대결을 구경했겠지?”
“예. 너무나 뜻밖의 결과로 끝난 대결이었지요.”
“그래, 인상적이었지. 특히 패배한 직후에 보였던 2황자 전하의 태도가 말일세.”
“2황자 전하의…… 태도라니요?”
“기절했잖나.”
“예.”
“그리고 황태자 전하가…… 기절한 2황자 전하의 발을 살짝 어루만졌을 뿐인데…… 2황자 전하가 비명을 질렀지. 자네도 보았을 텐데?”
“아, 예. 분명 그랬습니다.”
“그 뒤에 2황자 전하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기억하나?”
“……아.”
“기억하나 보군. 맞아. 벌떡 일어나더니 황태자 전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서 패배를 선언했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일세.”
“그, 그럼 설마…….”
“짐작했나 보군. 맞네. 잠깐 발을 어루만졌던 황태자 전하의…… 악력이 상상을 초월했던 걸세.”
“아, 역시.”
……역시는 무슨 역시!
라키엘은 당장 저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런 이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박사들의 쑥덕거림은 잘도 이어졌다.
“그 엄청난 악력에, 2황자 전하는 지옥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이지. 어쩌면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인지도 몰라. 이대로 더 계속 덤비다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그런 위기감을 느꼈기에 곧장 무릎을 꿇고 패배를 시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거, 일리가 있습니다. 그냥 패배가 아니었지요, 그건. 무려 황태자위를 포기하겠다는, 황제가 되는 길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그거지. 황제가 되기를 냉큼 포기할 만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악력을 지니신 것이야, 황태자 전하는.”
“허어. 항상 지병에 시달리는 비실비실한 모습이라는 평을 듣던 분인데 어찌 그런……. 혹시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까지 엄청난 힘을 숨기고 계셨다는 겁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지. 그 추론이 바로 황태자 패왕설의 핵심일세.”
……쯧. 그냥 가자.
어차피 바쁜 와중이다.
저런 헛소문이나 들어줄 시간은 없다.
라키엘은 발길을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다. 검투장 한쪽 구석의 복도로 다가갔다. 검투사들의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였다.
물론 그곳엔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가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쪽을 막으려는 그들에게 말없이 금덩이 하나씩을 쥐여주었다.
경비들이 굳은 눈길로 이쪽을 보았다. 감히 우리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건가? 라고 묻는 듯한 성난 눈빛.
……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 비싼 금덩이였다.
그렇게 프리패스로 복도에 진입했다.
‘복도 가장 안쪽.’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닿지 않는 끄트머리의 대기실. 그곳에 데미안이 있다.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리며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던 그와 만난다. 묘하게 가슴이 뛰는 가운데, 라키엘은 계획을 정리했다. 소설을 통해 읽고 기억하는 내용들을 되새겼다.
지금 이 순간 데미안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지금 데미안에게 가장 절실한 것. 그것을 이쪽이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데미안의 관심을 단번에 끌어내야 한다.
그걸 100퍼센트의 성공률로 해내자면…….
“실례합니다.”
끼이익.
거리낌 없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너머에 데미안 카이엔이 있었다.
얼굴에 튄 트롤의 피를 닦아내고 있던 걸까. 그가 얼굴을 덮은 수건 사이로 무심한 눈길을 던져 왔다.
누구냐고.
무슨 일이냐고.
하지만 그 눈빛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성큼성큼 걸었다.
날뛰려는 심장을 억눌렀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약병을 집었다. 그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썩소를 지어주었다. 정교한 계산으로 준비한 찰진 극딜성 멘트와 함께였다.
“쯧쯧. 안타깝네. 이런 싸구려 진통제를 왜 먹지? 이런 거 먹고 잠이 오나?”
“……뭐?”
데미안의 눈썹이 꿈틀. 그의 서늘한 눈동자에 희미한 빡침의 열기가 엇비쳤다.
라키엘은 내심 만족했다.
됐다.
이만하면 초면 치고 매우 상큼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