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참교육 (2)
스릉!
근위대가 검을 뽑았다.
지하 검투장에 모여 있던 도박사들. 몇몇 프로모터와 검투장을 소유한 조직원들. 그 밖의 수많은 이들이 어찌 반응도 해보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원! 현장에 있는 모든 자를 체포하고, 저항하는 자는 즉결처단하라!”
지휘관의 단호한 외침.
철컥거리는 갑옷 소리.
150인의 근위대가 전진했다.
타협 없는 토벌이 시작되었다.
테이블이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넘어지고, 뛰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근위대원들의 눈과 귀는 그들보다 앞서 있었다. 뽑아든 검에는 자비가 없었고, 발길질과 노호성은 철벽같았다.
수많은 이들이 제압되어 체포되었다. 빈틈없는 진압작전 앞에 도박사, 프로모터, 조직원들 모두가 한낱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대체 왜, 지금껏 은밀하게 잘 운영되던 지하 검투장에 무려 근위대가 들이닥친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알 방법도 없었다.
‘당연하지. 댁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순조롭게 진행되는 진압작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문득, 아까 별궁에서 출발하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인 오후였던가.
‘오늘 밤, 별궁에 배치된 근위대 전병력을 동원해야겠어.’
‘예?’
눈을 휘둥그레 뜨던 별궁 근위대 지휘관. 이내 그가 안색을 살짝 굳혔던가.
‘전하, 이곳에 배치된 근위대의 임무는 황명에 의해 별궁을 경비하여 전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병처럼 아무 곳에나 동원될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이 내 지시일지라도?’
‘송구하오나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오늘 밤에 내 지시대로 움직여야겠네.’
‘예?’
‘날 지켜줄 일이 생길 거거든.’
그 이상의 자세한 이유나 목적은 말해주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만 일러두었다.
지휘관은 여전히 의아해했지만 결국, 이쪽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쪽이 가르딘 경과 함께 별궁을 나설 때부터 멀찍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지하검투장이 있는 레스토랑 인근을 은밀히 봉쇄했다.
덕분에 이쪽의 예언(?)도 사실이 되었다.
‘프로모터 쿠스만. 역시나 그 인간이 나한테 미행을 붙여준 덕분이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은 예상했던 바였다. 소설 마검황의 프로모터 쿠스만이 항상 그런 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의심이 가는 사람,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은 상대가 생기면 바로 미행을 붙였지. 납치와 고문에 능한 심복을 활용했어. 그렇게 상대의 약점을 잡거나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자신의 위치를 지켰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일부러 쿠스만과 접촉했다.
데미안을 사겠다고.
얼마면 되겠냐고.
상대가 응할 리 없는 거래를 제안하며 확인을 겸하여 이쪽의 존재를 노출했다.
그랬더니 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미행이 즉각적으로 따라붙었다. 덕분에 그걸 본 근위대 지휘관은…….
‘극대노했지.’
감히 황족, 그것도 황태자를 미행했다. 심지어 놈은 수중에 흉기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 결말은 뻔했다.
이쪽에게 접근하자마자 근위대에게 제압되었다. 근위대장은 미행으로 붙었던 쿠스만의 심복에게 다음과 같은 죄명을 선물했다.
‘황족 시해 미수.’
그걸로 끝이었다.
이쪽이 따로 시킬 필요도 없었다.
뚜껑이 제대로 열린 지휘관이 근위대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레스토랑을 전면 봉쇄하고, 지하 검투장으로 향하는 통로를 장악했다. 숨 쉴 틈도 없이 진격했다.
그리고 지금, 검투장의 모든 이를 무차별로 체포하고 일망타진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후우, 장난 아니네.’
라키엘은 근위대의 토벌작전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과연 정예 중의 정예구나 싶었다. 전경으로 근무했던 경험 덕분에 그런 부분이 더욱 잘 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흐뭇해졌다.
오늘, 이렇게 지하 조직을 상대로 정의구현을 해서? 혹은, 검투사들의 피를 빨아먹던 놈들을 혼내줘서?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정의구현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예전부터, 한국에서부터도 그랬다. 나 하나 먹고 살기에도 바빴다. 부모님 없이 대학을 다녀야 했다. 해보지 않은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 와중에 공부까지 해냈다.
말 그대로 바득바득 기어 올라오며 살아온 삶이었다. 남을 살갑게 챙겨줄 여유 같은 건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목숨이 몇 달 남지 않은 자신이었다. 그걸 늘리기에도 빠듯한 처지였다. 한데 정의구현이니 뭐니 따위에 시간 낭비할 틈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흐뭇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단 하나.
‘이제 됐어. 이걸로 거의 다 됐다. 나한테 보너스 수명을 듬뿍 안겨줄 알짜배기 환자들을 풀코스 종합선물세트로 확보할 수 있게 된 거야.’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대로 순조롭게 진행만 된다면.
자신만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안심하지 않았다.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봐, 다들.”
그는 근접해서 자신을 호위하던 근위대원 셋을 불렀다.
“따라와.”
근위대원들을 이끌고 검투장 안쪽, 으슥한 통로로 들어갔다. 오늘 밤, 반드시 잡아야 할 놈이 저곳에 있을 테니까.
♣
“……헉! 허억!”
가쁘게 내뱉는 호흡.
쿠스만은 숨 가쁘게 뛰고 있었다. 온몸에서 땀을 비처럼 흘렸다. 한편으로 내심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런 징조도, 징후도 없었다. 한데 이렇듯 근위대가 들이닥쳤다. 전혀 상상해본 적도, 예상한 바도 없던 일이었다.
‘어떻게 그놈이?’
아까 자신을 향해 건방진 거래를 제안했던 놈이 떠올랐다.
데미안을 사겠다고.
얼마면 되겠느냐고.
시건방을 떨던 꼬락서니가 어찌나 가당찮던지. 바로 미행을 붙여주었다. 아마 다른 조직의 끄나풀이겠거니. 이쪽의 반응을 떠보려는 미끼겠거니. 그렇게만 여겼었다.
그래서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
납치하여 고문하고, 처참하게 죽여서, 고깃덩이처럼 토막 낸 놈의 시체를 강물에 뿌리려 했다. 그놈을 보낸 배후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싶었다.
한데 지금 보니?
‘어떻게…… 그놈이 황태자일 수가 있는 거지?’
믿기지가 않았다.
처음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데 그놈을 따르는 근위대가 진짜였다.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왜? 황태자가 왜 데미안을 사겠다는 거지? 나한테 왜? 어째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토벌작전은 너무나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저 뒤편에서 근위대원들이 자비도 없이 움직여댔다. 도망치려던 누군가는 강철 건틀렛을 낀 주먹에 맞아 턱이 박살 났다. 저항하던 누군가는 단숨에 손목이 부러졌다.
그 비명이 소름을 쭉 일으켰다.
‘잡히면…… 끝장이다!’
다행히 그는 몸놀림이 매우 빨랐다. 또한, 이곳 지하 검투장의 구조에 누구보다도 밝았다.
그는 주위의 모든 지형지물을 활용했다. 넘어진 테이블, 조명이 꺼지며 생겨난 그림자, 철창이 세워진 무투대, 때론 도망치는 누군가의 실루엣까지 철저하게 이용했다.
덕분에 근위대원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검투장의 메인홀을 빠져나왔다.
으슥한 통로를 통해 주류 저장고로 뛰었다. 그곳에 그를 구원해줄 비밀통로가 있었다.
‘훅, 허억, 조금만 더!’
그곳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제아무리 근위대라도 그 통로는 모를 것이다. 애초에 검투장을 운영하는 조직의 핵심 간부, 그리고 몇몇 프로모터만 아는 탈출로니까.
‘됐다! 다 왔어!’
조금씩 희망의 빛이 보였다.
쿠스만은 더욱 힘껏 뛰었다.
주류 저장고의 문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한껏 걸렸다. 그리고 저장고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어?”
그의 미소에 쩌적, 금이 갔다.
“무, 무슨?”
그가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스릉!
검 세 자루가 그를 겨누었다.
쿠스만이 뒷걸음질쳤다.
검을 겨눈 이들도 그만큼 전진했다. 열린 창고 문을 통해 스며 들어간 희미한 빛이 검을 쥔 이들을 비추었다.
쿠스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근위대원? 이놈들이 여기에 어떻게?’
미리 와 있던 걸까.
마치, 이쪽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때였다.
“역시 여기로 올 줄 알았지. 뻔해. 안 그런가?”
“……!”
창고의 어둠 속에서 네 번째 인물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쿠스만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아까 자신에게 거래하자며 도발을 했던 놈. 한데 사실은 황태자였던 놈.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지? 어째서 내가 여기서 댁을 기다린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지?”
“…….”
쿠스만은 할 말을 잃었다.
라키엘의 미소가 흐뭇하게 변했다.
‘혼란스럽겠지.’
쿠스만은 이쪽이 소설 마검황을 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에 이쪽이 소설을 통해 이 통로의 존재를 알았다는 사실 또한 모른다.
‘원작에서 황태자 라키엘이 죽고 난 이후, 이곳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지.’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지하 검투장에 불이 났다. 2황자의 지하조직 토벌 작전 때문이었다. 그 사건 덕분에 데미안이 자유를 얻었다. 화재의 혼란을 틈타 이 통로를 이용해 도망쳤다.
그 와중에 등에 큰 화상을 입었다. 공교롭게도 낙인이 새겨진 자리였다. 덕분에 낙인의 저주까지 깨졌다.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이었다.
라키엘은 소설 속 전개를 기억의 서랍 한구석에 접어 넣었다. 그리고 쿠스만을 향해 말했다.
“내가 어째서 여기 있는지는 그쪽이 알 바 아니고. 어쨌건 실망이야.”
“…….”
“사실 난 약값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뭐?”
“약값 말이다. 약값. 세상에 다른 건 몰라도 약값 떼먹는 건 정말로 싫어서. 남이 나한테 그러는 것도 싫은 만큼, 내가 남한테 그러는 것도 싫어서.”
“그게 무슨…….”
“그래서 아까 내가 물어본 거였거든. 데미안 앞으로 달린 진통제 약값, 얼마나 쌓였느냐고. 얼마를 치르면 되겠느냐고. 기억 안 나나?”
“…….”
“어쨌건, 난 호의로 거래를 제안했던 거다. 알겠어? 그 호의를 걷어찬 건 그쪽이고.”
“무슨…… 헛소리냐!”
쿠스만은 발끈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적거리다간 다른 근위대원들까지 몰려올 것이다. 판단을 내린 쿠스만은 허리춤의 단검 두 자루를 뽑았다. 근위대원 셋을 향해 재빠르게 돌진했다.
그리고 한 방에 털렸다.
콰작!
“……!”
근위대원의 건틀렛 주먹이 쿠스만의 코를 뭉갰다. 쿠스만의 단검은 근위대원에게 닿지도 못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커억!”
콰당탕!
쿠스만이 피투성이 얼굴로 쓰러졌다. 근위대원 둘이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 끄흐으!”
쿠스만이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하지만 좀처럼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나 저항하는 대신, 잽싸게 무릎을 꿇었다. 애원 섞인 눈으로 근위대원들을 올려다보았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대로 맞아 쓰러지니 참교육이 된 걸까. 쿠스만이 얼굴이 피떡이 된 채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근위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애원조로 두 손을 내밀었다.
“제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감히 저항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반성합니다. 그러니 제발, 더 때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그저 얌전히 있을 테니 제 손을…… 묶는 걸로만 끝내주십시오.”
“…….”
근위대원들이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한 대 맞았다고 이런 엄살이라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대원 하나가 포박용 포승줄을 꺼냈다. 그 모습에 쿠스만은 내심 미소를 감추었다. 그의 눈동자에 잔혹한 환희의 빛이 스쳐 갔다.
‘됐다. 걸렸구나.’
그는 자신의 주특기를 떠올렸다.
단검을 활용한 전투?
아니었다.
그건 그저 호신용 수단일 뿐. 자신의 진정한 특기는 독을 이용한 암습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끄극!
그의 혀가 아랫어금니 하나를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어금니가 손쉽게 밀려 잇몸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그것은 어금니가 아니었다. 어금니 모양을 지닌 캡슐이었다.
그 캡슐이 잇몸을 벗어나는 순간.
까득!
그가 캡슐을 힘껏 깨물었다.
캡슐 속 장치가 작동을 개시했다.
‘5초. 5초가 지나면 이 캡슐은 터진다.’
그리고 맹독성 폭발을 일으키며 주위의 인명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다. 독에 노출되는 즉시 안면이 마비될 것이다. 운이 나쁘면 실명될 것이고. 더 운이 나쁘면?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죽음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유유히 도망치는 거고!’
이제 캡슐을 강하게 뱉으리라. 그 직후, 바닥을 굴러 거리를 띄우리라. 그러면 된다. 영문도 모르고서 맹독성 폭발에 노출되는 근위병 셋쯤은 손쉽게 무력화될 것이다.
그 후에는?
황태자 놈의 목을 그어 버리고 통로 밖으로 도망치면 되리라.
‘그러니까…… 네놈들은 끝이다!’
쿠스만은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5초.
깨문 캡슐을 입안에서 굴려 혓바닥 위에 올렸다.
4초.
숨을 들이마시며 혀를 둥글게 말았다.
3초.
대롱처럼 만 혀로 캡슐을 조준…….
텁!
난데없는 손아귀가 뻗어왔다.
이쪽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
쿠스만은 경악했다.
다급한 눈길을 들어 올렸다. 손아귀로 이쪽의 입을 틀어막은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놈이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툭, 꺼냈다.
“어허. 어디서 함부로 뭘 뱉으려고. 사회적 거리 두기 몰라?”
“……읍?”
쿠스만은 경악했다.
문득, 소름 끼치는 깨달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놈…… 설마…… 내 비장의 수법까지…… 전부 알고 있어?’
그 순간.
퍼석!
쿠스만의 입안에서 맹독 캡슐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