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만년설을 획득하다 (2)
“이 실드가 박살 날 때까지 날 좀 후려쳐 줄래?”
“…….”
이 황태자.
아니, 이 인간.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혹시 미쳤나?’
데미안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혹시 최근 황태자가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은 없었는가. 혹은 과도한 스트레스와 수면장애에 시달린 기색은 없었는가.
돌이켜 보았지만 없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려쳐 달라니, 전하가 들고 있는 그 방패……를 말입니까?”
“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 이쪽을 향해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내가 그랬잖아?”
“예, 그러셨습니다.”
“그게 이건데?”
“…….”
“네가 이 방패를 후려쳐야 딘라이어 부인이 살아날 거야.”
“…….”
“그래야 별궁 한의원이 망하지 않을 거고.”
“…….”
“내 무병장수가 지켜지는 것도 물론이고.”
“…….”
“황가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니까?”
“……그러니까, 제가 그 방패를 후려쳐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어.”
“…….”
이 인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야. 데미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다만, 한편으로는 황태자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론.”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아까 너도 비고에서 이 만년설의 안내문을 봤겠지?”
“예, 봤습니다.”
“그럼 기억하고 있겠네. 안내문의 만년설 사용법과 주의사항.”
“예. 한계를 넘는 강한 충격이 가해질 때면 냉기 실드가 깨어진다던 문구 말입니까.”
“맞아. 그 아래쪽에 있던 주의사항도 기억나?”
“물론입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렵지 않게 주의사항 안내문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충격을 받을 때 파손되어 떨어져 나오는 냉기의 조각은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이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흩어진다고 했지요. 그리고 접촉 시엔 인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니 함부로 만지거나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문구도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정답. 참 잘했어요, 짝짝짝.”
“…….”
“뭐. 왜. 뭐.”
“어쨌건, 그 주의사항 내용과 전하를 후려치라는 명령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는 겁니까?”
“물론.”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냉기 결정체를 약재로 쓸 거야.”
“예? 그거, 인체에 큰 영향을 준다는 주의사항이…….”
“큰 영향이라고만 했지,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딱히 언급이 없었잖아.”
“…….”
“그러니까 얻어내서 살펴봐야지. 사람 몸에 이로울지, 해로울지. 그러자면 먼저 냉기 실드가 깨질 만큼 큰 충격을 줘야 하고.”
“한데 왜 제가…….”
“이걸 깰 만큼 강한 검격을 지닌 사람 중에 네가 제일 믿을 만하니까.”
“…….”
제가요?
왜요?
데미안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되물음을 꾹 삼켰다. 대신 그는 다른 반문을 했다.
“하면, 그 방패를 꼭 전하께서 들고 계신 채로 제 검격을 받아야 합니까?”
“음?”
“그냥 땅에 내려놓은 방패를 제가 치면 안 되겠습니까?”
“아,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입니까.”
“이렇게 되니까.”
황태자가 보란 듯이 만년설 손잡이를 놓았다. 만년설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동시에, 전개되어 있던 냉기 실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태자가 쓴웃음을 떠올렸다.
“보다시피, 마나 공급이 끊기면 냉기 실드도 사라지거든. 그러니까 냉기 실드를 유지하려면 무조건 내가 이걸 잡고 있어야 해.”
“그럼 정리하자면, 전하께서 다치지 않게, 냉기 실드만 깨지도록 힘을 조절해서 치라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바로 그거지.”
“…….”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솔직히 무섭거든?”
“전하뿐만 아니라 저도 무섭습니다.”
“어째서?”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행위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걸고 싶습니다.”
“조건?”
“예.”
“어떤 조건?”
황태자가 반문해 왔다. 데미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전하의 방패를 한 대씩 칠 때마다…… 특별수당을 주십시오.”
“……아?”
고개가 갸웃. 묘하게 찡그려지는 황태자의 표정. 그러거나 말거나, 데미안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검은 사납습니다. 거칠지요. 한데 전하는 고작 방패 하나에 의지해서 그 검격을 버텨내려 하십니다. 심지어 방패가 깨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거, 따지고 보면 제게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한테 위험한 일이 아니고?”
“저한테도 위험한 일입니다.”
“설마,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네가 반역죄를 덮어쓰게 될 거라서?”
“그렇습니다.”
“헐.”
“그러니 전하께 검격 한 번을 뿌릴 때마다 저 또한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허얼.”
“그래서입니다. 검격 한 번에 특별수당, 아니, 위험수당을 주셔야겠습니다.”
“허어얼.”
라키엘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러니까, 때리면서 돈을 받겠다고?”
“예.”
“내가 황금 고블린이야? 때리면 돈 나오는 몹이니?”
“……황금색 고블린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몹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드린 제안은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위험수당을 주지 않으면 내 방패를 후려칠 수 없겠다?”
“예, 전하.”
데미안은 굳은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이건 더 많은 보수를 챙길 적절한 기회라고.
‘황태자 전하. 저는 당신을 은인으로 생각합니다. 대가 없이 사람들을 보살피는 당신의 행동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신에게서 받을 수 있는 돈은 받아야겠습니다.’
돈.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인생에 불행을 가져온 모든 원인은 돈이었다.
자신을 혼자 키워준 어머니. 어머니의 비참했던 마지막. 뒷골목에 고아로 남겨졌던 자신. 어린 나이에 홀로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했던 온갖 고난. 그 끝에 흘러들어 갔던 지하 검투장. 검투장에 매여 빠져나오지 못했던 나날들.
그 모든 시간의 고통이 돈에서 비롯되었다. 돈이 더 많았더라면. 조금만 더 형편이 넉넉했더라면. 충분히 겪지 않아도 되었을 불행이었다. 그래서였다.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돈은 받아야겠습니다. 언제까지 당신이 지금처럼 건강할지. 언제까지 이렇게 당신을 모실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황태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상에 누워 있었다던 사람이었다. 최근엔 다소 건강해졌다지만. 문제없이 활동할 정도로 기력을 찾았다지만. 이러다가 언제 다시 건강이 악화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10년은 모실 수 있을까요.’
길어봐야 10년.
혹은 5년.
어쩌면 더 짧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그랬다. 황태자가 쓰러져 그의 곁을 떠나게 될 날을 대비하고 싶었다. 강제로 일자리를 잃을 날을 대비하고 싶었다.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보수를 받아두는 것.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넉넉히 저축해두는 것. 오직 그것만이 최고의 대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수를 받아야 해.’
충성심과 돈은 별개다.
충성한다고 해서, 존경한다고 해서 무보수로 일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데미안은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받은 라키엘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후아. 데미안 이놈, 딱 소설 속 행동 그대로네.’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소설 초중반부까지 보였던 주인공 데미안의 행동들이 떠올랐다.
‘중반부까지의 녀석은 의외로 짠돌이에 수전노였지. 돈에 한이 맺혀 있었어. 언제나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서 행동했고. 그러니까…… 지금도 그런 거네. 딱 그거네.’
녀석이 뻔뻔하리만치 내미는 요구. 고집을 부리는 듯하는 저 눈빛. 그 모든 것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소설 속 데미안의 모습을 겹쳐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뭐,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정말이십니까?”
“그래. 검격 1회당 하루치 봉급. 어때?”
“좋습니다.”
스르릉.
마침내 데미안이 검을 뽑았다.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만년설을 들었다. 냉기 실드를 전개했다.
……파츠즈즈.
“들어와.”
“알겠습니다.”
검을 고쳐잡는 데미안.
“안전을 위해서 처음엔 가볍게 가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만년설 손잡이를 꼭 쥐었다. 자세를 낮추고 검격을 기다렸다. 그 순간, 데미안이 쥔 검이 사라졌다. 아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투컹-!
“……!”
눈앞에 별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확 캄캄해졌다가. 이내 어질어질한 감각과 함께 시각이 돌아왔다. 한데 데미안 녀석이 아까보다 몇 걸음 멀어져 있었다.
아니, 멀어진 것은…….
“후억.”
이쪽이다.
어지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보니 비로소 알겠다. 두 발 앞으로 땅에 고랑이 파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미친. 검격 한 번 막았다고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난 거야?’
그런데 이게 ‘안전을 위해서 가볍게’ 친 거라고?
‘방패는?’
라키엘은 만년설을 살폈다. 제발 한 방에 깨졌기를 바랐다. 한데 아니었다. 냉기 실드는 여전히 쌩쌩했다. 데미안 녀석이 이쪽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깨지는군요. 다시 가겠습니다.”
“어?”
“갑니다.”
“야, 잠깐…….”
투콰앙-!
“……걱.”
다시 눈앞에 별똥별이 번쩍.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보다 더 많이 뒤로 밀려나 있었다. 현기증의 여파도 아까보다 심했다. 그러나 여전히 냉기 실드는 깨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꽉 잡으십시오.”
“어어?”
투콰학-!
“……긕?”
아예 인중에 운석이 떨어지는 기분. 하지만 데미안은 멈추지 않았다. 이 기회에 수당 제대로(?) 뽑아내 보자고 작심한 걸까.
녀석의 검격이 점점 강력해졌다. 그 앞에 간신히 버티고 또 버텼다. 천지창조 순살치킨이 되는 감각이 온몸을 엄습했다.
‘그아악, 미친!’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녀석의 검격이 강력할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받아내는 입장이 되고 보니 느낌의 차원이 달랐다. 이러다간 방패가 아니라 이쪽의 어깨나 허리, 혹은 무릎이 박살 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버텼다.
이미 시작한 마당이었다.
이걸 성공해야 냉기 결정을 얻고. 냉기 결정으로 딘라이어 부인의 음기를 살리는 시도를 하고. 그녀를 살리고. 한의원 개업빨 기세를 이어가고. 보너스 수명을 더욱 차곡차곡 챙기고.
‘무병장수 부귀영화 황족 라이프! 가즈아아!’
언젠가 맞이할 아름다운 미래를 다짐하며 버티고, 또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쩌엉-!
실드에서 처음으로 색다른 소리가 났다. 마치 거대한 솥뚜껑에 균열이 가는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데미안의 폭풍 같던 검격이 거짓말처럼 끝났다.
투둑, 툭…….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가는 기척.
무의식중에 눈을 떴다. 그 기척을 뒤쫓듯 눈길을 보냈다. 비로소 보였다.
“아.”
부서진 유리 조각? 아니, 그보다는 얼음 파편 같은 덩어리. 반투명한 맑은 빛깔의 덩어리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토록 얻고자 했던 냉기 결정이었다.
‘성공이다.’
어질어질한 가운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혹여나 사라질세라, 냉기 결정들을 재빨리 챙겼다.
“괜찮으십니까.”
“……어, 대강은.”
그제야 이쪽을 걱정하는 데미안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렇게 잠시 풀밭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하지만 허투루 흘려보낼 시간이 많지가 않았다.
“끄응, 삭신이야.”
몸을 일으켰다.
데미안의 부축을 받으며 별궁으로 들어갔다. 탕약 조제실로 쓰는 주방으로 향했다. 손질된 갈근탕 재료들을 꺼냈다.
말린 칡뿌리인 갈근.
마황과 대추 속씨.
작약과 감초 뿌리.
생강 뿌리와 육계나무 껍질.
분량을 정확히 나누고, 조합했다. 청정수를 끓이고, 정성껏 달였다. 평소에 항상 만들던 갈근탕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한 가지 과정을 추가했다.
‘냉기 결정. 이걸 넣어보면 어떻게 될까.’
아까 얻은 냉기 결정을 꺼냈다. 손수건으로 감싸고 있음에도, 지독한 한기가 느껴졌다. 제일 작은 조각을 갈근탕에 넣었다.
퐁당.
냉기 조각이 섞이자마자 갈근탕에서 뭉글뭉글 치솟던 김이 확 가라앉았다. 삽시간에 살얼음이 맺혔다. 이쪽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발. 성공해라. 제대로 좀 나와라.’
이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길. 딘라이어 부인의 음기를 북돋아줄 탕약이 되어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그리고 탕약을 마실 준비를 했다.
‘마셔서 써클슬롯에 넣어보면 대략적인 성분 시험을 해볼 수 있겠지.’
슬롯을 통해 아주 소량만. 신체에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해서 몸에 돌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게 해로울지. 혹은 이로울지. 얼마만큼의 음기를 북돋을 수 있을지.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스스로 진맥하며 분석할 수 있으리라.
한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딩동!
뜻밖의 알림음과 함께, 더욱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은 기존의 전통적 탕약인 ‘갈근탕’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였습니다.]
[새로운 레시피의 결과물로 ‘특제 아이스 갈근탕’이 성공적으로 조제되었습니다.]
[이 도전적인 시도가 당신에게 커다란 경험이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스킬이 개방됩니다.]
[‘탕약조제’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명 : 탕약조제 Lv.1]
[당신이 조제하는 탕약은 기존의 탕약보다 약효가 10% 증가합니다. 또한,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에 한하여, 탕약 성분이 인체에 미칠 약효, 부작용, 독성 등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
미쳤다, 이건.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삼켰다. 기대하지도 않던 순간에 개방된 새로운 스킬. 그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