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특근대 결성 (2)
“황태자 전하아!”
“아, 저희도 좀!”
“챙겨주십쇼!”
“저희 데려다가 써먹으려고 치료해주신 거 아니셨습니까!”
“보수 두둑하게 챙…… 아니, 은혜 좀 갚아보겠다는데 이러시면 서운하지 말입니다!”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끝까지 책임지셔야지요!”
“키운다며! 키우신다며!”
……어처구니가 없다.
진심으로 어이가 탈출할 지경이다.
라키엘은 침실 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검투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툭, 반문했다.
“아니, 키우긴 뭘 키워. 댁들이 감자야? 말티즈야?”
“아, 감자보다 제가 더 든든하지 말입니다!”
“말티즈보다 집도 잘 지킵니다!”
“저는 전하를 더 잘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비켜! 전하는 내가 지켜드린다!”
흡사 이대로 뒀다간 천하제일 호위대회 경연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라키엘은 가출한 어처구니를 향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니까 잠깐 진정들 하고. 요약하자면, 다들 내 호위가 되고 싶다?”
“예, 그렇습니다!”
“데려다가 치료해준 의리, 은혜, 뭐 이런 것들 말고, 빵빵한 보수와 복지 혜택이 탐나서다?”
“예, 그렇…….”
“맞지?”
“…….”
검투사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눈알만 데룩데룩. 그 모습에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하하. 이 친구들 보게.”
황당했다.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건강을 위한 소소한 산책. 건강을 위한 셀프 찜질. 건강을 위한 멍때리다 낮잠 자기 등등. 나름 보람찬 황족 백수의 하루를 앞둔 참이었는데.
한데 난데없이 침실 문밖이 웅성웅성, 어수선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보니 이 법석이다. 저마다 자기가 최고의 호위란다. 세상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이쪽을 지켜줄 수 있단다.
‘어휴. 이거 참. 어쩌다가.’
라키엘은 한쪽을 째릿, 가자미눈으로 쳐다보았다.
검투사들이 북적대는 한쪽.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잠깐 나 좀 볼까.”
그를 침실 안쪽으로 들였다. 들이자마자 콕, 찌르듯 물었다.
“흐음. 그쪽 짓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씀은, 쯧. 내 호위로 임명되어 일하는 근무조건. 그쪽이 저들한테 떠들어댄 거지?”
“떠들어댄 적은 없고, 그저 들은 사실 그대로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아, 그게 그거잖아.”
“그 조건, 비밀이었습니까?”
“뭐?”
“어제 전하께서 말씀하셨지요. 근무조건이 이러이러하고, 이런 혜택이 있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말입니다.”
“으음, 그랬지?”
“예.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열심히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마.”
라키엘의 머릿속으로 쌔한 예감이 콰칭 스쳐 갔다. 그리고 역시나. 쌔한 예감은 언제나처럼 적중했다.
“예, 맞습니다. 저들과 의논을 했습니다.”
“…….”
“근무조건을 따로 비밀에 부치신 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뭔데.”
“전하께서 제게 제시하셨던 근무조건 중에 휴가에 대한 것 말입니다.”
“어. 그건 왜.”
“가만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월차, 연차를 챙겨주신다고 하셨지요. 육아휴가도 보장해준다고 하셨습니다. 한데 만약, 저 혼자 전하의 근접호위가 된다면 말입니다. 제가 휴가 혜택을 누릴 땐 누가 가장 가까이에서 전하를 지킵니까?”
“…….”
“물론 기존의 근위대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과 별개로 저를 뽑으신 거니까. 24시간 곁에 붙어 있을 특수한 호위를 원하시는 거니까.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아, 굳이 휴가를 언급하신 건 전하의 깊은 뜻이 있는 거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어이.”
“혼자가 아닌 여럿이, 돌아가면서 전하를 지키면 더욱 효율적인 호위가 가능하겠구나, 라는 깊은 뜻을 말이지요.”
“……그냥 너 없을 땐 근위대 시키려고 그랬는데.”
“예?”
“아니. 됐고. 어쨌건, 그래서 검투사들한테 근무조건을 전부 밝혔고, 덕분에 다들 저렇게 눈이 홱 뒤집혀가지고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와 난리를 부리고 있는 거다, 이 말이지?”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래, 정확해서 참 난감하네.”
라키엘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검투사들이었다.
‘그냥 치료만 마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너스 수명만 챙기면 얻을 건 다 얻은 거라 여겼다. 저들이 곁에 남아줄 거란 기대 자체를 하지도 않았다. 한데 저들이 이렇듯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뭐, 그래도 마음에 들기는 하네.’
뜻밖이긴 한데.
조금 황당한 상황이긴 한데.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 차라리 저렇게 돈이랑 복지 혜택이 좋다고 솔직하게 밝히는 놈들이 백 배 낫지.’
우정이니 의리니.
은혜를 갚아야 한다느니.
그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유를 들먹이며 곁에 남으려 들었다면? 오히려 찜찜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인생살이 인간관계, 불알친구 서넛 빼면 전부 비즈니스인 거니까.’
사실 그는 정, 의리, 은혜 같은 걸 믿지 않았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데 그런 걸 들먹이는 놈들은 절대로 안 믿었다. 경험상 그런 부류일수록 사람 뒤통수를 잘 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랬지. 특히 대학생 시절에 알바할 때. 정이니 의리니, 가족 같은 분위기 강조하는 사장들이 뒤끝이 영 별로더라고.’
보통 그랬다.
이쪽은 정에 굶주려 알바를 한 게 아니었다. 의리 타령이나 하려고 일하러 다닌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가족 찾을 생각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돈을 벌려고 간 거였다. 약속한 돈만 잘 챙겨주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검투사들의 저런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나는 저들한테 보수 잘 챙겨주고. 저들은 나 야물딱지게 지켜주고. 서로 그거에만 충실하면 돼. 그게 윈윈인 거지. 뭐, 나쁘지 않네.’
게다가 저들을 자신의 호위로 삼게 된다면? 또 다른 이득도 있을 터였다.
‘나만을 따르는 병력이 생기는 거지.’
사실 근위대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따져보자면 엄연히 황제의 명을 따르는, 황실의 병력이었다. 평소엔 이쪽의 편의를 위해 각종 봉사를 하지만, 유사시에 황제와 이쪽의 명령이 엇갈릴 때면?
황제의 명령만을 따를 자들이었다.
‘그러니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어.’
반면, 검투사들은 다르다.
자신만의 사병으로 키울 수 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지켜진다면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 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연스레 결론이 나왔다.
“다 들어오라고 해.”
침실 문이 열렸다.
검투사들이 후다닥 들어왔다.
“제가 제일 먼저 들어왔습니다, 전하!”
“저는 침실 안쪽의 위험요소를 파악하느라 한 발짝 늦었습니다, 전하!”
“저는 세 번 우느라 두 발짝 늦었습니다, 전하아!”
어느 검투사의 뚱딴지같은 소리.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또 뭔데. 어째서 세 번 울었다는 건데.”
“전하께 진료를 받고 기뻐서 한 번!”
“…….”
“오늘 아침 전하의 얼굴을 뵈어서 또 한 번!”
“허허허.”
“만약 오늘 전하께서 저흴 받아주지 않으시면 앞으로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마지막 한 번!”
“그럼 내가 죽었을 땐 안 울겠네?”
“그땐…… 저도 죽을 거니깐!”
“허허, 저놈 끌어내.”
라키엘은 그저 웃고 말았다.
황태자만을 위한 특수 근위대.
통칭, ‘특근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근황에 대한 정기 보고입니다.”
이곳은 마젠타노 황실의 가장 깊은 곳. 오직 황제와 몇몇의 최측근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 은밀한 회의실에서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찻잔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새하얀 김. 그 사이로 황제의 직속 정보부 수장이 올리는 보고가 들려왔다.
“우선 황태자 전하가 별궁으로 들인 검투사들에 대한 보고입니다. 이틀 전, 검투사 14인 전원이 황태자 전하의 호위로 임명되었습니다.”
“호위?”
“그렇습니다, 폐하.”
정보부 수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황태자 전하는 검투사들에게 ‘특수 근위대’, 이른바 특근대라는 별칭을 부여하였으며, 24시간 자신의 곁을 지키도록 명하였습니다.”
“흐음. 검투사들이 충성을 맹세하였나?”
“예, 폐하.”
“라키엘이 그들에게 내린 대가는?”
“봉급과 각종 혜택이 보장된 계약서였습니다.”
“……계약서?”
“그렇습니다, 폐하.”
“이름만 거창하지, 실상은 고작 돈으로 산 용병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황제 아스테리온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신랄한 평가와는 달리, 그는 깊은 흥미를 느꼈다.
‘요즘,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구나.’
언제나 병상을 지키던 황태자였다. 무력한 병자에 불과한 큰아들이었다. 그렇기에 열흘에 한 번, 라키엘에 대한 보고를 듣는 시간이 언제나 괴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번 올라오는 보고의 내용은 힘 빠지는 것투성이였다. 희망의 빛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보고였다.
병상에 얼마간 누워 있었다는 둥. 어떠어떠한 음식을 간신히 먹었다는 둥. 산책을 몇 걸음 하다가 지쳐서 앉아 쉬었다는 둥. 하나같이 제국의 미래를 짊어질 황태자의 일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하고, 나약하고, 처참한 내용밖에 없었다.
하여 오랜 시간 기대를 접었던 황제였다. 미래가 없다고. 나아질 기미조차도 없노라고. 더 걸어볼 희망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리라고. 그렇듯 포기하며 지켜보던 세월이 십수 년이었던가.
‘한데…….’
그랬던 황태자가 어느 순간부터 바뀌었다. 두 달쯤 전이었던가. 녀석이 자신의 몸을 바늘로 찌른다는 보고를 들었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언제나 병상만 지키던 녀석이.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만 보였던 녀석이. 자꾸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일을 벌이고. 시도를 하고. 법석을 떨어댔다.
그때부터였다. 열흘에 한 번, 라키엘에 대한 보고를 듣는 시간이 점점 흥미로워졌다. 2황자와의 대결을 앞두고 대장장이에게 방패를 주문했다는 둥. 더 많이 걸어야 한다며 기를 쓰고 그릇을 비웠다는 둥.
심지어…… 황도에서 활동하던 지하조직의 검투장을 급습하여 토벌하였다는 보고까지.
‘한데 이번에는 검투사로 구성된 사병 조직이라.’
혹시 지난번 보고에서 들었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걸까. 당시에 듣기론 라키엘이 검투사들의 등을 매일 지진다고 하였는데. 혹시 그것이 모종의 고문이었던 걸까. 검투사들이 그 고문에 굴복한 걸까.
‘아니, 그것은 아닐 테지.’
분명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돈으로 매수한 것이 아닐 터다. 그 이상의 교류나 교감이 라키엘과 검투사들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좋구나.’
황제는 흡족함을 느꼈다.
미래가 없다고 여겼던 큰아들. 자신의 피를 받았음에도 실패작이라 여겼던 아이. 그 사실이 못내 아프고, 미안하고, 원통하였는데. 그랬던 녀석이 자꾸만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 일을 벌인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황제는 흐뭇해졌다.
정보부 수장을 향해 묻는 황제의 목소리도 은근히 푸근해졌다.
“하면, 추가로 보고할 것은 더 없는가?”
“그것이…….”
역시 있구나.
한데 정보부 수장의 기색이 조금 이상했다. 혹시 라키엘 녀석이 또 무슨 기상천외한 짓을 벌인 것일까.
‘아마도 그러할 테지.’
황제는 오히려 기뻤다.
큰아들이 이번에는 또 어떤 놀라움을 안겨줄 것인지. 궁금하고 기대되는 심정으로 정보부 수장을 채근하였다.
“괜찮으니 고하라.”
“황송하옵니다. 하면, 고하겠습니다. 실은 어제부터 황태자 전하가…….”
뭘까.
제국의 미래를 이끌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일까. 혹은 자신의 발전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을까. 황제는 두근거리는 심정과 근엄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거렸다.
그 순간, 정보부 수장의 마지못한 보고가 이어졌다.
“별궁의 시종과 시녀, 근위대원을 모조리 불러모아서…… 모두의 전신을 바늘로 무참히, 피도 눈물도 자비도 없이 찔러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