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1화 (31/468)

31화. 환상종 선택 뽑기 (2)

‘미친. 이건 대박이네. 맞네.’

눈앞에 숑숑 떠올라 있는 메시지. 라키엘은 그 내용을 꼼꼼히 읽었다.

[꼬슴이 사용설명서]

[꼬슴이는 귀여운 고슴도치입니다. 사랑으로 보살펴 주세요.]

[꼬슴이는 소환자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환상종은 평생의 반려동물이자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함부로 유기하지 말아 주세요.]

[꼬슴이는 함께 동봉된 두 가지 종류의 해바라기씨를 먹음으로써 덩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빨간 해바라기씨 : 꼬슴이를 거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 = 12시간]

[파란 해바라기씨 : 꼬슴이를 아담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을 초과하기 전에 먹여 주세요. 거대화 상태에서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지 않고 12시간을 넘기면 꼬슴이는 자동으로 아담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대신, 탈진 상태에 빠져 24시간 내에는 다시 거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2색 해바라기씨 세트 구매 비용은 1 HP입니다.]

[꼬슴이는 소형화 / 거대화 상태에서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꼬슴이 보유 스킬 목록>

[무한의 가시 (Lv. 1)]

[밤송이 돌격 (Lv. 1)]

[삼색 가시 발사 (Lv. 1)]

‘역시 고슴도치. 가시 활용에 특화된 녀석인 거구나.’

침술에 쓸 라운드 니들을 원했던 자신이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다다익선을 원했던 바였다. 한데 이 녀석의 스킬 목록을 보니?

‘무한의 가시. 이것부터 딱 마음에 드네.’

절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대놓고 무한이란다.

한도 없이 팍팍 쓸 수 있단다.

라키엘은 설명서 내용을 숙지했다. 그 사이, 설명서가 서서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작은 복주머니가 생겨났다. 이쪽의 손바닥 위로 톡, 떨어졌다.

주머니 안쪽을 살펴보니 설명서에서 언급되어 있던 붉고 푸른 해바라기씨가 들어 있었다.

‘설명서 그대로다. 이거, 빨간 걸 먹이면 거대하게 변신한단 말이지?’

라키엘은 품속의 고슴도치, 꼬슴이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화 변신이 가능하다는 이 녀석. 얼마나 커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봐.”

“꼬슴!”

“쉿. 대답 조용히. 한밤중이잖아.”

“……꼬슴.”

“그래, 착하지. 딱 좋아. 아무튼 하나 물어볼게. 너 이거, 먹으면 커지는 거야?”

“꼬슴.”

“그래? 얼마나?”

통통한 꼬슴이가 이쪽의 손바닥 위에 두 발로 섰다.

이내 작고 하찮은 두 팔을 최대한 뽀잇 펼쳤다.

“꼬스슴?”

“그만큼?”

“꼬슴!”

“아무튼, 엄청 커진다는 소리네?”

“꼬스슴, 꼬슴.”

“흐음.”

대체 얼마나 커진다는 건지.

가늠이 잘 안 되었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빨간 해바라기씨를 실제로 먹여보는 건 다음으로 하자. 라키엘은 생각을 정리했다.

‘혹여나 진짜 몇 미터씩, 코끼리처럼 커지고 그러면 여기 다 박살 날 거니까.’

익숙해진 침실을 졸지에 잃고 싶진 않았다. 대신 라키엘은 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럼 하나 더 물어볼게. 네가 가진 가시 말이야. 혹시 뽑아서 써도 되는 거야?”

“꼬슴!”

“괜찮아?”

“꼬스슴.”

“정말로? 안 아파? 하나도?”

“꼬슴!”

“오오. 혹시 그럼, 가시를 뽑으면 그 자리에 새 가시가 바로 돋아나는 거고?”

“꼬슴.”

“좋네. 그게 무한의 가시 스킬이라고?”

“꼬스슴!”

꼬슴이가 고개를 야물딱지게 끄덕였다.

라키엘이 재차 물었다.

“그럼 삼색 가시 발사 스킬은 뭐야?”

“꼬슴? 꼬스슴, 꼬슴. 꼬슴슴, 꼬스슴, 꼬슴!”

“네가 가진 가시는 세 가지 색깔인데, 색깔별로 찔렸을 때 자극의 강도가 다르다고?”

“꼬슴! 꼬스슴, 꼬슴.”

“흰색 가시가 순한맛?”

“꼬스슴!”

“갈색은 매운맛이라고?”

“꼬슴!”

“그럼 검정색 가시는?”

“꼬스슴!”

“……K맛?”

“꼬슴!”

“그게 뭐야?”

“꼬스슴, 꼬슴.”

“너도 잘 모른다고?”

“꼬슴!”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꼬슴이. 그 모습으로 보아 본인(?)도 검정색 가시의 ‘K맛’이 뭔지 잘 모르는 듯했다.

‘뭐, 시험해보면 알겠지.’

어차피 직접 시험해보려던 참이었다. 가뜩이나 금단현상에 시달리며 신경과민에 고통받는 검투사들을 대상으로 정체불명의 가시를 푹푹 찌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좋아. 그럼-”

라키엘은 꼬슴이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왼쪽 팔뚝 소매를 걷었다. 꼬슴이에게 정겹게 요구했다.

“가시, 흰색이랑 갈색, 검정색 하나씩 줄 수 있겠어?”

“꼬슴!”

꼬슴이가 네 발로 야물딱지게 테이블을 디뎠다. 통통한 궁둥이를 뽀잇 치켜들었다. 온몸을 뿌르르 떨었다.

“꼬스스슴!”

그러더니 이윽고.

뾱! 뿋! 뾱!

가시 세 개가 발사되었다.

한데 사정거리(?)가 불과 10센티 남짓이었다.

톡, 토독.

라키엘은 테이블 위에 떨어진 흰색과 갈색, 검정색 가시를 보며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게 가시 발사 스킬인가.’

10센티 발사라니.

그는 꼬슴이의 등을 살펴보았다. 방금 가시를 발사하며 비었던 곳에서 새 가시가 순식간에 올라오는 게 보였다.

‘진짜로 무한 생성 가시네.’

다행이다.

그렇다면 가시를 수십, 수백 개씩 써도 꼬슴이에겐 아무 문제가 없을 듯했다. 안심한 라키엘은 테이블 위에 놓인 가시로 눈길을 던졌다.

‘처음은 흰색, 순한맛부터.’

집어들었다.

소매를 걷은 왼쪽 팔뚝을 조준했다. 그가 겨눈 곳은 팔뚝 바깥쪽의 중간 자리, 자뼈(ulna)와 노뼈(radius) 사이의 공간, 아랫팔뚝의 두 근육 줄기의 경계에 해당되는 지점이었다.

그곳에 사독혈(四瀆穴)이 있었다.

바로, 안면과 어깨, 팔 바깥쪽의 신경을 아우르는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에 소속된 혈자리였다.

‘해볼까.’

만약 자극이 너무 강하면?

곧바로 눈가, 뺨, 귀 뒤편, 어금니, 목덜미 쪽으로 신경 자극이 느껴질 터다.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흰색 가시를 사독혈에 가져갔다.

찔렀다.

톳!

깊이는 평소보다 아주 약간 깊은 0.8치. 들이마시는 호흡에 맞춘 보사법으로.

‘……찔렀는데 느낌이 없네?’

정말이었다.

아무런 느낌도, 자극도 없었다. 가시가 바늘보다 제법 굵은데도 그러했다. 혹시나 해서 가시를 살살 돌려보았다. 역시나 자극이 없었다. 아예 꽂아둔 가시 끄트머리를 딱밤으로 톡톡 쳐보았다.

그래도 안 아팠다!

‘대박!’

이거다.

이거면 검투사들이 느낄 자극도 극히 적을 것이다. 라키엘은 하마터면 감격의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럼 갈색 가시는? 매운맛이랬으니 좀 따갑겠지?’

흰색 가시를 뽑고 갈색 가시를 집었다. 똑같이 사독혈을 겨누었다. 이번엔 아플 것 같으니까 아까보다 얕게 0.5치로.

찔렀다.

톳!

“……읍.”

역시나 제법 따끔했다.

얼른 가시를 뽑아냈다.

“…….”

이번엔 검정색 가시로 눈길이 갔다.

K맛이라는 거, 대체 뭘까.

궁금한데 한편으론 불안해졌다.

‘나중에 딴 놈한테 시험해보자.’

괜히 불안한데 내 몸 축나는 모험은 사양이다.

나중에 미운 놈 생기면 그놈한테 시험해보자고 라키엘은 다짐했다. 그리고 흐뭇한 눈길로 꼬슴이를 돌아보았다. 거의 무자극에 가까운 흰색 가시. 그걸 무한으로 공급받게 됐다.

그거면 됐다.

“그러니까 꼬슴아?”

“꼬슴?”

“우리 오래 가자?”

“……꼬스슴?”

까만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대는 꼬슴이. 그 모습이 그렇게 복덩이처럼 보일 수가 없었다. 동시에 확신이 들었다. 계획한 일들을 진행할 수 있겠다고.

이젠, 해낼 수 있겠다고.

아침이 밝았다.

“저기, 전하? 그건 대체…… 뭡니까?”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데 가르딘 경이 물어왔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그…… 아까부터 계속 데리고 다니시는 그거…… 고슴도치 말입니다.”

“아, 꼬슴이?”

“……예?”

“인사해. 꼬슴 경이라고 해.”

“꼬슴!”

라키엘은 꼬슴이를 자랑스레 들어 보였다.

꼬슴이가 반갑게 손을 들었다.

가르딘 경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런 고슴도치는…….”

“없었지. 그런데 오늘은 있네.”

“…….”

“자려고 누웠는데 창가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라. 뭔가 싶어서 살펴봤지. 그런데 창틀 바깥에 얘가 매달려 있더라고.”

“침실…… 창틀 바깥에 말입니까?”

“어.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기어 올라온 건지 모르겠는데, 정원에서 살다가 길을 잃었나 봐.”

“그게 가능한 겁니까?”

“안 믿겨져?”

“예, 솔직히…….”

“안 믿기면 본인한테 물어봐서 확인해보든가.”

“꼬슴!”

“…….”

가르딘 경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런 소리로 우는 고슴도치는, 사람 말을 다 알아듣듯이 행동하는 고슴도치는,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뭐지. 설마 저거, 환상종인가.’

가르딘 경은 문득, 제국의 역사에 남겨진 환상종에 대한 기록을 떠올렸다. 환상종.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신비한 생명체들. 아주 가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들었다. 자신들이 선택한 인간에게 찾아와 평생을 봉사한다고 했던가.

마치, 먼 과거의 천재 건설자 로이드 프론테라를 도왔다는 거대한 햄스터나 화산폭발을 일으키는 방울뱀처럼. 혹은 마젠타노 왕국을 제국으로 발전시킨 전설적인 성군, 샤를로트 대제의 캥거루처럼. 지금 저 고슴도치도 환상종처럼 보였다.

‘한데, 대체 어떻게? 전하께서 환상종을 얻으신 거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하룻밤 사이에 환상종을 얻은 황태자 전하. 그게 당연한 듯이 태연한 모습인 황태자 전하. 그렇듯, 예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황태자 전하.

‘혹시 제가 모르는 또 다른 게 있는 겁니까.’

가르딘 경은 복잡해진 눈길을 애써 감추었다. 그 사이, 라키엘은 검투사들을 진료실로 불러들였다.

“다들 금단현상 때문에 힘들 거야. 알아. 얼마나 괴로울지. 그래서다. 오늘은 금단현상을 누그러뜨려 줄 진료를 해볼까 한다. 다들 침상에 앉아서 발 내밀어.”

검투사들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비틀거리며. 누군가는 속이 메슥거리는 걸 참아내며. 또 누군가는 데미안의 부축을 받아서 간신히 침상에 눕거나 걸터앉았다.

‘후우.’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첫 번째 검투사에게 다가갔다. 바로 어제, 바늘로 침술을 받다가 발작을 일으키며 이쪽의 목을 졸랐던 세르지오였다. 그가 이쪽을 보자마자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어젠……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그래? 어제 일들이 기억이 나?”

“아주, 조금은…….”

“괜찮아. 아파서 그런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

“하지만…….”

“됐고. 진료나 시작하지.”

지난밤 미리 수백 개씩 뽑아둔 흰색 가시를 꺼내 들었다. 그걸 보는 세르지오의 눈길이 해쓱해졌다.

“어제 바늘보다…… 굵은 것 같은데…….”

“안 죽어. 또 아프면 내 목 조르든가.”

“…….”

가시를 들었다.

어제 찔렀던 바로 그 자리. 여태혈에 0.1지촌 깊이로 재빠르게 시침했다.

톳!

둘째 발가락 발톱 뿌리에 하얀 가시가 꽂혔다. 라키엘은 세르지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다행이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거 봐. 안 아프지?”

“……예?”

“찔렀는데 멀쩡하잖아?”

“벌써…… 찌르셨습니까?”

“느낌도 없나 보구만. 좋아. 계속 힘 빼고 있어봐.”

……역시.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신들린 듯 족양명위경의 경혈들을 차례로 시침해나갔다.

톳! 토톳!

내정(內庭穴), 함곡(陷谷穴), 충양(衝陽穴), 해계(解谿穴)를 찌르며 발가락에서부터 발등을 거쳐 갔다.

토토톳! 톳!

종아리의 풍륭(豊隆穴), 하거허(下巨虛穴), 조구(條口穴), 상거허(上巨虛穴)를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종아리 위쪽, 앞정강근(tibialis anterior muscle)의 최상단부를 찔렀다.

톳!

그곳에 족삼리(足三里)가 있었다.

여태혈에서부터 족삼리까지. 신경과민과 노이로제, 위 신경증을 지닌 이라면 하나같이 딱딱한 줄 모양의 응어리가 지는 경혈들이었다.

검투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이곳 경혈들을 집중적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후우우…….”

세르지오의 호흡이 눈에 띄게 편해졌다.

안색 또한 마찬가지였다.

‘좋아. 효과가 있어.’

더욱 큰 확신이 들었다.

그는 나머지 검투사들에게도 똑같은 시침을 해주었다. 역시나 모두가 세르지오와 비슷한 효과를 보았다. 호흡이 편해졌고, 과도하게 민감해졌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신경과민 때문에 생겨나던 위통과 소화장애도 한결 가라앉았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사흘에 걸쳐 똑같은 시술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검투사들의 금단현상이 확연히 가라앉았다. 한결 편하게 걸어 다니고, 부담 없이 음식을 먹었다. 상했던 원기가 조금씩 회복되었다. 회복되는 상태에 맞추어 다시 쑥뜸 치료를 시작했다.

하루, 이틀, 닷새, 열흘.

진료실이 쑥뜸 타는 향으로 가득 찼다. 그만큼 검투사들의 등에서 낙인이 지워져 갔다. 낙인에 기생하고 있던 저주도 함께 사라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보름째 되는 날. 마지막 검투사의 등에서 쑥뜸봉을 치우는 순간.

딩동!

[당신은 적절한 침술과 쑥뜸의 활용으로 검투사 데미안 카이엔 외 13명의 만성 통증을 완벽하게 제거하였습니다. 검투사들은 오랜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며, 낙인의 저주로 인한 조기 사망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 1) 스킬이 발동됩니다.]

……기다렸던, 단체 진료비 청구의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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