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5화 (35/468)

35화. 건강 현황 앙케트 (2)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이 많다. 특히,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아픈 사람들의 비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당장 주위만 봐도 그렇다.

세상 부모님 중에 어디 한 군데 아픈 곳 달지 않고 살아가는 분이 계시던가. 어딘가가 아프고 불편해도 다들 참아가며. 자식 뒷바라지에 매진하시는 진정한 영웅들. 그분들이 부모님이라는 이름의 가족이었다. 라키엘은 여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별궁 근무자들이 너무 건강하고 쌩쌩해서 곤란하면? 그들의 가족을 살펴보면 되겠지!’

다들 부모님이 있을 테니까. 다른 가족들도 있을 거니까. 그 숫자만 합쳐도 최소한 천 명은 넘을 거니까.

‘적어도 그중엔 중환자가 있을 거고.’

확신이 들었다.

가르딘 경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설문조사, 앙케트 항목은 최대한 심플하게 정하자.”

“어떻게 말입니까?”

“간단하잖아. 설문자 본인 이름, 설문자 가족 명단과 성별, 나이, 보유 질환, 증상. 딱 이 정도면 되겠네.”

“더 추가하실 내용은 없습니까?”

“아, 설문 작성 내용이 거짓으로 밝혀질 시엔 별궁에서 해고될 거라는 살벌한 경고문도 하나 붙이자.”

“경고문…… 을요?”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으로 하는 설문이 아니다. 이쪽에겐 정말로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이게 별궁 근무자들을 해롭게 하는 일도 아니다. 그러니 최대한 투명하게, 정확하게 조사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설문지 상단에 엄청 크게. 폰트 크기…… 아니, 글자 하나하나를 눈깔만 하도록 굵게. 가능하면 경고문만 빨간 잉크로 쓰라고 그래.”

“눈에 확 띄겠군요.”

“당연하지.”

“예, 그럼 이 내용 그대로 시종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이쪽의 주문(?)을 꼼꼼히 기록한 가르딘 경이 시종장을 찾아갔다.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시종장은 성실한 사내였다. 이쪽의 명령을 신속하고도 충실하게 실행했다. 덕분에 불과 반나절 뒤인 저녁 무렵엔 완성된 설문지 500장을 받아볼 수 있었다.

“흐음, 잘 뽑혔네.”

팔랑!

설문지를 살펴보자니 마음에 들었다. 이쪽이 요구한 사항이 튼실(?)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됐어. 내일 아침에 설문지를 돌리는 거야. 그러면 계획에도 탄력이 붙겠지.’

별궁 근무자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포착되면? 그대로 잡아와서 안 아프게 만들어 버릴 거다. 정성껏 별궁에 억류해서 건강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성공적인 진료 사례가 입소문으로 퍼지겠지. 거기까지만 이뤄지면 돼. 그다음은 자동이야.’

최초의 입소문.

그걸 듣고 솔깃하는 소수가 있을 것이다. 아마 본인이나 가족이 아픈 사람일 거다. 특히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환자일수록? 소문에 더욱 솔깃함을 느낄 것이다.

‘그중에 누군가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별궁에 찾아올 거고. 난 그 사람을 진료해주고. 그 진료 사례가 또 미담이 되어서 퍼지고. 더 많은 입소문이 황금시간대 광고처럼 더 많은 환자를 불러오겠지.’

그거면 된다.

보너스 수명을 아주 쓸어담게 될 거다.

‘그럼…… 일찍 죽을 걱정 없이 평생 떵떵거리면서 사는 거지. 진정한 황족 라이프!’

생각만 해도 야물딱지게 두근거리는 미래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난 자신이. 고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었던 자신이. 그래서 알바를 전전하며 겨우 대학을 졸업했던 자신이. 20대 초반부터 30대 전부를 연애마저 포기하고 학업과 일에만 몰두했던 자신이.

40대가 다 되어서야 약간이나마 모은 돈에 대출금 왕창 끼고 한의원 열었다가…… 쫄딱 망했던, 그런 자신이.

마침내 여기서나마 처음으로 잘 먹고 잘살게 될 가능성을 선물 받았다. 수명만 늘어나면. 일찍 죽지만 않으면. 꿈같은 황족 라이프가 눈앞에 펼쳐지리라. 만수르 형(?) 부럽지 않은 백수 인생을 만끽하리라. 그 생각에 괜히 가슴이 쿵쿵 뛰고 설레었다.

한데 그렇듯 혼자만의 흐뭇함을 음미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실망입니다, 전하.”

난데없는 서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왔다. 설문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특유의 냉랭한 표정과 무감정한 눈빛. 그 속에 배어 있는, 약간은 언짢은 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실망이라니?”

되물었다.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외람되지만 감히 하나 묻겠습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환자를 도구로 보시는 것입니까?”

“음?”

“그냥, 아까 점심 무렵부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내가 환자를 도구로 보는 것 같다고?”

“예.”

데미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윽고 녀석의 신랄한 디스가 이어졌다.

“가르딘 경에게 밝히시길, 별궁에 병원을 차릴 거라 하셨지요. 그렇기에 많은 환자를 끌어들일 소문, 미담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응. 그랬지.”

“그 취지는 훌륭하십니다. 분명 칭송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황태자 전하의 모습은…….”

“모습은?”

“죽기 직전인 환자 하나만 제발 나타나 달라고 빌고 계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뜨끔.

입이 닫혔다.

‘어우야. 명치에 돌직구 꽂히네.’

너무 정확한 지적이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이보게, 자네 감히 황태자 전하께 무슨 망언을!”

가르딘 경이 다급히 속삭였다. 그것도 모자라 팔꿈치로 데미안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어찌 그렇게 무엄할 수 있는가. 전하께서는 따로 다 생각이 있으실 것이거늘. 자네의 생각만으로 전하의 의도를 짐작하여 함부로 실망해선 안 되는 법이야!”

……다 들린다, 다 들려.

가르딘 경도 나름 속삭인다고 목소리를 낮추긴 했는데. 그게 이쪽의 면전이라는 점과, 여기가 매우 조용한 침실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한데 웃기는 점은, 그런 가르딘 경의 다급한 훈계가 데미안에게 약간은 통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겁니까.”

데미안이 시무룩(?)해졌다.

이쪽도 조금은 머쓱해졌다.

‘나, 사실은 따로 생각해둔 거 없는데.’

따지고 보면 데미안의 지적 그대로였다. 조금은 반성하는 기분이 들었다. 데미안을 훈계하는 가르딘 경을 말렸다.

“어, 음, 가르딘 경?”

“예, 전하?”

“말은 고맙긴 한데. 데미안 카이엔, 저 친구가 나한테 한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서.”

“……예?”

“맞는 말 한 친구한테 너무 뭐라 하진 말고. 흠흠.”

“어, 음, 알겠습니다, 전하.”

이번엔 가르딘 경이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데미안의 눈길이 또 서늘해졌다.

“전하, 너무하시는군요. 방금 가르딘 경은 전하를 위해 일부러 나섰던 것입니다.”

“헐.”

“한데 그런 충실한 수하에게 무안을 주는 행위는 다시 생각해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이보게, 자네? 전하께 말이 심하지 않은가!”

또 참지 못하고 훈계하는 가르딘 경.

그 훈계에 시무룩해지는 데미안.

‘……니네 뭐하냐.’

라키엘은 그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원작 마검황의 주인공인 데미안. 그가 채찍 같은 존재가 되어 직언을 서슴지 않고 이쪽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

또한 원작 마검황에서는 일찍 죽었던 엑스트라인 가르딘 경. 그가 당근처럼 언제나 이쪽의 곁을 지켜준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게 느껴졌다. 라키엘은 그런 마음을 담아 실없이 웃었다.

“당근 경, 채찍이가 맞는 말 한 거 같은데?”

“어, 음, 죄송합니다, 전…… 예에?”

“당근 경. 이렇게 부르니까 이상해?”

“…….”

“마음에 드나 보네.”

“그건 아니고…….”

“전하. 가르딘 경 같은 충신을 그렇듯 만만하게 대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어허, 자네! 자꾸 전하께 그럴 생각인가!”

“……둘 다 나가.”

결국, 당근 경과 채찍이 녀석, 가르딘 경과 데미안을 쫓아내고서야 라키엘은 편히 잘 수 있었다. 묘하게도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그런 꿈을 꾼 밤이었다.

다음 날 오전, 예정대로 앙케트를 실시했다. 라키엘은 별궁의 시종, 시녀, 잡일꾼, 근위대를 모조리 모았다.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다. 덕분에 점심 무렵엔 500장의 따끈한 설문 결과를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라지만 대체 왜, 다들 건강한 건데!’

팔랑! 팔랑!

설문지를 팍팍 넘기는 라키엘의 손길이 빨라졌다. 안쪽의 내용을 살피는 그의 눈길이 당혹감에 젖었다.

다들 건강했다.

별궁 근무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족들도 대부분 건강했다. 어디가 아파봤자 사소한 질환이 대부분이었다. 진료를 했을 때 화제성이 될 만한, 목숨이 오락가락하거나 누가 봐도 큰 병을 앓고 있거나 하는 사람이 도통 없었다.

‘이건 뭐 장수마을 가족 출신들만 별궁 근무자로 뽑아놓은 것도 아니고!’

라키엘은 절망(?)했다.

그래도 아직 설문지를 다 본 건 아니었다. 그의 손이 더욱 열심히 설문지를 넘겼다.

아직 200장 정도는 남았으니까 어쩌면, 팔랑팔랑. 그래도 아직 100장이나 남았으니까 아마도, 팔랑팔랑. 그나마 50장은 남아 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팔랑팔랑. 이제 겨우 10장 남았는데 제발, 팔랑팔랑.

아직 살펴보지 않은 설문지의 양이 줄어들수록 그의 손이 떨려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초조하게 설문지를 넘겨 가던 그의 손이 딱 멈추었다.

“어?”

……찾았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설문지를 재빠르게 훑었다.

그곳에는…….

[이게 설문에 써도 될 내용일지, 병을 앓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어서 써봅니다. 제게는 8살 된 남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한 달에 한두 번씩, 악마에 씐 듯이 거품을 물면서 온몸을 떨어댑니다. 의사를 불러봤지만 그 누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구요. 성직자님께서도 그저 기도를 열심히 하여 몸에 깃든 악령을 쫓아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하셨어요.]

……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거다.’

촉이 왔다.

그가 명했다.

“여기 이 설문지의 주인공, 당장 데려와.”

명령이 신속하게 이행되었다.

두 시간 후, 라키엘은 설문지에 쓰인 사연의 주인공(?)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시녀의, 8살 먹은 남동생이었다.

“안녕? 네가 조르쥬구나?”

“…….”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원래는 제법 개구쟁이일 듯한 빨간 머리 주근깨의 남자아이. 하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서 잘 있다가 난데없이 근위대의 방문을 받았겠지. 그렇듯 얼떨떨한 사이에 마차를 타고 별궁까지 왔을 테고.’

난생처음 와보는 궁전일 거다. 게다가 눈앞에선 황태자가 인사까지 건네고 있으니 무슨 일인가 싶을 거다.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더 많이 느끼고 있을 터다.

‘일단 긴장부터 풀어줘야겠네.’

라키엘은 몸을 낮추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사탕 좋아해?”

“…….”

“아저씨, 아니, 형은 좋아하는데. 나 먼저 먹을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사탕을 입에 쏙 넣었다. 달콤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하. 맛있다. 그럼 네 차례?”

다른 사탕을 내밀었다. 그제야 아이가 주춤주춤, 눈치를 살피며 사탕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먹지는 않았다. 라키엘도 굳이 먹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이에게 말했다.

“사실 오늘 형이 조르쥬를 보자고 부른 건 네 누나가 부탁을 해서야. 너네 누나가 그러더라? 네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제…… 이야기를요?”

“응. 누나가 그러는데 조르쥬가 요즘 고민이 많아 보였대.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누나는 별궁에서 일하느라 많이 바빴잖아? 그래서 조르쥬의 고민을 잘 들어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해하더라고.”

“그래서 형……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은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돼. 진짜로.”

“……진짜로요?”

“당연하지. 대신 조르쥬랑 나랑 둘만 아는 비밀로. 저어기 있는 아저씨들한테는 얘기하면 안 된다? 잘못 얘기하면 저 아저씨들한테 형이 이놈, 하고 혼나요.”

“에이, 거짓말.”

“진짠데. 정말인데.”

“……진짜로요?”

“그렇다니깐?”

아이에게 살짝 다가가며 쉿,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몸을 더욱 낮추었다. 아이의 작은 어깨를 자연스럽게 한 팔로 감쌌다. 함께 몸을 낮추며 옆의 테이블 아래로 들어갔다. 더욱 은근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사실은 여기가 비밀 장소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건 밖에 있는 아저씨들은 못 들어요. 어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쯧. 들켰냐.”

“네.”

“우리 조르쥬, 똑똑하네. 하여간 요즘 애들은.”

“그래도 다른 애들은 맨날 나 놀려요.”

“놀려? 왜?”

“내가 이상하대요.”

“아닌데. 조르쥬 안 이상한데.”

“이상해요. 다른 애들이 맨날 그랬어요.”

“그거 참 희한하다? 왜 그랬을까?”

조금씩.

자연스럽게.

아이의 표정이 풀렸다.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라키엘이 대한민국의 한의사였던 시절부터, 한의원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보이는 수많은 어린이 환자들을 대하며 체득한 진료 스킬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잠시 후.

마침내 그는 ‘악령이 씌어 발작을 한다’는 아이의 정확한 병명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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