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6화 (46/468)

46화. 만년설을 획득하다 (1)

“대박.”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읽은 방패의 안내문을 거듭해서 곱씹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이 방패, 겉보기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마나를 주입하면 냉기 실드가 형성되는 방식이었네.’

겉보기엔 그저 초라했다. 납작하고 동그란데 손바닥만 한 크기. 딱 카페에서 쓰는 진동 호출벨에 쓸데없는 손잡이만 달아둔 모습이었다.

한데 저 손잡이를 잡고 마나를 주입하면? 냉기 실드가 생성된단다.

‘……온오프 방식은 못 참지!’

머릿속에 이 방패의 활용 방법이 떠올랐다. 수많은 가능성이 함께 연상되었다. 제법 그럴듯한 계획들도 함께였다.

라키엘은 결심했다.

‘이걸로 하자.’

어차피 하급 비고 전체를 둘러본 마당이었다. 한데 냉기와 관련된 물품은 딱 이거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안내문의 내용이 진짜인지 확인은 해봐야겠지.’

라키엘의 눈빛이 깐깐해졌다.

사실 당연한 소리였다. 자고로 득템 전의 확인은 필수이자 국룰이다.

내용물의 특징이 제품 안내서와 일치하는지. 혹시나 고질적인 결함이나 치명적인 단점은 없는지. 내가 사용할 용도에 적합한지. 어딘가 파손된 불량품은 아닌지. 사용 후기가 악담으로 가득하진 않은지. 쓸데없는 돈지랄 플렉스 지름질인 것은 아닌지.

작동 방식이 특이한 물건이라면 더더욱 꼼꼼한 확인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니, 하다못해 마트에서 3천 원짜리 고무장갑을 사도 사이즈가 맞는지는 보고 사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건 쉽게 얻은 찬스가 아니야. 무려 황제를 설득해서 얻어낸 비고 열람권이라고.’

오늘 밤 이곳을 열람하고 챙겨갈 수 있는 물건은 딱 하나. 그 하나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라키엘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선반의 유리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 놓인 방패, 만년설의 손잡이를 잡았다.

“……읏, 츠.”

차가웠다. 냉동실에서 갓 꺼낸 싱싱한(?) 각얼음을 맨손으로 잡은 기분이었다.

참았다.

꺼내 들었다.

안내문의 내용을 떠올렸다.

‘사용자가 마나를 주입하면 여기, 중앙부의 코어가 마나를 냉기로 변환한다고 했지.’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마나써클이 눈을 떴다.

키이이잉-!

심장을 둘러싼 고리가 회전했다. 체내의 마나를 증폭하며 순환시켰다. 라키엘은 만년설을 쥔 오른손에 마나를 집중했다. 만년설 손잡이에 마나를 주입했다.

하지만…….

……츠즈즛?

냉기가 형성되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만년설의 본체 코어가 심하게 진동했다. 마치 진짜 카페 진동 알림벨처럼.

부우우우웅-!

“…….”

이거, 당장 아이스 아메리카노 받으러 가야 할 거 같은 기분인데. 라키엘은 잠시 떠오르는 향수병을 얼른 치웠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냥 무작정 마나를 주입해선 안 되는 거였네.’

손잡이를 잡고 있으니 느껴졌다.

마나를 주입하는 내내 되돌아오는 손잡이의 진동이 불어넣는 마나의 양에 따라 실시간으로 강해졌다가 약해졌다. 그 피드백을 통해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마나를 밀어 넣어선 안 돼. 냉기 실드를 생성하기 위한 적절한 투입량이 있는 거야.’

마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힘을 조절해서 적절하고 일정한 RPM(분당 엔진회전수)을 유지하는 것처럼. 그렇게 최적의 엔진 효율을 뽑아내고 연비운전을 실현하는 것처럼. 혹은, 썸을 탈 때 적절한 밀당의 강도를 지켜야 솔로 탈출에 성공하는 것처럼.

지금 상황도 똑같았다.

‘손잡이로 돌아오는 진동을 느껴보자.’

강해졌다가.

약해졌다가.

그 사이의 간격을 느꼈다. 가장 적절한 마나 투입량의 감을 잡아갔다. 그러다 보니 문득, 한국에서 지냈던 전셋집 샤워기가 떠올랐다.

‘그 수도꼭지 그거, 참 신비로웠지.’

온수와 냉수. 그 사이의 간격이 참 극단적이었다. 조금만 왼쪽으로 당기면 용암처럼 펄펄 끓는 물이 튀어나왔다. 앗뜨거를 외치며 오른쪽으로 살짝만 레버를 밀면? 빙하기 돌도끼 들고 냉수샤워하던 네안데르탈인의 기상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줄 얼음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기에 샤워를 할 때마다 수도꼭지 컨트롤 장인이 되어야 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냉탕과 온탕 사이.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절묘한 적정선. 그 바늘틈 구역에 정확히 수도꼭지 레버를 위치시켜야 화상도, 동상도 입지 않는 쾌적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단련(?)의 나날 덕분이었다. 지금, 그때의 치열했던 경험들이 뜻밖의 도움이 되었다.

‘……찾았다.’

손잡이를 통해 돌아오는 진동 피드백으로 감을 잡아가길 5분째. 마침내 적절한 양의 마나를 투입하게 됐다. 진동이 서서히 사라졌다.

‘지금, 이 투입량을 그대로.’

유지했다.

기다렸다.

기대했다.

이윽고 기대의 보답이 돌아왔다.

……파츠스스!

납작 동그란 중앙부에서 스산한 소리가 났다. 드라이아이스 연기 같은 새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름 1.2미터의 원형 냉기 실드를 형성했다.

“……성공.”

이건 진짜 대박이다.

라키엘은 사용에 성공하자마자 이 방패의 진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광활한 방어 면적. 한데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실드가 전개되었음에도 손에 느껴지는 무게라고는 중앙부의 자그마한 코어와 손잡이의 것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야가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커다란 방패를 쓸 때면 방패의 넓이만큼 이쪽의 시야도 제한되는 법인데, 이 방패엔 그 단점이 아예 없었다. 반투명한 냉기로 형성된 실드 덕분이었다. 실드 건너편이 80% 투과율 틴팅을 한 자동차 앞유리처럼 훤히 내다보였다.

‘하. 이거 진짜 쩌는 물건이네. 한데…… 이런 물건이 하급으로 분류돼서 여기 처박혀 있던 이유를 알겠어.’

성능이 구려서?

물론 아니었다.

직접 사용해보니 체감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방패, 절대로 사용 못해.’

일단 마나를 적정한 양으로만 주입해야 실드가 발동된다. 심지어 그걸 유지하려면? 적절한 마나 투입량을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

사실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보통의 검사들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리라.

‘보통의 경우, 마나는 검을 휘두르며 검기를 발출하는 데에 사용되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신체능력을 끌어올리거나.’

소설 마검황에서 종종 언급됐던 내용이었다.

‘대부분이 그래. 보통의 검사들은 마나를 폭발적인 용도로 사용해. 한데 이렇게 섬세한 방법으로 일정량의 마나를 조절하며 지속적으로 발출하는 거? 절대로 못하지. 소드마스터라면 모를까.’

소드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그게 가능해진다. 한데 소드마스터가 이런 방패에 의지할 일이 있을까.

‘없겠지, 절대로.’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의 심법을 지닌 검사는 마나 조절에 서툴러서 이 방패를 사용 못하고. 마나 조절이 가능한 소드마스터에겐 이런 방패가 굳이 필요가 없을 거고. 그러니까 결론은 간단했다.

‘이 방패, 필요한 사람에겐 진입장벽이 너무 높고, 필요 없는 사람만 사용이 가능한 물건이야. 한마디로 쓰기 까다롭고 성능은 애매한 쓰레기인 거지.’

그게 하급으로 분류된 이유일 것이리라.

한데 자신에게는?

조금 달랐다.

‘내겐 아스라한 심법이 있으니까.’

섬세한 마나 조절이 가능하다. 그게 아스라한 심법의 특징이자 특기니까. 이 방패를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방패, 본체의 크기가 작아서 휴대성까지 엄청났다.

‘안 그래도 전에 2황자랑 겨루려고 만들었던 금속 방패, 너무 커서 거추장스러웠지.’

그 방패, 들고 다니기가 참 빡쎘다. 하여 요즘엔? 별궁 한의원에서 약재 다듬을 때 놓는 소쿠리 받침으로 쓰이고 있었다.

‘어쨌건 만년설 이거, 나한테 딱인 물건이야.’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확인이 끝났다.

확신이 들었다.

‘이거면 가능하다. 딘라이어 부인, 치료할 수 있겠어.’

라키엘의 머릿속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가능성의 실타래를 끌어당겼다. 냉기의 방패, 만년설을 활용할 방법. 그리하여 딘라이어 부인의 쇠한 음기를 되살려줄 방법.

궁리하고, 몰두했다.

계산하고, 각을 쟀다.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거듭했다. 비로소 해볼 만하다는 결론이 섰다.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데미안?”

“예, 전하.”

지금껏 묵묵히 곁에 있던 데미안이 보였다. 그를 향해 말했다.

“또다시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어떤 도움입니까.”

“일단 별궁으로 가서 알려줄게.”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패, 만년설을 야물딱지게 챙기는 황태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언젠가부터, 아니, 처음부터 황태자를 볼 때마다 들던 생각이었다.

‘극도로 이타적인 사람인 걸까.’

처음 황태자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과 검투사들을 구해주었다. 만성적으로 엄습하던 통증을 치료해주었다. 금단현상 극복을 도와주기도 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람들을 치료했지. 발작에 시달리던 꼬마도, 열병을 앓으며 실려온 귀족 부인도. 구분하지 않고 성심껏 돌봤고, 지금도 그러려고 하고 있어.’

그것도 그냥 하는 정도의 노력이 아니었다. 무려 황제와 담판을 벌였다. 담판 끝에 황궁 비고 열람권을 얻어냈다. 그리고 비고의 보물을 챙기고 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아니. 딘라이어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서.’

아마도 그게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한데 저 황태자는 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 걸까.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도 딱히 없을 터인데. 어째서 타인을 보살피려 이토록 애를 쓰는 걸까.

‘볼수록 감탄스러워.’

처음엔 좀 의아했는데. 보면 볼수록 알겠다. 이 황태자는 진짜다. 어떠한 대가조차 바라지 않고 있다. 조금의 보상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저 진실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는 거다.

과연 저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솔직히 존경스러웠다. 황태자를 향한 데미안의 눈길이 따스해졌다. 물론 라키엘도 그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뭐냐, 뭔데. 왜 느끼하게 사람을 쳐다보는 건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방금 나 보는 눈빛이 게슴츠레하더만.”

“…….”

“혹시 밤중에 끌려나와서 졸린 건 아니지?”

“물론 아닙니다.”

“그럼 됐고. 얼른 움직이자. 보너스 수명 빵빵하게 챙기러…… 아니, 환자 보러 가야지.”

“보너스 수명이라니요?”

“아, 환자 챙겨줄 거라고.”

“뭔가…… 다른 뜻인 거 같았는데.”

“아니거든? 뭘 꾸물거리냐.”

“…….”

진짜 아닌가.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키엘을 따라 비고를 나섰다.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별궁에 도착했다. 한데 황태자는 환자를 보러 가지 않았다. 대신 어쩐 일인지 별궁 정원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잡더니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예, 전하.”

알겠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환자들을 돕는 당신의 말이라면. 이타적인 신념을 위해 노력하는 당신의 명령이라면. 설령 그것이 어떤 명령이라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검을 뽑고 말이야.”

파츠스스……!

황태자가 만년설을 들었다. 아까처럼 냉기의 실드를 전개했다. 이쪽을 향해 들어 올렸다.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 실드가 박살 날 때까지 날 좀 후려쳐 줄래?”

“…….”

그거…… 진심?

데미안은 황태자에 대한 존경심이 1그램쯤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저도 모르게, 엉뚱한 의구심 한 자락을 잠깐이나마 품게 되었다.

우리 황태자님.

아니, 이 x끼.

사실은 그냥 어딘가가 살짝 미쳐 있는 놈인 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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