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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25화 (25/468)

25화. 참교육 (1)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돌팔이인 줄로만 알았다. 혹은 입담이 더러운 야매 의사인 줄 알았다. 그저 프로모터인 쿠스만이 면피용으로 보낸 사람일 거라고 보았다.

진통제를 공급해주지 못하니까. 이쪽의 불만이 커질까 상황을 수습하려고. 그저 ‘이렇게 너에게 신경을 쓰고, 성의를 보이고 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 보낸,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뜸인지 뭔지, 효과가 없으면 제대로 뜨거운 맛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두 팔을 부러뜨려 버리리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더랬다.

한데 뜸을 다 받고 보니?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통증이 사라졌다. 지긋지긋하던 후두부의 고통이 정말로 없어졌다. 이런 상쾌하고 맑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신, 돌팔이는 아니었군요.”

데미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라키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하지. 사람을 뭘로 보고.”

라키엘은 내심 안도했다.

데미안의 표정이 아까와 달라졌다. 이쪽을 보는 눈빛도 180도 바뀌었다.

‘10년 만에 대기업 면접 통과한 사람 같은 표정이네.’

아마도 쑥뜸이 제대로 효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쑥뜸의 열기가 낙인을 제대로 훼손한 것이겠지만.

‘사실 오늘 해준 쑥뜸은 그저 수단이었을 뿐이지. 진짜 목적은 뜨거운 열기로 낙인을 지져서 그 형체를 훼손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오늘 치료의 비결이었다.

화상을 입혀서 낙인의 모양을 뭉개는 것. 열기로 낙인 속에 마법진의 형태로 깃든 저주를 파괴하는 것. 그 의도가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물론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데미안의 등에 새겨진 낙인은 컸다. 거의 활짝 펼친 손바닥 크기만 했다. 한데 쑥뜸은 지름이 고작 3센티에 불과했다.

그러니 앞으로 최소 열 번은 넘게 뜸으로 지져야 한다. 그래야 저 낙인을 완전히 훼손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라키엘이 말했다.

“그나저나, 아프던 곳은 어때?”

“괜찮군요. 말끔하고 상쾌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흠, 그래도 아직 완치된 건 아니야. 앞으로 몇 번은 더 치료받아야 해.”

“그렇습니까.”

“어. 뜸 받은 자리에 물집이 생길 거야. 그거 터뜨리지 마. 등짝이라 잘 때는 좀 따갑고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물집이 가라앉을 때까진 무리하거나 너무 기름진 건 먹지 말고.”

“무리하지 말라니요?”

“과격한 육체 활동을 자제하란 거지.”

“하면 검투는…….”

“안 해도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되도록 해줄게.”

정말이다.

진심이다.

곧, 그렇게 될 거다.

물론 이쪽의 계획을 모르는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합이 잡히지 않도록 일정을 조율해주겠단 겁니까?”

“뭐, 대강은.”

“제 프로모터인 쿠스만 씨가 그것까지 허락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데미안이 감탄한 기색을 보였다.

그가 진심 어린 눈초리로 물어왔다.

“하면, 당신은 누굽니까. 부디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아까 말했잖아, 황태자라고.”

“……네?”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

“쩝. 진짠데.”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데미안이 다 이해한다는 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이름을 숨길 사정이 거겠지요.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혼자 뭐래는 거야.”

“지금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다음에 또 만날 때, 그때라도 이름을 알려달라는 뜻입니다.”

“벌써 알려줬는데.”

“그거 말고 진짜 이름 말입니다.”

“쯧, 은근 대놓고 답정너네.”

“예?”

“됐고. 어쨌거나.”

라키엘은 데미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웃음기를 지우고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바로 듣고 꼭 지켜. 오늘 밤, 이곳 검투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도망치거나 잠적하지 말고 여기 잠자코 있어. 그래야 안전할 거야.”

“……무슨 말입니까.”

“의문도 품지 마. 그냥 여기 있어. 그러면 조만간 나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내 진짜 이름도 알 수 있을 거고. 방금 받은 치료도 계속 받을 수 있겠지.”

“뭔가……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겁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 방에만 잠자코 있으면 돼.”

“만약 제가 그 말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쑥뜸 치료도 끝이겠지. 지금 잠깐 사라진 고통이 다시 몰려올 거고. 평생 그 고통에서 못 벗어나게 될 거야.”

“정말입니까?”

“내 모든 걸 걸고 사실임을 맹세하지.”

진심으로 말했다.

데미안이 이쪽의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당신, 아무래도 단순히 쿠스만 씨의 명령만 받고 온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뭐, 대강은.”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성공!’

다행히 계획의 가장 중요한 퍼즐이 성공적으로 맞춰졌다. 방금 데미안에게 해주었던 당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도망치지 말라고. 잠적하지도 말고 얌전히 있어달라고.

그 당부를 하는 것이 오늘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실은 그 당부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직접 왔다. 위험을 감수하고 데미안을 만났고, 쑥뜸 치료를 해주었다. 그렇게 데미안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얻었다.

‘그래야 오늘 밤의 계획이 성공리에 진행됐을 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전부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자신이 품고 있는 계획. 진료비 청구 스킬을 얻은 직후에 그렸던 큰 그림. 그걸 통해 일방적인 이득을 얻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은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됐다. 이제 다음 단계로.’

라키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미안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곤 쿨하게 대기실을 떠났다.

“저기, 전하?”

대기실을 나서자마자 가르딘 경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입을 꾹 닫고 눈치만 보았던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속사포 같은 질문을 퍼부어 왔다.

“전하? 방금 생살을 지지던 치료법, 그건 뭐였습니까? 게다가 어째서 저자를 찾아가 거짓말까지 섞어가며 치료를 해준 건지……. 여긴 안전한 곳도, 합법적인 장소도 아닌 듯한데…… 저는 오늘 밤의 이 상황을 도통 모르겠습니다.”

“음, 그럴 거야. 그럴 수밖에 없을 거고.”

“……예?”

“조금 있으면 자연히 다 알게 될 거라서. 일단 지금은 할 일부터. 날 좀 도와줘.”

“어떻게 말입니까?”

“검정색 말총머리를 한 남자가 있는지 살펴봐. 제법 큰 덩치에 가늘게 찢어진 눈매를 지니고 있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가르딘 경은 황태자의 말을 따랐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의문을 되삼켜야 했다. 오늘 밤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황태자의 태도였다. 분명 평생을 황궁에서만 살아왔을 텐데. 그마저도 그 시간의 절반은 병상에 누워서 지내왔을 텐데. 당연히 이런 불법적인 지하 검투장 같은 곳과는 일말의 인연조차 없을 텐데.

‘그런데…… 마치 이곳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게 이상했다.

조금은 미심쩍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은 의문이고, 지시는 지시였다. 가르딘 경은 황태자가 말해준 인상착의를 염두에 두며 검투장을 훑어보았다.

철창 속 싸움을 구경하기 좋도록 배치된 테이블들. 누군가는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누군가는 담배 연기를 뿜어대고. 또 어떤 이는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테이블을 홀로 독차지하고 있는 어떤 사내가 보였다.

“저기, 전하? 찾은 것 같습니다.”

“어디?”

“저쪽…….”

가르딘 경은 티 나지 않도록 사내가 앉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라키엘의 눈동자가 그쪽을 향했다.

“흐음.”

아무래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소설 마검황에 있던 수많은 일러스트. 그중에 딱 한 장, 데미안과 쿠스만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 일러스트가 있었다. 그 일러스트의 모습이 저 말총머리 사내의 외모와 거의 흡사했다.

‘하지만 확신하기는 이르지.’

일단은 확인부터.

라키엘은 성큼 움직였다. 놀라는 가르딘 경을 뒤에 두고 말총머리 사내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내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태연히 앉았다.

“…….”

말총머리 사내의 서늘한 눈길이 날아왔다. 그 눈길을 마주하자 소름이 오싹 돋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곳은 눈이 많은 장소였다. 다짜고짜 공격받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사실을 마음속 보험으로 삼았다.

사내에게 물었다.

“쿠스만 씨?”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

“그럼 데미안은 알겠군요. 하나 물어봅시다. 내가 데미안 카이엔을 사고 싶은데.”

“…….”

“그가 댁한테 빚진 진통제 약값, 거기에 계약파기금, 전부 더해서 얼마를 주면 될까 해서.”

“9백억 마젠.”

“…….”

“그 이하로는 턱도 없지.”

“9백억이면 그쪽이 평생 벌 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일 텐데. 진심인가?”

“안 낼 거면 꺼지시고.”

“…….”

이쪽을 노려보는 쿠스만의 눈빛.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목적을 이루었다.

이 자가 쿠스만이 맞다.

확인을 마친 라키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르딘과 함께 지하 검투장을 떠났다.

그동안 쿠스만의 눈길은 라키엘의 뒷모습을 줄곧 쏘아보았다. 이내 라키엘의 모습이 출구 밖으로 사라진 직후.

“저놈, 이곳에선 처음 보는 놈인데.”

쿠스만이 중얼거렸다. 손을 까딱, 움직였다. 옆 테이블에 있던 그의 수하가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음. 방금 내게 수작질을 걸던 비쩍 마른 놈, 뒤를 캐봐.”

“어디까지 캐면 되겠습니까.”

“뭐 하는 놈인지. 혹여 검투장에 고용된 몰이꾼인지. 아니면 다른 프로모터에게 붙어먹은 놈인지. 여차하면 고문을 해도 좋다.”

“그 후에는 어떻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잘게 쪼개서 강물에 버려.”

“알겠습니다.”

수하가 자리를 떴다.

그때부터였다.

쿠스만은 라키엘에 대한 신경을 완전히 껐다. 자신이 보낸 수하는 그만큼 유능한 자였으니까. 한번 찍은 대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납치하는 자였으니까. 그 후엔 실로 예술에 이른 경지의 고문기술을 선보이며 모든 정보를 캐내는 자였으니까.

‘사흘? 이르면 이틀 안엔 알 수 있겠지.’

건방지게 수작질을 걸던 놈.

누구의 똘마니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수하에게 찍혔으니 이미 죽은 목숨이라 보아야 할 터였다.

‘그보다는, 흐음. 데미안, 그놈을 어떻게 굴려먹어야 더 돈이 될까.’

요즘 마약성 진통제 공급이 들쑥날쑥해졌다. 참으로 골치였다.

‘차라리 검투사 숫자를 줄여야 하나. 실력 없는 몇 놈은 못 이길 경기에 내보내야겠군. 그러면 약을 필요로 하는 입이 줄어들 테고. 남는 약은 데미안한테 팔면 되겠지. 놈은 대전료를 많이 받으니까. 그만큼 약값으로 더 많이 뜯어낼 수 있겠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훌륭한 계산이다. 쿠스만은 흐뭇한 기분으로 술잔을 들었다. 기울였다.

그때였다.

콰앙-!

갑작스러운 굉음.

검투장 출입문이 박살 났다.

실내의 소음 유출을 막기 위해 특별히 세 겹으로 두껍게 만들어진 출입문이었다. 한데 그런 튼튼한 문이, 마치 폭발이라도 하듯 흔적도 남지 않았다.

검투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스만도 예외가 아니었다.

‘뭐지?’

그는 긴장된 눈초리로 출입문이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조금씩, 자욱한 먼지 사이로 흐릿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내의 실루엣이었다.

특히, 쿠스만에게 어쩐지 익숙한.

“……끄으…… 윽…….”

자욱한 먼지 속에서 한 발짝, 두 발짝. 비틀비틀 걸어나온 피투성이 사내가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쿠스만은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다.

저 피투성이 사내가 바로…….

“델릭?”

방금 내보낸 자신의 수하였다.

대체 어째서? 왜? 저놈이 저런 꼴이 된 걸까. 누가 저런 짓을 한 걸까.

그때였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이름으로 명한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고요해진 검투장에 울려 퍼진 낭랑한 목소리.

이윽고 흙먼지가 걷혔다.

중장갑 병력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

그것은 마젠타노 황가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즉, 저들의 정체는…….

‘황실 근위대?’

쿠스만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저들이 어째서 여기에?

소름 돋는 의문과 경악이 치미는 순간. 중장갑 병력 사이에서 비리비리한 은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은발의 사내, 라키엘의 입에서 항거불능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부 밀어 버려.”

스릉!

근위대가 검을 뽑았다.

라키엘이 쿠스만을 딱 가리켰다.

“특히. 저놈은 절대로 놓치지 말고.”

“……!”

쿠스만의 심장이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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