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비고를 털어라 (2)
“어찌하여 네가 이 시간에 짐을 찾아왔단 말이더냐.”
넓고 호화로운 집무실이다. 제국 지배자의 공간답게 여유가 넘친다. 어지간한 7, 80평대 대형 아파트 거실? 그것조차 소박한 고시원 골방으로 여겨지게 할 만큼 광활한 집무실이다.
한데 그런 이곳이 좁게 느껴진다. 방금, 황제가 꺼낸 한마디 물음 때문이었다.
‘역시 황제. 이 양반은 볼 때마다 압박감이…… 어우야.’
라키엘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저 짧게 건네어 온 황제의 한마디가 너무나 묵직했다. 평범하게 내뱉는 물음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과연 제국의 지배자다운 모습이랄까.
하지만 라키엘은 그 압박감에서 금방 벗어났다. 비결은 간단했다.
‘한국에서 임대료 밀려서 눈치 보고 지낼 때…… 화장실 앞 복도에서 마주친 건물주가 더 무서웠으니까!’
한창 한의원이 망해가고 있던 때가 떠올랐다. 임대료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건물주와 마주쳐 버렸던 순간엔 어떠했던가.
독사 앞의 개구리.
군단장 앞의 훈련병.
혹은, 열흘 굶은 씨름선수 앞에 차려진 삼겹살이 된 기분이었다.
‘어휴. 생각하지 말자.’
그는 쑴펑쑴펑 몰려오려던 PTSD를 얼른 털어냈다. 덕분에 눈앞의 황제가 주는 압박감도 함께 털어낼 수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제국의 합당한 지배자를 뵙나이다.”
적절하게 예를 표했다.
이쪽을 향한 황제의 눈길이 깐깐해졌다.
“짐의 물음은 그저 판에 박힌 인사를 받겠다는 뜻이 아니었다만.”
“…….”
“어찌하여 이 시간에, 예고도 없이 짐을 찾아왔는지를 먼저 물었지 않았더냐.”
황제,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 못마땅한 기색이 서렸다. 황태자를 보는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실은? 겉으로만 그런 표정과 눈빛을 보이고 있을 뿐. 라키엘을 바라보는 황제의 속마음은 예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흥미롭구나.’
까탈스러움을 가장한 황제의 눈빛 깊은 곳. 그곳에서 희미한 호기심과 기대감의 감정이 꿈틀거렸다.
‘네가 제 발로 먼저 짐을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한데 오늘, 그런 일이 벌어졌다.
예고도 없이 라키엘이 찾아왔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뭔가 착오가 있겠거니. 궁내부장이 착각을 하였겠거니 여겼더랬다. 한데 확인해보니 진짜였다. 라키엘이 알현을 청하고 있단다. 하여 녀석을 즉시 이곳,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요즘 기이한 짓을 하도 벌이고 다니는 이 녀석이 이번에는 또 무슨 바람으로.’
황제는 문득, 최근 듣고 있던 소식을 떠올렸다.
발작을 일으키는 아이를 치료했다던가. 그걸 입소문을 내며 별궁에 한의원이라는 걸 차렸다던가. 심지어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받아 사람들을 진료하고 있다던가.
‘대체 무슨 수로. 무슨 생각으로.’
보고를 받으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언제 그런 의술을 익혔는지 의문이었다. 큰아들의 의도를 선뜻 이해할 수도 없었다.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인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는지. 파악해보려 해도 선뜻 짚이는 구석조차 없는, 실로 기이한 행보였다.
‘하여 그렇잖아도 조만간 녀석을 불러 여러 가지를 물어보려 하였는데.’
마침 녀석이 이렇듯 제 발로 찾아왔다.
잘된 일이다.
흡족한 변화다.
하지만 황제는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사자 같은 사내였다. 그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기쁨의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근엄하고 위압적인 눈빛으로, 못마땅한 기색만 짐짓 내보였다.
“짐이 물었으니, 황태자는 고하라.”
고할 것이 없다면 썩 물러가거라.
눈빛으로 압박했다.
황태자가 대답했다.
“한 가지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요청?”
“예, 폐하.”
라키엘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황궁 비고를 열람하고 싶습니다.”
“……황궁 비고를?”
“예, 폐하.”
“어찌하여?”
황제의 물음 앞에 라키엘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가 협상의 시작이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최근 제가 별궁에서 한의원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제법 많은 환자들이 와서 진료를 받는 중입니다. 한데 사흘 전, 어떤 귀족가의 부인이 심각한 질환을 안고서 별궁을 찾아왔습니다.”
“……심각한 질환?”
“예, 폐하. 발진 티푸스라는 질환이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질환이다만.”
“설명을 드리기는 복잡하오나, 고열을 동반하며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서운 질환입니다.”
“한데? 그 환자의 질환과 네가 황궁 비고를 열람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상관이 있습니다.”
“있어?”
“예, 폐하.”
“어떤 상관이 있지?”
“환자의 질환을 치료하는 데에 도움이 될 물건이 비고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황궁비고일 것이다. 라키엘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제국 지배자의 입에서 곧바로 반론이 나왔다.
“흐음, 나는 네가 밝히는 이유의 진실성을 선뜻 믿을 수가 없겠구나.”
뒤이어지는 황제의 목소리가 점점 까칠해졌다.
“아무리 들어도 의구심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발진 티푸스? 들어본 적이 없도다. 과연 네가 내린 그 진단이 정확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아니, 그보다, 혹시 너는 애먼 환자를 핑계로 삼아 사사로이 황궁비고를 열람하려는 것이 아닌가?”
“…….”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황제의 시선.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눈빛 앞에 라키엘은 내심 혀를 내둘러야 했다.
황제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혹은 시종일관 보이는 불신 가득 까칠한 태도 때문에? 아니었다.
‘쯧. 이 아저씨,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네.’
은근슬쩍 황제의 의도가 느껴졌다.
한국에서 수많은 환자를 진료했던 경험. 그 와중에 별별 사람들을 다 겪으며 쌓은 짬밥. 덕분에 대강 눈치로 분위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짜다. 황제 이 양반, 지금 날 떠보고 있는 거야. 일부러 까칠하게 굴면서 즐기고 있어.’
어째서?
답은 간단했다.
‘소설에서도 이런 모습이 종종 나왔지. 라키엘이 죽기 전엔 라키엘에게. 라키엘이 죽고 난 후엔 2황자에게. 계속해서 일부러 태클을 걸었어. 반응을 살펴보며 평가를 했지. 과연 자신의 후계자로 적합한지를 말이야.’
마치 시험을 내주고 그걸 즐기는 사람처럼. 만점짜리 답안지를 기대하며 희열을 느끼듯이. 일부러 태클을 거는 게 느껴졌다.
‘어오, 진짜. 아빠 찬스 써먹기 더럽게 힘드네.’
라키엘은 투덜거렸다. 황태자가 된 건 좋은데. 하필이면 황제라는 양반이 저런 인간 불신 태클 장인(?)이라니.
‘자고로 사람은 가진 빽을 잘 써먹어야 인생이 활짝 핀다고 그랬는데. 그 격언대로 사는 게 왜 이렇게 어렵냐. 인생 난이도 진짜. 후우.’
하지만 마냥 투덜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라키엘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폐하.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가 말씀드린 환자는 생사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것만은 사실이겠지. 하지만, 과연 발진 티푸스라는 네 진단이 정확한 것인가?”
“정확합니다.”
“어떻게 그걸 증명하지?”
“으음, 그건…….”
“짐은 이해가 아니 되는구나. 생각해보거라. 너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지. 하여 성장기의 대부분을 병상에 누워서 지냈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는 황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기본적인 예법, 교양, 역사, 철학 등의 수업만 간신히 들었지. 그것도 누운 채로. 그보다 깊은 수준의 제왕학, 군사학, 경영 등의 수업은? 시작조차 못하였다. 하물며 의학은 말할 것도 없지.”
“…….”
쓰읍.
이거, 학력으로 사람 두들겨 패는 건가. 라키엘은 억울함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 한의학을 전공했던 나날과 그 이후에 쌓았던 경력을 PPT로 착착 정리해서 일목요연 야물딱지게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가 그런 이쪽의 속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황제의 신랄한 디스 폭격이 이어졌다.
“말 그대로 너는 의학을 접해본 적도 없다. 당연히 의학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없는 백지상태일 것이야. 한데 그런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한의원이라는 것을 열고, 환자를 받으며, 감히 진료까지 한다는 건지 이해가 아니 되는구나.”
“그건…….”
“혹시 너는 지금, 스스로가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는 착각에 겨워 타인의 몸과 건강을 챙겨보겠다는 허황된 우월감, 혹은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
“하여 짐은 의심이 되도다. 네가 과연 제대로 환자를 돌보는 게 맞는지. 네가 내리는 진단을 믿을 수 있을지를 말이다.”
황제의 청산유수 같은 디스 폭격이 끝났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눈빛을 똑바로 받아냈다. 그러자니 자연히 황제의 의도가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하면, 폐하께서는 저를 시험하고 싶으신 것이로군요. 맞습니까?”
“그러하다.”
방금 황제가 희미하게 웃은 걸까.
자신의 의도를 단번에 맞춘 것이 흡족해서?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짐이 한 가지 시험을 내리마. 네게 환자를 돌볼 자격이 있는지, 네가 내리는 진단이 정확한지를 판별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떤 시험입니까.”
황제가 손을 들었다. 지금껏 곁에 묵묵히 서 있던 사내를 가리켰다. 황제의 근위대장인 로베르토 경이었다.
“시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여기, 근위대장은 최근 사소한 질환 한 가지를 앓기 시작하였지. 하니 짐이 묻겠도다. 너는 근위대장을 괴롭히는 질환이 무엇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진단하여 맞추어보거라.”
“이 자리에서 말입니까?”
“그렇다. 혹시 자신이 없는가?”
“아닙니다. 다만 약속 한 가지를 받고 싶습니다.”
“약속?”
“예, 폐하. 만일 제가 근위대장의 질환을 맞추어 폐하의 시험을 통과하면…….”
“황궁 비고의 열람을 허락해달라는 것이겠지. 맞는가?”
“바로 그러합니다, 폐하.”
“좋다. 약속하마.”
황제, 아스테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는 확신했다. 근위대장이 최근 앓고 있는 질환. 그걸 라키엘이 맞추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당연하지. 그걸 맞출 방법은 없다. 그 어떤 정교한 진찰로도 단숨에 알아보기 어려운 질환이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라면 더더욱.’
황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매일 근위대장과 붙어 다니는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조차도 얼마 전, 근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사실을 알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 남모를 질환을 알았지 않았던가.
‘한데 네가 무슨 수로 그것을 진단하고 맞추겠는가.’
이건 절대로 못 맞춘다. 세상 최고의 명의가 와도 못 맞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황제는 확신을 담아 생각했다.
그 사이, 라키엘이 근위대장에게 다가갔다. 근위대장의 손목을 짚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러고만 있었다. 그걸 보는 황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한데 그러던 어느 순간.
라키엘이 눈을 떴다.
황제를 돌아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근위대장님, 원형탈모네요?”
“……앗, 아아.”
삽시간에 정답으로 명치를 후드려맞은 근위대장의 눈빛이 서글픈 우수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