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쑥뜸 클리닉 (1)
데미안은 눈을 떴다.
이내 보이는 것은 비현실적인 광경. 자신의 몸이 작아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려져 있었다.
여섯 살? 일곱 살?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방금 숨진 여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
어머니다.
기억 속의, 임종을 맞이한 직후의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비로소 데미안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날의 꿈을 꾸고 있음을. 이 빌어먹을 꿈이 자신의 가슴 속 불길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음 또한.
이날이 바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날이었다. 아니, 버려진 날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다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굴러 왔다. 하지만 단 하나, 가슴에 품은 목적만은 잃지 않았다.
그건 바로…….
“…….”
데미안은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현실의 광경이 그를 맞이했다.
짹, 째잭…….
잠에서 깨어나며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얼마 만일까. 적어도 최근 몇 년의 기억 속엔 없던 일이었다. 침대 옆쪽, 커다란 창가로 스며오는 아침 햇살도 낯설었다.
살결에 스치듯 보드라운 베개와 침구도. 신경통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아침도. 모두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락.
몸을 일으켰다.
등가죽 일부가 쓰라리고 따끔거렸다. 어젯밤, 쑥뜸에 지져졌던 자리였다. 그 생생한 자극이 그를 완전한 현실로 돌려놓았다.
지난밤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
그래, 여긴 별궁이지.
황태자가 머무른다는 궁전.
그리고 나는…….
‘황태자를 따라 여기로 왔지.’
지난밤에 황태자에게 받았던 쑥뜸 치료가 떠올랐다. 뜨거웠다. 마치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한데 그걸 참아내고 나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거의 몇 년째 자신을 괴롭혔던 지옥 같던 신경통이 사라졌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젯밤, 황태자는 근위대를 동원하여 지하 검투장과 프로모터를…….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점잖은 목소리.
“깨어났는가? 전하께서 찾고 계시니 의복을 갖춰서 나오도록 하게.”
“…….”
마침 궁금한 게 많던 참이었다.
왜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지하 검투장을 토벌했는지. 어째서 지난밤 자신을 찾아와 치료를 해준 건지. 무엇을 위해 나머지 검투사들까지 별궁으로 데려온 건지.
‘대체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지.’
궁금했다.
미심쩍었다.
지난밤, 잠들기 전까지 짐작을 거듭해봤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데미안은 침대 옆에 놓인 새 셔츠를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선 신사적으로 잘생긴 중년인이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반갑네. 황태자 전하의 주치의인 피에로 가르딘일세.”
“……데미안 카이엔입니다.”
데미안은 가르딘 경의 모습을 힐끗 확인했다. 분명 어젯밤 황태자의 곁에 묵묵히 착 붙어 다니던 인물이다. 호위로 붙은 사람치고는 자세나 움직임이 다소 어설프다고 느꼈는데, 역시나 의사였구나 싶었다.
“안내할 테니 따라오게.”
가르딘이라는 사람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어디 하나 정돈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정갈한 바닥. 치장한 듯, 치장하지 않은 듯, 화려함을 억제한 와중에 화려함이 엿보이는 실내.
“…….”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퀴퀴한 곰팡내 가득하던 지하검투장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런 복도와 계단, 모퉁이를 수없이 오르내리고 건넜다. 그 사이에 지나치는 근위병들의 숙덕거림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저 사람입니까? 어젯밤에 3분대를 애먹였다는 검투사가?”
“어, 맞아. 분명해.”
“혼자서 근위대원 다섯을 상대하고 셋을 때려눕혔다던데…… 그거 혹시 과장 아닙니까?”
“절대로 아닐세. 내가 봤거든.”
“직접 보셨단 말입니까?”
“으음. 엄청나더군.”
“얼마나 엄청났길래…….”
“뭐랄까. 그런 식으로 검을 다루는 건 처음 봤다네. 우리가 익힌 정규 검술? 그런 것과는 결부터가 달랐다고 해야겠지. 검술이라면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규칙과 법칙, 이를테면 틀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럼 그거, 근본도 없는 마구잡이 검술 아닙니까?”
“마구잡이 검술이라. 어쩌면 맞겠지. 하지만 그 마구잡이 검술로, 제국에서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검술을 익힌 근위대원 셋을 죽이지도 않고 때려눕혀 제압했다면 말일세……. 과연 그걸 단순한 마구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인간의 형상을 한 맹수가 검술을 익히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네.”
“그거, 칭찬이겠지요?”
“당연하지. 듣기로는 저자가 지하 검투장의 챔피언이었다던데.”
“저자가요?”
“으음, 최근 2, 3년째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더군. 싸울 상대가 없어서 트롤 따위와 싸웠다던가.”
“……트롤이요?”
“음.”
“그거, 사람이 혼자서 잡을 수 있는 겁니까?”
“나도 모르지. 해본 사람이 별로 없을 테니까. 중대장님이면 가능하려나.”
“힘들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예. 그나저나, 전하는 저자를 왜 데려온 거랍니까?”
“나라고 그 속을 알겠나. 다른 검투사들도 모조리 데려온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한데 그 생각이 뭔지 도통 모르겠지 말입니다.”
“하하. 동감일세.”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근위대원들.
그들이 흘리는 너털웃음.
그 끝자락에 데미안도 한마디를 덧붙여주고 싶었다. 자신과 검투사들을 왜 별궁으로 데려온 건지, 이쪽도 모르겠노라고. 아니, 댁들보다 내가 더 궁금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나 더 걸었을까.
“다 왔네. 이곳일세.”
앞서 가던 가르딘 경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가리키는 커다란 문. 안쪽에 널따란 홀이 있었다. 원래는 연회 등의 용도로 쓰이는 장소인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건…….”
데미안은 홀에 놓인 열네 개의 침상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시트로 정리된 깔끔한 침상이었다. 그리고 먼저 온 검투사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각각의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뭡니까, 여긴.”
“뭐긴. 진료실이지.”
대답은 곁의 가르딘 경이 아닌, 다른 이가 돌려주었다. 데미안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황태자가 있었다.
이쪽을 향해 어깨를 슬쩍 으쓱이며.
“왔으면 대강 자리 잡아. 다 모이는 대로 진료 시작할 거니까.”
“…….”
데미안은 황태자와 가장 가까운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째서, 왜 우리에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내내 궁금했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젯밤에 왜 굳이 신분까지 숨기며 자신을 몰래 찾아와 호의를 베풀었던 건지. 프로모터와 검투장을 싹 쓸어버리며 자신과 검투사들을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건지. 어째서 자신들을 별궁에 머무르게 해주는 건지도.
하나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 점들 투성이였다. 한데 황태자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웃음만 싱긋 머금었다.
“내가 많이 아프거든.”
“……예?”
“그래서 그쪽들이 필요한 거라고.”
탁탁, 미리 준비한 쑥뜸봉을 정리하며 라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과 검투사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이쪽을 보는 데미안의 시선.
나머지 검투사들의 눈빛.
하나같이 의아해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마치 치과 대기실에 앉혀둔 초등학생들 같았다.
사실 라키엘도 알고 있었다.
저들이 이쪽의 호의에 마냥 안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오히려 이쪽이 베푸는 호의를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당연하지. 내가 잘해주는 게 맥락 없게 느껴지겠지. 이건 뭐 봉사활동 하듯이 퍼주는 것도 아니고. 그 이유가 짐작도 안 되겠지, 저들 입장에선.’
사실 자신의 목적은 보너스 수명이었다.
데미안을 비롯한 수많은 검투사들. 저들이 겪고 있을 낙인의 저주. 저주 때문에 생겨나는 신경통. 그걸 치료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보너스 수명을 퍼 받을 계산이었다.
물론 더 쉽고 빠른, 다른 방법이 있긴 했다. 사실은 굳이 검투사들을 구해올 필요도 없었다.
‘그냥 빈민굴에 가기만 하면 되지.’
그곳엔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들을 치료해주면 훨씬 많은 보너스 수명을 쉽게,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키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너무 위험해. 리스크가 너무 커.’
빈민굴의 위생 상태를 생각해보면 그랬다. 매독, 결핵, 그 밖의 수많은 이름도 모를 전염병이 암암리에 퍼져 있을 것이다. 한데 치료를 하겠답시고 그런 곳을 들락거린다면? 그냥 있어도 골골거리는 이런 몸으로?
‘그러다간 온갖 전염병에 당첨되겠지. 약해빠진 몸인 만큼 면역력도 밑바닥 수준일 거니까.’
그러면 안 된다.
이런 약한 몸으로 전염병에 덜컥 걸리면 끝장이다.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어서 염라대왕과 진로상담을 하게 될 거다.
라키엘은 그런 결과는 사양이었다. 보너스 수명을 조금 더 빠르게 챙기겠답시고 목숨까지 거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였다.
데미안과 검투사들의 신경통. 저걸 고쳐주는 안전한 방법으로 보너스 수명을 차근차근 챙기리라 다짐했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저들의 신경통이 단순한 통증으로만 끝나는 질환이 아니기도 했다.
‘조금씩 신체를 좀먹지. 마치 기생충처럼. 몇 년간 몸을 피폐하게 만들고 마나의 순환을 엉망으로 부순다고 소설에 나와 있었어. 그걸 그대로 방치하면?’
낙인이 새겨지고 10년쯤 지나면 폐인이 된다고 했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도 했다.
그런 저들을 구해준다면?
이득이 쏠쏠할 것이다.
‘저들 대부분이 이십 대 초중반, 많아 봐야 삼십 대 초반이니까. 낙인의 저주를 풀어주면 팍팍 늘어날 기대수명이 제법 넉넉할 거란 말이지. 그러면 내가 덩달아 얻을 보너스 수명도 짭짤할 거고.’
자연스레 그런 계산이 가능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남을 진료해주면 보너스 수명을 얻는다는 사실도, 그런 메시지가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것도, 말해줘 봐야 누가 믿겠는가. 오히려 미친놈 취급만 받을 것이다.
‘그러면 곤란하지.’
검투사들은 이쪽의 진료를 받을 환자다. 우선 저들의 불안감을 지워줘야 한다.
의술을 제공하는 자.
진료를 받는 환자.
둘 사이에 신뢰감과 유대감이 있어야 긍정적인 진료의 효과가 뿜뿜 샘솟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지금은 적당한 거짓을 섞어서.’
이쪽이 베푸는 호의의 이유와 목적을 알려주는 것이 나으리라. 계산을 마친 라키엘은 입술을 촵촵 적셨다. 적당한(?) 거짓말을 혓바닥에 착착 올렸다. 야물딱지고 뻔뻔하게 발사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생각해보도록. 내가 그쪽들을 그저 단순한 호의로 구해주고, 은혜라도 베풀듯이 별궁으로 데려온 줄 아는가? 착각하지들 않았으면 좋겠군.”
검투사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좋은 반응이다.
내심 미소를 머금고서 말을 이어갔다.
“하여 방금 밝혔듯이, 내가 조금 아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병이 많지. 이 사실은 다들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
“…….”
몇몇 검투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건강 최악의 골골거리는 약골 황태자. 이 제국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라키엘이 계속 말했다.
“한데 기존의 황궁 의사들은 그런 내 병을 다스리질 못하더군. 아무리 다양한 치료를 받아도 내 지병은 나날이 악화될 뿐이었다. 하여 내가, 독자적으로 대안이 될 치료법을 찾는 중이기도 하고.”
“…….”
“이쯤 이야기를 했으니 몇몇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맞아. 데미안 카이엔? 그쪽도 내 뜻을 짐작하게 된 것 같군.”
“……예, 전하.”
“짐작한 걸 들어볼까?”
“혹시 저희를, 그 새로운 치료법의 테스트를 위해 데려온 겁니까?”
“정답이다.”
물론 잘못 짚은 정답이지만.
라키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저들이 오해를 해주고 있다. 바라던 바였다. 그는 검투사들을 둘러보았다.
“방금 데미안이 말한 대로다. 나는 그쪽들을 새로운 치료법을 시험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을 생각이야. 그래서 검투장을 쓸어버린 거고, 모두를 이곳으로 데려와 좋은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게 된 거지. 앞으로 온몸을 바쳐 새 치료법의 개발에 힘써줄 모두를 위해 내가 제공하는 보상이라고 보면 되겠군.”
“…….”
검투사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실험용 대상으로 자신들을 데려온 거였다니.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준비한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이미 그 테스트를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이 있다. 바로 여기, 데미안 카이엔이 어젯밤 내게 첫 치료를 받았고 효과를 느꼈지.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검투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첫 치료를 받았고, 신경통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
검투사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개중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챔피언인 데미안이 증인이라면, 조금은 믿을 수 있겠다는 듯이. 그 분위기를 읽은 라키엘이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혹시, 이제부터 시작할 치료가 불안한 사람?”
“…….”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라키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샘솟았다.
‘됐다. 성공이야.’
검투사들의 반응을 보며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이 환자로서 이쪽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품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걱정 없이 마음껏 지져줄 수 있겠네.’
새삼 말하는 거지만, 쑥뜸은 뜨겁고 아프다. 그걸 불평 없이 견뎌내려면 한의사에 대한 신뢰감은 필수다.
이렇게 아파도 참고 받으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설령 피부에 화상이 생겨도.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더라도. 더 아픈 곳을 낫게 해주는 치료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딱 입병 났을 때 바르는 전설의 명약 알보-세븐 같은 거거든, 쑥뜸이.’
단기간의 고통.
치료를 위한 불가피한 통증.
그걸 넘어서면 찾아올 치유의 파라다이스.
쑥뜸을 통해 저들을 얽어매는 고통의 사슬을 끊어주리라. 그렇게 보너스 수명을 알차게 획득하리라.
라키엘은 다짐하며 손뼉을 쳤다.
“자아, 주목. 그럼 바로 치료를 시작하지. 다들 셔츠 탈의하고 침상에 엎드립시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의 낙인 제거 쑥뜸 클리닉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훗날, 이곳에 황태자의 ‘별궁 한의원’이 본격 오픈되는 미래로의 웅장한 첫걸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