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지지면 낫는 질환 (1)
아프다.
피를 본 후에는 언제나 극심한 고통이 몰려온다.
이유는 모르겠다.
지금껏 내 검에 당한 이들의 원혼 때문에? 혹은, 휴식을 사치라 여기며 거듭했던 훈련의 후유증 때문에? 그도 아니라면, 이토록 애를 쓰며 싸우고 있음에도 여전히 밑바닥만 보이는 돈주머니 때문에?
다만 확실한 것은, 이 고통이 몰려올 때는 반드시 약이 필요하단 사실이다. 누군가는 진통제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몹쓸 마약이라 부르는 저것.
‘그런데 왜 저걸…….’
난데없이 대기실에 들어온, 처음 보는 놈이 들고 있는 걸까. 게다가 왜 저놈은 내 약을 살펴보며 헛소리를 내뱉는 걸까.
“쯧쯧. 안타깝네. 이런 싸구려 진통제를 왜 먹지? 이런 거 먹고 잠이 오나?”
“……뭐?”
데미안 카이엔은 벙찌는 기분을 느꼈다.
낯선 놈이다.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걸까.
검투장 관계자?
아닌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리비리한 놈이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냐, 넌.”
데미안의 눈길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쪽이 필요로 할 사람.”
“혹시 약 팔러 온 놈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검투사들은 대부분 통증을 달고 산다. 진통제 또한 달고 살기 일쑤다. 그렇기에 가끔 이런 놈들이 있었다. 검투사들을 상대로 좋은 약이 있다며 사기를 치려는 부류였다.
과연, 눈앞의 미친놈도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어, 비슷해. 촉이 나쁘진 않은데.”
역시나다.
데미안은 흥미를 잃었다.
이런 놈들이라면 이미 지긋지긋하게 겪었으니까. 더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손목 잘라 버리기 전에 약병 내려놓고 꺼져. 이미 약이라면…….”
“충분히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 이런 싸구려 약으로 만족이 되는 건가? 정말로?”
“지금 무슨 헛소…….”
“리가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온 건데.”
“죽인다.”
“그러면 뒤통수 찌릿찌릿한 고통, 평생 못 없앨 거야.”
“…….”
“보통 증상은 후두부에서 시작되지. 뒷목과 뒤통수가 굳으면서 저릿저릿. 방사통이 뒤통수 전체와 어깨까지 번지지 않나?”
“…….”
“심할 때는 관자놀이를 거쳐서 이마, 눈 어름까지 통증이 번지지. 그럴 때면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마구 흘러. 눈알이 빠져나올 듯이 아프지. 웃긴 건, 그 통증이 파도처럼 몰아쳤다가 잠잠해지길 반복한다는 점이야. 그게 또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든. 이젠 끝났나 싶은 희망고문이 계속 이어지는 지옥이라고나 할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라키엘이 빙긋 웃었다.
어떻게 알긴.
소설을 읽었으니까 알지.
‘그래서 방금 마검황에서 증상을 표현하던 지문 거의 그대로를 읊어준 거고.’
그랬더니?
시종일관 까칠하던 데미안이 처음으로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매우 바람직한(?) 대화의 진척이었다.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더욱 뻔뻔해져야 한다.
라키엘은 얼굴 가득 삼중 엠보싱 철판을 깔았다.
“그런 증상, 뻔해. 외상, 어혈, 신허가 뒷목을 지나는 경맥 순환에 장애를 일으키는 거거든, 그거.”
“…….”
“그런데 통증의 원인을 제거할 생각은 안 하고. 이런 마약성 진통제에만 의존하니까 그 모양으로 계속 아픈 거지. 진통제가 약인가? 아니지. 절대로 아니거든.”
“…….”
“항상 이래. 댁 같은 사람들이 은근 있다니까.”
라키엘은 진심으로 배어나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아픈데 진통제만 찾는 어리석음. 데미안만 탓할 일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봤다.
우리네 아버님들, 어머님들, 참 끈질기고 근면하신데 안타까웠다.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일만 하면서 어디 아프면 진통제만 찾기 일쑤였다. 큰 병원 가면 돈 든다면서 진통제만 찾고, 파스만 붙이며 버티시다가 오히려 병을 키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바닥에 국물을 온통 쏟았는데 이불만 덮어두면 끝인가? 아니지. 아픈데 그걸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이런 마약성 진통제 따위에나 의존하면 고생길만 늘어나는 거지. 안 그런가?”
“…….”
“입이 있으면 대답을 좀 해보라고 이 안타깝고 멍청한 사람아.”
“…….”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아니, 발끈할 뻔했다. 심히 억울했다. 자신은 그저 평소처럼 있었을 뿐인데. 트롤 한 마리 잡고서 쉬고 있었을 뿐인 건데. 평소처럼 검투 후의 통증이 올 것 같아서 슬슬 약을 먹을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런데 웬 듣도 보도 못한, 생판 모르는 놈이 대기실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자신을 무려 혼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놈한테 훈계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데미안은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퐁퐁 치솟는 의구심과 황당함, 억울함을 한껏 야무지게 버무려 딱 한마디의 의문사로 내놓았다.
“……그런 말을 하는 너는 대체 누구지?”
대체 누구기에.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거냐고.
이번에도 어물쩍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베어 버리리라. 데미안은 다짐하며 검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이내 미친놈이 대답했다.
“황태자.”
“…….”
“진짠데.”
“…….”
아무래도 죽여야겠다.
검 손잡이를 쥔 데미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다행히 미친놈이 빙그레 웃었다.
“농담이고. 사실은 쿠스만 씨가 보낸 사람.”
“쿠스만?”
“그래. 그쪽 프로모터.”
“…….”
“이젠 좀 믿음이 생기겠지.”
“…….”
검자루를 쥔 데미안의 손아귀가 살짝 풀렸다. 라키엘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유, 다행히 통했구나.’
쿠스만.
그건 데미안의 프로모터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이곳 검투장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프로모터가 있어야 검투장이 돌아가니까.’
쉽게 말하자면 프로모터는 지하 검투장의 중개인이었다. 부동산 업자가 임차인과 임대인을 연결해주듯, 출판사 매니지먼트가 작가와 연재 플랫폼을 연결해주듯, 프로모터는 검투사와 검투장을 연결해주고, 시합 일정을 조율했다.
그 대신 검투사가 받는 대전료의 30%를 수수료로 받았다. 그 외에도 프로모터는 검투사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훈련 장소와 각종 편의 또한 유상으로 제공했다.
‘그게 문제인 거지. 프로모터가 부동산업자나 출판사와 다르게 악랄한 점은, 유상으로 제공하는 편의사항에 마약성 진통제가 있다는 거거든.’
마약성 진통제.
그게 제일 문제였다.
검투사는 언제나 진통제를 필요로 했다. 프로모터는 독점 공급이라는 구실을 통해 마약성 진통제를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곤 했다.
‘덕분에 대부분의 검투사들은 아무리 싸워도 돈을 저축하질 못하지. 비싼 마약성 진통제를 사느라고 수입의 대부분을 탕진해 버려. 아니, 빚을 지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한 형편이 대다수랄까.’
싸움은 검투사가 하고.
피도 검투사가 흘리고.
돈은 전부 프로모터가 꿀꺽.
하지만 그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는 검투사는 없었다. 자신을 얽어맨 부조리를 알아차릴 무렵엔? 이미 마약성 진통제 중독자가 된 상황인 까닭이었다.
라키엘은 기억을 더욱 상세하게 되짚었다. 특히 소설 마검황 속 데미안의 전속 프로모터 쿠스만이 나오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 속의 대사들, 지문들.
데미안이 겪었던 상황들.
그 모든 정보를 떠올리고, 조합했다. 이리저리 뒤섞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가공했다. 준비운동이 끝난 혓바닥 위에 야물딱지게 촵촵 장전했다.
그리고 발사했다.
“아까 쿠스만 씨가 그러던데. 그쪽이 불평을 했다고. 요즘 이 약, 잘 안 들기 시작했다며.”
“…….”
“그래서 쿠스만 씨도 골치를 썩는 것 같더라고. 관리하고 있는 다른 검투사들에게도 공급해야 하는 진통제라서 수량을 더 빼기가 빠듯하다고. 계절이 계절이라 양귀비 수확철도 아니고 여유분을 빼돌리기도 어렵다고. 댁도 쿠스만 씨한테 들어서 알고 있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런 진통제 말고도 그쪽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이 있다는 거지.”
“새로운 방법? 댁이 해줄 수 있는 건가?”
“그러니까 내가 왔지.”
“쿠스만 씨가 보냈다고? 정말로?”
“어.”
“비용은?”
“나중에 쿠스만 씨 만나서 따로 얘기해. 내 몫의 보수는 이미 받았으니까.”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로 데미안의 프로모터 쿠스만이 보낸 것처럼 굴었다. 그런 라키엘을 쳐다보는 데미안의 눈초리가 깊어졌다.
“…….”
뭔가 이상하다.
말하는 투도 그렇고, 이쪽 바닥 사람 같지가 않다. 한데 더 이상한 점은, 자신과 프로모터 쿠스만의 관계를 저놈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쿠스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계약을 맺은 검투사나 검투장 핵심 관계자 외엔 없을 텐데.’
한데 태연히 쿠스만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저놈은 그것도 모자라 자신과 쿠스만 사이에 있었던 일들까지 언급했다.
문득, 며칠 전의 저녁이 떠올랐다. 검투장에서 고블린 스무 마리를 베어 넘긴 밤이었다. 쿠스만에게 더 많은 진통제를 요구했다.
요즘 약 기운이 잘 듣질 않는다고.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한데 쿠스만이 난색을 표했다.
요즘 물량을 따로 빼기가 곤란하다고. 관리하는 다른 검투사들 몫도 간당간당하다고. 계절이 계절이라 양귀비 수확철도 아니고 여유분을 빼돌리기도 어렵다고.
‘한데 그 말을…… 저놈이 정확하게 읊었다.’
그 의미는 자명했다.
저놈이 진짜로 쿠스만이 보낸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로소 데미안은 검자루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럼 하나 묻지. 진통제가 아닌 새로운 약을 가져온 건가?”
“아니.”
라키엘이 빙긋 웃었다.
넘어왔다. 나름 야심 차게 준비한 야바위가 통하고 있다. 그 확신을 담고서 말했다.
“그쪽이 겪고 있는 통증은 약으로는 안 돼. 말했잖아.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원인이라……. 그걸 제거하면 통증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건가?”
“어.”
“너무 쉽게 장담하는 것 같은데.”
“장담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든가.”
“대체 어떤 방법이기에?”
데미안이 물었다.
라키엘의 빙글거리는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일단 상의 벗고 엎드려.”
“……뭐?”
“진료받아야지. 안 죽어. 혹시 무섭나?”
“물론 그건…….”
“그럼 일단 벗으라니까.”
“…….”
데미안이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냈다. 녀석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상의 셔츠를 벗었다. 날렵하면서도 탄탄하게 발달한 근육질 상체가 드러났다.
지하 검투장에서 얼마나 굴렀던 걸까. 온통 상처투성이 몸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의 시선은 데미안의 근육이나 상처 자국을 향해 있지 않았다. 대신 데미안의 왼쪽 등을 주목했다. 그곳에 선명한 낙인이 있었다.
검투장에서 새긴 낙인.
검투사의 표식이었다.
‘역시 있구나.’
소설 일러스트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저 낙인이 원인이다.
저게 바로 소설 마검황의 초반에 데미안을 그토록 괴롭혔던 지옥 같은 통증의 원인이었다. 그가 시달렸던 후두신경통은 그저 결과로 나타나는 병증이었을 뿐. 라키엘은 재빨리 표정과 눈빛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뭘 멀뚱히 있어. 침상에 엎드려. 편안하게 힘 빼고. 그래야 치료 시작할 수 있으니까.”
“……혹시 마사지 따위라도 하려는 건가.”
“그건 아니고.”
“그럼?”
엎드리며 의구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 데미안. 라키엘은 그 시선을 받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데미안의 등에 새겨진 낙인.
저걸 제거해야 한다.
한데 저 낙인은 그냥은 안 지워진다. 칼로 베어도, 가죽을 벗겨 내도 소용없다. 저 안에 저주가 깃들어 있으니까.
그 저주를 걷어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뜨거운 열로 새긴 거라서, 똑같이 열로 지져야 하거든, 저런 건.’
라키엘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주먹 절반 크기로 버무려진 정체불명의 암녹색 덩어리. 그걸 내보이며, 침상을 손바닥으로 팡팡 치며, 라키엘이 상큼하게 웃었다.
“어서 와, 쑥뜸은 처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