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2화 (32/468)

32화. 특근대 결성 (1)

아프다.

데미안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타는 쑥으로 등을 지지는데 안 아플 리가 있을까.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아픔이 기꺼웠다. 그리 싫지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이었다.

아픔은 일상이었다. 어려서는 가난해서 아팠다. 조금 커서는 혼자여서 아팠다. 더욱 자라 세상을 간신히 알아갈 무렵이 되었을 땐 타인에 의해 아팠다.

아픔을 모면하고자 검을 쥐었고, 타인을 아프게 했다. 그럴 때면 잠시나마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잊었노라 안도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예되었노라 착각한 아픔은 언제나 곱절로 돌아왔다. 등에 새겨진 낙인을 지울 수 없었던 것처럼. 미루었던 아픔은 매일 밤 어김없이 찾아왔다. 착각 속에 안주하기 위한 값을 치르듯. 영혼을 갉아 먹히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만나고 말았다.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어째서 황태자가 자신을 찾아왔던 건지 모르겠다. 무얼 위해 선뜻 손을 내밀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치료할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그래서 우리에게 시험해보는 치료법이라고 했지.’

어째서 우리들에게 이런 치료를 해주려는 것인가를 물었던 때였더랬다. 당시 황태자가 돌려주었던 대답이 떠올랐다.

분명 저렇게 말했었다. 너희를 위한 게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위한 거라고.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라고.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도 말라고. 심지어 고마워하지도 말라는 식으로 말했던가.

‘하지만 황태자, 당신은…….’

그렇게까지 말해놓고선 정작 스스로에게 한 번도 뜸을 뜨지 않았다. 지난 보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황태자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황태자의 모든 관심은 이쪽과 검투사들을 향해 있었다. 행여나 금단현상이 심해지진 않았는지. 잠은 잘 잤고 식사는 잘 했는지. 뜸 자리가 덧나진 않았는지. 몸살기가 있진 않은지.

새벽부터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와 자신과 열세 명 검투사들의 상태를 일일이 살폈다. 그러곤 모두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자신의 실험이 성공적이라서 짓는 웃음?

아니었다.

‘정말로 기뻐서 짓는 웃음이었지, 그건.’

순수한 보람과 기쁨.

황금빛으로 물든 논밭을 바라보는 농부 같은. 혹은 자신이 돌보는 환자가 건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간병인 같은.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쪽의 등에 남은 뜸을 털어주면서도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으니까 말이다.

‘황태자씩이나 되는 당신은 대체, 고작 우리의 무엇이 그리도 기쁜 겁니까.’

데미안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저 미소. 커다란 보람을 만끽하는 저 웃음. 자신에게 돌아갈 이득이 없음에도 내보이는 순수한 기쁨. 황태자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이었다.

같은 순간, 라키엘도 생경한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왔다!’

수확을 앞두고 넘실거리는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흐뭇한 기분이 이런 걸까. 혹은, 기대 없이 사두고 묻어뒀던 주식이 미친 떡상을 하다못해 천장 뚫고 우주 돌파 고점까지 찍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는 찐텐 가득한 행복과 보람을 느끼며 눈길을 들었다. 그의 눈길이 향하는 곳. 그곳에 수확의 기쁨이 넘실거리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딩동!

[당신은 적절한 침술과 쑥뜸의 활용으로 검투사 데미안 카이엔 외 13명의 만성 통증을 완벽하게 제거하였습니다. 검투사들은 오랜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며, 낙인의 저주로 인한 조기 사망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 1) 스킬이 발동됩니다.]

‘이거지!’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기대감으로 콩닥거리는 사이, 추가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환자 : 데미안 카이엔이 당신의 진료를 통해 71년 9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71년 9개월의 1/200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환자 : 세르지오가 당신의 진료를 통해 27년 1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환자 : 몬테로가 당신의 진료를 통해 23년 4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환자 : 페드로가 당신의 진료를 통해 31년 6개월의…….]

[환자 : 훌리안이…….]

딩동! 딩동동! 댕도로댕동딩!

쉴 새 없이 울리는 메시지의 홍수. 보너스 수명이 미친 듯이 정산되었다.

그 결과는…….

[데미안 카이엔 외 13명에게서 총 79.875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80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71일]

“…….”

미쳤다.

이건 진심 미쳤다.

‘후아. 성능 확실하구만.’

기대수명이 한 큐에 3개월 가까이 늘어났다. 게다가 뜻밖의 보상이 더 있었다.

딩동!

[당신은 일정 숫자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며 대량의 보너스 기대수명을 정산받았습니다.]

[이 경험이 토대가 되어 <진료비 청구> 스킬이 한층 개선됩니다.]

[진료비 청구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진료비 청구 Lv.2]

[당신이 환자에 대한 진료 행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을 때 자동으로 발동됩니다. 당신의 진료 행위로 늘어난 환자의 기대수명만큼, 일정 비율의 수명을 정산받아 당신의 기대수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이 정산 비율은 스킬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늘어날 것입니다. (정산되는 수명은 환자의 기대수명에서 차감되는 것이 아닌, 별도 보너스 정산분입니다.)]

[현재 정산 비율 = 1950 : 1]

‘좋아. 아주 좋아.’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넉넉한 보너스 수명을 받은 것에 더해 진료비 청구 스킬도 성장했다. 다음부터는 1/1950의 비율로 수명을 정산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이제는?

‘검투사들과 볼일도 끝났네.’

라키엘은 검투사들을 둘러보았다. 낙인의 저주를 제거해서 돌연사의 위험을 없애주었다. 덤으로 금단현상까지 해결해주었다. 덕분에 이쪽이 얻을 것은 다 얻었다.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당연하지. 이 친구들을 어디다 쓰겠어. 다들 검은 좀 쓴다지만, 어떤 사람들인지도 잘 모르는데.’

그는 마검황 속 내용을 돌이켜보았다. 하지만 그 소설 어디에도 이 검투사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없었다. 등장하더라도 아주 잠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엑스트라들일 뿐이었다.

당연히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들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무작정 신뢰할 수만은 없었다.

‘물론 이렇게 실전으로 단련된 실력자들을 호위로 둘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디서 어떻게 구르던 사람인지 모른다. 그런 이에게 이쪽의 목숨을 맡기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쨌건 저쪽은 건강을 얻었고, 나는 보너스 수명을 얻었고. 딱 여기까지만 서로 이득을 남기고 찢어지는 게 아름다운 거겠지. 물론 데미안만 남기고.’

다른 이들은 몰라도 데미안은 보내기 싫었다.

현존 최고의 잠재력을 지닌 검사. 당대 최강의 반열에 올라설 남자. 역사 속 그랜드 마스터였다는 전설의 하비엘 아스라한에게 비견될 재능러. 삼국지로 치면 관우와 장비, 조자룡을 찰지게 얍얍촵촵 섞으면 나올 만한,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랄까.

‘이런 놈을 보내면 안 되지!’

무조건 옆에 남겨놔야 한다. 설령 백수로 놀게 두더라도 딴 곳으로 보내면 안 된다. 그런 일념으로 라키엘은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데미안을 정원으로 따로 불렀다. 은근슬쩍 물었다.

“어때? 쑥뜸 다 받은 기분이.”

“뜸을 받은 자리가…… 역시나 따갑습니다.”

“그래도 이젠 익숙하지?”

“예.”

“잘됐네. 아쉽기도 하고. 이젠 뜸 받을 일이 없을 거라서.”

“……예?”

“뜸, 끝났다고. 이젠 더 받을 필요 없거든. 완치됐고, 치료 효과가 검증됐고, 실험도 끝났으니까.”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그래. 그동안은 뜸을 받고 있음에도 자정쯤엔 신경통이 조금씩 느껴졌을 거야.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깼을 테고. 맞지?”

“맞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야. 더 아플 일 없어. 축하해.”

“…….”

데미안이 묘한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걸까.

그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잠깐. 감사의 인사를 하기 전에 내 제안부터.”

“…….”

“결론부터 말할게. 나는 그쪽의 검술이 탐나. 이대로 다른 곳에 보내기 싫어. 그렇게 재능을 썩히게 두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쪽에게 내 근접 호위를 맡기고 싶은데.”

직구 승부를 던졌다. 어떠한 편법도 쓰지 않았다. 이게 나을 거란 판단이 들어서였다.

사실 데미안을 낚아낼 수많은 방법들이 있긴 했다. 그는 곧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올라설 것이다. 동시에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단계. 그 감각을 제어할 수가 없어지는 단계. 덕분에 찾아오게 될 지옥 같은 불면증.

그걸 극복하게 해주겠노라고. 불면증 치료를 해주겠다고. 솔깃한 제안을 할 수도 있다. 솔직히 그 제안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데미안은 스스로도 자신의 경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조만간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올라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시달리게 될 거란 사실도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불면증 치료 제안을 하면?

그는 십중팔구 남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렇게 필요를 어필하며 곁에 남으라고 했다간, 나중에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내 곁을 떠날 거니까.’

최악의 경우엔?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극복한 후에, 이쪽의 치료가 필요 없어졌다며 떠나게 될 수도 있다. 사람 일이 그렇다. 관계의 첫 단추를 그렇게 끼우면 안 된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필요를 양분으로 삼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물론 감사의 마음이나 우정, 의리, 그딴 소름 돋는 걸 요구하면서 남아달라는 건 아니고.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기브 앤 테이크를 깔고 가자고. 보수 넉넉하게 줄게. 근위대와 별도로 내 곁을 호위하는 최정예 특수 보직인 셈이니까. 근위대원보다 더 많은 보수와 수당에 월차, 연차 휴가 등의 각종 복지는 물론이고 연금 혜택까지 빵빵하게.”

“…….”

“당연히 고용 계약서도 써줄 거고.”

“…….”

“재직 중에 결혼을 하면 주택 지원은 물론이고, 아이 하나씩 낳을 때마다 출산보너스가 지급될 거야. 아, 육아휴가도 보장해줄게.”

“…….”

“그리고 퇴직은 원하는 때라면 언제든지.”

“…….”

“뭐, 조건은 이 정도니까. 잘 생각해 봐. 그럼.”

그는 침묵에 잠긴 데미안을 남기고 먼저 돌아섰다.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데미안이 긍정적인 답을 주기를.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존재가 자신의 곁에 남아주기를. 그리하여 데미안과 동등한 계약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그렇게 쿨하게 돌아선 뒤부터였다.

남몰래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밝아온 다음 날 아침.

뜻밖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황태자 전하! 저희도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전하! 제가 더 잘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전하아! 저희도 좀!”

“근위대원보다 많은 보수와 수당을 주신다면서요!”

“빵빵한 복지와 연금 혜택에서 저희는 빼시려는 겁니까!”

“주택 지원, 출산보너스에 육아휴직은 못 참지요!”

“저희도 좀 챙겨주십쇼!”

……그러니까, 데미안을 통해 이쪽의 고용 조건을 들어 버린 나머지 검투사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충성 맹세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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