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7화 (37/468)

37화.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2)

키이이잉-!

아스라한 심법이 발동되었다.

써클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신체의 감각이 예리해졌다.

쿵, 쿠웅, 뛰는 심장 소리.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 소리. 들이마시는 호흡과 내쉬는 호흡 사이. 기관지의 미세한 떨림과 횡격막의 요동까지. 라키엘은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금씩, 또렷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내 몸에도 기가 순환하고 있으니까.’

살아 있으니 기혈이 순환한다. 순환하는 기가 곧 마나다. 마나가 깃들지 않은 신체 부위는 없다. 오장육부는 물론이고, 근육과 뼈, 모발, 세포 하나마다 모두 마나가 깃들어 있다. 생명이 작용하는 모든 곳에 드나들고, 머물고, 깃들고, 배어나며, 맥동하고, 숨 쉰다.

라키엘은 그 마나를 느꼈다. 아스라한 심법을 통하여 마나를 느끼고, 마나를 통해 신체를 살폈다. 처음에는 혹시나 싶었다. 한데 놀랍게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이건 마치…… 내가 X선 대신 마나를 사용하는 엑스레이가 된 기분이네.’

혹은, 자기공명 현상 대신 마나로 신체를 탐색하는 MRI가 된 느낌이었다.

‘그럼 다른 사람의 몸도 똑같이 살펴볼 수 있을까.’

손을 움직였다. 아이, 조르쥬의 어깨를 짚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마나써클의 회전수를 올려갔다.

키이이이-!

심장을 둘러싼 써클이 더욱 거세게 회전했다. 마나에 대한 감지력이 한층 올라갔다. 그만큼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혔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비로소 조금씩, 느껴졌다.

‘보인다.’

눈을 감으니 다른 세상이 보였다. 아스라한 심법이 보여주는 또 다른 경지의 풍경이었다. 온통 새까만 세상. 그 속에 흐르는 빛들이 보였다. 아이, 조르쥬의 몸속을 순환하는 마나의 흐름이었다.

움직이는 마나의 줄기가 온통 빛나며 그 경로를 표시해주고 있었다. 마치, 한밤중의 대한민국 국토를 위성 사진으로 찍으면 나오는, 새까만 땅 위로 도시와 사람 사는 지역마다 전기가 밝혀진, 그런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한데 흐름이 역시…… 난리가 났구나.’

라키엘은 침음을 삼켰다.

아이의 몸속을 순환하는 마나의 흐름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 못해 궤멸적이었다. 제멋대로 흐르고 있었다.

원래 기혈의 순환이라는 것은 음과 양, 오행의 이치에 따라 정해진 길을 정해진 순서로 흘러야 하는 법이었다. 사람이 숨을 쉬면 공기가 기도를 통해 드나들듯이. 사람의 맥박이 뛰면 혈액이 심장에서 동맥으로, 신체 말단으로, 다시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되돌아가듯이. 신체의 모든 흐름에는 엄연히 정해진 길이 있었다.

한데 지금 아이의 몸속에서는?

그 정해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마나가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심지어 너무나 강력하게 흐르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리고 꼬인 급류가 계곡과 둑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뇌전증이…… 이런 거였구나.’

기혈의 흐름을 실제로 보니 더 참담하다. 절로 안타까운 심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기분에 휩쓸리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냉정해야 할 순간이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렇듯 마나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런 기회는 소중히 써야 한다.

‘집중.’

라키엘의 눈이 빛났다.

폭주하는 아이의 마나 흐름을 주시했다. 하나하나를 추적하고, 되짚으며, 분석했다.

‘뇌전증의 원인이 되는 흐름을 찾아야 해.’

뇌파의 폭주.

그 실마리가 될 법한 흐름을 더듬었다. 척수 신경을 거쳐, 수많은 신경의 줄기를 탐색했다. 뒤엉키고 꼬인 마나의 흐름을 관찰하고 분류하며 순서를 재분석했다. 추리했다. 추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발견했다.

‘찾았다.’

그의 눈이 아이의 목덜미 옆쪽을 주시했다. 그곳에 아이의 연수에서 목정맥구멍(jugular foramen)을 통해 두개골 밖으로 나오는 신경 줄기가 있었다. 뇌에서 뻗어나오는 12갈래의 뇌신경(cranial nerve) 중의 10번째 뇌신경.

바로, 미주신경(vagus nerve)이었다.

한데 그 신경을 따라 흐르는 마나의 신호가 매우 이상했다. 그냥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끔찍할 정도로 난폭했다.

파츠즛! 파즛!

스파크가 튀듯이 신경 신호가 날뛰었다. 마치 운석이 떨어지듯. 주위를 초토화하듯. 어긋난 신경 신호에 얻어맞은 미주신경이 경련했다.

이내 신경질적인 기혈의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연못에 던진 조약돌 때문에 파문이 생겨나듯. 바다에 떨어진 운석 때문에 해일이 발생하듯. 미주신경에서 시작된 파멸적 기혈의 뒤틀림이 아이의 연수(medulla)를 휩쓸었다. 그곳의 미주신경핵(vagus nerve nucleus)을 뒤엎었다.

파장이 두뇌 전체로 확산되었다. 괴멸적 신경 신호의 폭주가 전신으로 몰아닥쳤다.

‘이거였어.’

라키엘은 비로소 깨달았다.

마침내 원인을 찾아냈다.

‘미주신경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신경 신호. 그게 연수를 거쳐 미주신경핵을 자극하고, 그 자극이 두뇌 전체의 신경 폭주를 유발하는 거였어.’

그는 더욱 집중력을 올렸다. 미주신경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곳에서 발생하는 신경 신호의 패턴을 관찰했다. 기억했다. 새겼다.

그러는 사이, 아이의 몸속에서 날뛰던 마나의 흐름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전신강직대발작 증상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럼 나도 여기까지.’

다행히 볼 것은 다 보았다.

라키엘은 집중력을 풀었다.

아스라한 심법의 발동을 중단했다. 거세게 몰아붙이던 써클의 회전도 멈추었다.

키이이이…….

마나를 통해 엿보이던, 아이의 몸속 세상이 멀어졌다.

눈을 떴다.

눈꺼풀 밖의 익숙한 세상이 보였다. 한데 그 세상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어쩐 일인지 모든 사물이 두세 개로 겹쳐 보였다.

“……으읏.”

다리에 힘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보니, 볼을 따라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의 어깨를 짚었던 손도, 팔뚝도 마찬가지였다.

‘나, 탈진한 건가.’

무의식중에 아스라한 심법을 극한까지 발동했었나 보다. 그만큼 심법을 활용하는 진단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인가 보다. 사실 이쪽도 아직 겔겔거리는 팔자니까.

어지러웠다.

속이 메슥거렸다.

“……전하!”

주위에서 외치는 소리.

하지만 라키엘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어 보였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아이의 상세부터 살폈다.

“…….”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다. 발작이 끝났는지 혼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라키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우 서너 걸음 떨어져 있지만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가르딘 경, 데미안, 특근대와 근위대원들.

그들을 향해 짐짓 히죽 웃어 보였다.

“담요를 가져와. 아이한테 덮어줘. 이 아이, 탈진했어. 경련에 시달리느라 전신의 근육이 극도로 지쳤을 거야. 그러니 지금은 휴식이 가장 중요해. 깨우지 말고 이대로 재워. 침대로 옮기지도 마. 큰 소리 내지 말고. 소란 떨지도 말고.”

“저, 전하?”

“그리고 나도 좀…… 쉬어야겠네. 베개랑 담요, 하나 더 가져오도록.”

“……전하!”

누군가의 외치는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 돌았다. 조금은 거칠게, 머리가 바닥과 턱, 만나는 둔탁한 감각. 천장이 빙글빙글.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어두워졌다.

잠이 쏟아졌다.

이내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겼다.

‘……어으, 머리야.’

푹 잠들어 버렸던 걸까.

라키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주위는 그리 밝지 않았다. 일렁이는 불빛 몇 줄기만이 밤에 물든 침대 근처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침대 곁에선…….

“일어나셨습니까.”

이쪽을 바라보는 데미안.

새까만 흑발 사이로 비치는 녀석의 얼굴이 유난히 매끈해 보였다.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

소설로 접하고 상상하던 주인공을 실물로 보면 이런 기분인 거구나. 서로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그런 이쪽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탓일까. 데미안 녀석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반나절을 누워 계셨습니다.”

“그런가. 자정이 지났겠군.”

“예. 가르딘 경은 조금 전까지 곁을 지키다 잠깐 쉬러 들어갔습니다.”

“쯧. 주치의 주제에 환자가 의식을 잃었는데 자기는 자러 들어가?”

“제가 안심시키고 들여보냈습니다.”

“안심을 시켜?”

“예. 곧 깨어나실 걸 알았으니까요.”

말해놓고 부연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데미안이 잠깐 멈칫했다가 재차 말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뭐랄까요. 냄새가 느껴졌습니다.”

“냄새?”

“예. 내쉬는 호흡의 냄새가 미묘하게 바뀌시더군요.”

“그래서 내가 곧 깨어날 걸 알았다?”

“조금 이상하지만, 그렇습니다.”

“이상하긴 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듣기에 따라서 이상한 말이긴 하다. 호흡의 냄새가 미묘하게 바뀐 걸로 이쪽이 깨어날 걸 알았다니. 아니, 그 이전에, 그 정도로 미세한 냄새의 차이를 감지했다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데미안이라면?

‘가능하지.’

아마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으로 올라설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그날이 오면? 전신의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이른바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시달리게 되겠지.

‘물론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할 테고.’

그러니 그 문제는 나중에. 녀석이 정말로 증후군에 시달릴 때쯤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라키엘은 화제를 돌렸다.

“아이는?”

“조르쥬는 아까 저녁 무렵에 먼저 깨어났습니다. 많이 피곤해하더군요.”

“그렇겠지. 그렇게나 발작에 시달렸으니까.”

“예. 저녁을 든든히 먹인 후에 다시 푹 재웠습니다.”

“그래. 잘했어.”

“한데 그 아이, 정말로 악령이 들린 게 아닌 겁니까?”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미신 같은 현상이 아니야. 뇌신경 질환이야.”

“뇌신경…… 말입니까?”

“으음. 다행히 원인도 찾아냈고.”

그렇다.

찾아냈다.

라키엘은 아까 낮의 일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시도해본, 심법을 활용한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낯설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로 성공했어. 마치 내가 아이의 몸속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그런 기분……. 어쨌건, 발작의 원인은 미주신경에 있었네.’

그렇다면 치료법은 하나다.

‘미주신경 자극술.’

병원에서 시행하는 수술이었다.

왼쪽 목 부위의 미주신경에 전극선을 삽입하는 수술. 그렇게 삽입된 전극선이 미주신경에 미세한 전기 자극을 주면?

‘그 자극이 뇌로 전달되고, 뇌전증 발작을 줄여주게 되지.’

작은 수술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뇌전증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시술 후에 지속적인 경과를 관찰하고, 전기 자극의 크기를 조절하여 맞춤 치료를 할 수 있다.

게다가 후유증도 매우 적다. 환자의 상황과 증상에만 맞는다면, 매우 이상적인 치료법이 될 수 있는 시술이었다.

‘특히나 조르쥬 같은 경우엔 더욱 안성맞춤이야. 미주신경의 신경 폭주가 원인이 되어서 뇌전증이 발생하는 거니까.’

이런 경우엔 가바펜틴(gabapentin)이나 발프로에이트(valproate), 카르바마제핀(carbamazepine) 등의 약물치료가 필요 없다. 이곳에 없는 그 약물을 구해보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 외의 치료용 대마 오일(CBD)를 이용하거나, 케톤생성 식이요법 등의 대안치료를 탐색할 필요도 없다.

그냥 미주신경 자극술이면 된다.

그리고 라키엘은, 미주신경 자극술을 이곳에서 구현할 방법을 이미 구상해둔 상태였다.

‘아까, 혼절하기 직전에 생각했지.’

생각했고, 궁리했다.

고민하고, 추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떠올렸다.

‘시도해볼 가치가 있어.’

또한, 지금은 미적거릴 이유도 없다. 라키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자.”

“……예?”

이쪽이 대뜸 건넨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 셔츠와 겉옷을 쇽쇽 챙겨입는 이쪽의 모습에 눈썹을 찡그렸다.

“이 오밤중에, 어딜 가자는 겁니까?”

“황궁.”

“…….”

“시도해봐야 할 게 있거든. 일단 따라와.”

“……알겠습니다.”

녀석과 함께 침실을 나섰다. 별궁을 떠나, 자정이 지난 황도의 거리에 마차 덜컹거리는 소리를 남기며 이동했다.

황궁에 도착했다.

“밤중에 수고.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에게로 안내해줘.”

“자네티스 경에게…… 말입니까?”

깜깜한 밤에 황태자를 맞이하게 된 근위기사가 눈을 끔벅끔벅 떴다. 라키엘은 매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아, 알겠습니다.”

근위기사의 안내를 받았다. 정원과 복도, 계단과 모퉁이를 몇 개나 지나쳤을까.

“이곳입니다.”

마침내 궁정마법사, 자네티스의 숙소에 도착했다. 라키엘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연히 안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누, 누구신가!”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고 여러 사람이 우르르 들어가는 통에 화들짝 놀란 걸까. 영화 ‘반x의 제왕’에 나오면 어울릴 법한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잠옷 차림으로 기겁하는 모습이 보였다. 궁정 마법사 자네티스였다.

아마도 단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깨어난 것이리라. 그 모습에 라키엘은 인간적인 죄송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자신이 떠올린 시도를 하려면? 사람들 훤히 깨 있는 낮보다는 이런 오밤중이 제격이니까. 이런 때라야 해볼 수 있을 부탁을 가지고 왔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의 뇌전증을 치료해야 하니까.

‘그래야 성공적인 치료 사례가 미담으로 퍼져서 별궁 한의원에 손님들이 와글와글 몰려들고 내가 보너스 수명을 퍼받을 거니까!’

아이를 위한, 인도적인, 무슨 인간적인, 그런 이유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잘 먹고 잘 자고 무병장수하기 위해서다.

그런 일념을 새삼 다졌다. 궁정 마법사에게 대뜸 다가갔다. 얼굴 가득 티타늄 철판을 깔았다.

“자네티스 경,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혹시…….”

“예?”

“내 등짝에 전격 마법 한 방만 지져줄 수 있나?”

“……제가요?”

꿀잠 잘 자다가 난데없는 부탁을 받은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그의 눈동자가 혼돈과 당황의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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