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두 번째 환상종 선택 뽑기 (1)
‘뭐?’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간장에게서 들은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독약을 먹어서 성분실험을 하는 게 주특기인 환상종이 있다고? 실험용 모르모트처럼?’
[간장 : 엉ㅋ]
뭘 그리 놀라느냐는 듯, 당연하다는 듯한 간장의 말이 이어졌다.
[간장 : 내가 시스템 대기실에 있을 때 봤거든. 진짜야. 독이든 약이든 뭐든지 먹고 성분 분석을 주특기로 삼는 환상종이 있더라고.]
‘봤다고? 시스템 대기실에서?’
[간장 : 어.]
‘시스템 대기실이라니, 그건 또 뭔데.’
라키엘은 더욱 의아해졌다. 대기실이란 게 있다니. 처음 듣는 개념이었다. 답은 곧 돌아온 간장의 설명에 있었다.
[간장 : 말 그대로 대기실이지 뭐겠냐. 일종의 라커룸? 선발되기 전에 대기하는 곳? 그 정도로 말하면 되려나. 나도 네가 의식을 일깨워주기 전에는 거기서 자고 있었거든. 여기 심장 형님도, 허파도, 대장도 전부.]
‘그럼 아직 안 깨어난 나머지 오장육부도?’
[간장 : 당연하지. 소환을 기다리는 환상종들도 그렇고.]
‘…….’
라키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스템이라는 거, 대체 뭘까. 생각해보면 참 기이한 구석이 많았다.
‘나한테만 이런 게 보이고 들린다는 것도 그렇고. 마치 날 위해 세팅되어서 마련된 듯한 체계도 그렇고. 대체 뭘까.’
궁금했다. 하지만 궁금증을 당장 명쾌하게 풀 길은 없었다.
[간장 : 암튼 더는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게다가 안다고 해도 말할 수도 없고.]
‘말할 수가 없다니?’
[간장 : 규정이 그래. 금제가 걸려 있어서.]
‘그럼 환상종에 대한 건? 아까 네가 봤다는 성분 분석 주특기 환상종.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특징 같은 건 알려줄 수 있나?’
[간장 : 아니. 절대로ㅋ]
‘야박하구만.’
[간장 :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오장육부 하든가ㅋ]
“쯧.”
정말로 알려줄 수 없나 보다. 라키엘은 더 캐묻는 걸 관뒀다. 그래도 뜻밖의 큰 수확을 얻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러면 역시, 환상종 뽑기가 답인가.’
만약 방금 간장이 알려준 제보가 사실이라면? 환상종을 뽑으면 될 것이다. 그러면 쿠스만의 마비성 맹독의 성분을 분석할 수 있으리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보톡스 침술에 사용할 독의 용량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해보자.’
막막하던 터에 마침 보인 해답의 빛줄기. 라키엘은 그 빛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시스템 창을 열었다. ‘환상종 선택 뽑기’ 항목을 선택했다. 일전에 보았던 안내문이 친절하게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항목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은 소정의 H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선택 뽑기 (2회차) 비용 = 1,500 HP]
[현재 보유 중인 HP : 1,400]
[보유한 HP가 모자랍니다.]
[환상종 선택 뽑기(2회차)를 실행할 수 없습니다.]
“……뭐?”
라키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런 태클(?)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더도 덜도 아니고 HP가 딱 100이 모자란단다. 심지어 귓가에는 오장육부의 웃음소리마저 잔뜩 들려왔다.
[오장육부가 지금 상황을 즐거워합니다.]
[심장 : 어엌ㅋㅋㅋㅋㅋ 봤냐 얘들앜ㅋㅋㅋㅋㅋ]
[허파 : 허ㅋㅋㅋ 파하하핳ㅎㅎㅎ]
[대장 : 쟤 방금 괄약근 떨었지 말입니다ㅋㅋㅋ]
[간장 : 그동안 HP도 안 모으고 뭐했습니까 휴먼ㅋㅋ]
“…….”
뭘까, 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빡치는 기분은. 마치 의기양양하게 버스에 탔는데 ‘잔액이 모자랍니다’라는 야물딱진 멘트를 들은 듯한 수치심이 들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기분을 티 내진 않았다. HP가 모자란 상황이다. 일단은 부족한 HP를 수급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는 묘하게 빡치는(?) 감정을 추슬렀다.
‘잠깐. 이봐들.’
눈 딱 감고 말했다.
‘내가 지금 좀 급해서 그러는데, 혹시 HP 100 정도만 빌려줄 오장육부?’
…….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라키엘이 다시 말했다.
‘야. 다들 듣고 있는 거 안다고. 100 HP만 좀 빌려주라. 어?’
그러자 비로소 반응이 돌아왔다.
딩동!
[당신의 제안에 오장육부가 황당해합니다.]
[심장 : 이야. 쟤 뭐라는지 들었음?]
[허파 : 허…… 파하……ㅋ]
[대장 : HP 빌려달라지 말입니다ㅋㅋㅋ 미친ㅋㅋㅋ]
[간장 : 차라리 가불을 해달라지 그러냐.]
“…….”
돌아오는 반응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기분이 좀 나빴다.
‘감히 오장육부 주제에 사람 요청을 비웃어?’
빠직.
라키엘의 혈압이 고점을 찍었다.
저들에게 누가 주인인지. 어느 쪽이 진짜 갑인지. 확실히 인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좋다.’
그 순간부터였다.
호흡을 멈추었다.
‘그럼 이래도 HP 안 줄 거냐?’
계속 호흡을 참았다. 오장육부의 반응을 기다렸다. 곧, 녀석들의 반응이 돌아왔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에 황당해하고 있습니다.]
[심장 : 야ㅋ 뭐하냐?ㅋㅋ]
[허파 : 흡…… 프흐……?]
[대장 : 헐. 설마 협박 뭐 그런 겁니까?]
[간장 : 맞는 거 같은데?ㅋ]
녀석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라키엘은 계속 숨을 참았다. 그러자 돌아오는 반응이 점점 바뀌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심장 : 어? 어어? 산소 모자라는데?]
[허파 : ……흐…… 프흐흐…….]
[대장 : 저놈 미쳤지 말입니다?ㅋㅋ]
[간장 : 에이. 그래도 지도 괴롭겠지ㅋ]
물론 슬슬 괴로웠다.
그래도 계속 참았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에 크나큰 당혹감을 느낍니다.]
[심장 : 야? 야야? 너 왜 그러냐?]
[허파 : ……ㅎㅓ…… ㅍㅏㅎ…… ㅎ…….]
[대장 : 쟤 정색하는 거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와 협박 실화냐ㄷㄷ]
하지만 이미 시작한 치킨 게임이었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계속 숨을 참았다. 그리고 마침내.
딩동!
[허파 : ……허! 파ᄒᆞㆍ핳하ᄒᆞᄒᆞㅏ핛ㄱ!]
[협박에 굴복한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500]
……협박의 효과는 상당했다.
“퍼학! 하악! 후우!”
라키엘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HP 뜯어내기, 협박, 성공적. 현기증을 가라앉히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머릿속엔 굴복(?)한 오장육부의 야유가 쏟아졌다.
[오장육부가 당신을 힐난합니다.]
[심장 : 야! 허파 죽는다, 인마!]
[허파 : 허…… 파하…… ㅠㅠ]
[대장 : 와 방금 저 괄약근에 소름 돋았지 말입니다.]
[간장 : 형들 우리 ㄹㅇㅋㅋ만 치자.]
하지만 라키엘은 녀석들의 투덜거림을 무시했다. 어차피 이쪽이 잘하는 일이 있으면 또 HP를 후원할 녀석들이다. 게다가 지금은 시급한 일이 따로 있다. 그는 환상종 뽑기 시스템창을 다시 열었다.
딩동.
[선택 뽑기 (2회차) 비용 = 1,500 HP]
[현재 보유 중인 HP : 1,500]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마침내, 뽑기 선택창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망설임 없이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합니다.]
익숙한 안내문과 함께 1,500 HP가 쑹텅 사라졌다. 허공에 홀로그램 안내문이 화려하게 떠올랐다.
파앗-!
[선택 뽑기에 앞서, 당신이 환상종에게 원하는 기능을 밝혀주세요.]
[선택 뽑기에서 제시되는 환상종 후보군은 당신이 원하는 기능에 맞추어 세팅될 것입니다.]
원하는 기능. 그건 명확하다. 라키엘은 아까 간장에게 들었던 제보를 떠올리며 말했다.
‘독이나 약을 먹고 성분을 분석해줄 수 있는, 실험용 모르모트 주특기를 지닌 환상종으로.’
[당신의 요구 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화아악-!
안내문이 광채로 뒤덮였다. 광채가 회전하며 세 갈래 카드로 변했다. 이내 각각의 카드에 간단한 소개 문구가 떠올랐다.
<후보 1 : 난…ㄱㅏ끔…피눈물을 흘린ㄷㅏ…>
<후보 2 : 으앙 또 쥬금 ㅠㅠ>
<후보 3 : 물 먹는 ㅎㅁ>
“…….”
이번엔 또 뭘까, 저것들은. 각각의 카드에 적힌 소개 문구를 노려보았다. 그 사이, 추가 안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시스템으로부터 3마리의 후보를 제시받았습니다.]
[세 후보는 당신의 요구사항을 각각 100%, 50%, 0%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한 번 선택한 후보는 환불이 불가능하니 신중하게 선택해주세요.]
‘역시나.’
지난번 꼬슴이를 뽑을 때와 같은 규칙이었다. 그렇다면 그 뜻은 명확하다.
‘이번에도 세 카드가 각각 대박, 중박, 쪽박인 거구나.’
라키엘은 신중한 눈길로 세 카드를 살펴보았다. 선택은 한 번뿐. 자칫 잘못 선택하면? 공들여 쌓은 HP를 왕창 날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쑴펑쑴펑 피어오르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머릿속 대뇌피질의 추리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짚어보자. 첫 번째 카드는…… 난 가끔 피눈물을 흘린다?’
처음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싶었다. 고도의 은유나 비유인 걸까. 한데 문득, 뇌리를 스치며 떠오르는 지식이 있었다.
‘아, 설마 그건가? 뿔도마뱀?’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났다. 사막에서 사는 작은 도마뱀이었다. 한데 천적을 만났을 때 보이는 방어 행동이 독특했다.
‘눈으로 피를 뿜어냈지. 물총처럼. 그렇게 천적을 놀래거나 당황시키고는 냅다 줄행랑. 그게 그 도마뱀의 생존 전략이었어.’
그렇다면 첫 번째 카드의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가 뜻하는 환상종은? 아마도 그 뿔도마뱀을 기반으로 하는 녀석이 아닐까 싶었다.
‘내 추론이 틀릴지도 모르는 거지만. 일단은 그게 맞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결론은 심플하다. 눈으로 피를 뿜는 녀석. 독이냐 약재의 성분 분석과는 동떨어진 녀석이다. 즉, 자신의 요구사항이 0% 반영된 쪽박이라는 뜻이다.
‘그럼 첫 번째 카드는 탈락.’
라키엘은 과감하게 첫 번째 카드를 무시했다. 그리고 두 번째 카드를 주시했다.
‘으앙 또 쥬금?’
……이건 뭘까.
잠시 생각을 거듭해보았다.
한데 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쓰읍. 너무 애매모호한데. 그럼…… 일단 다음 카드부터.’
답을 모를 때는 과감하게 다음 문제부터 풀기. 수능 시험에서 쓰던 전략을 떠올렸다. 세 번째 카드로 눈길을 옮겼다.
‘물 먹는 ㅎㅁ. 다행히 이건 쉽네. 딱 그거잖아. 물 먹는 하마.’
비교적 간단한 문제였다. 물 먹는 하마의 성능(?)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물을 좋아하겠지. 많이 마실 수도 있겠지. 그만큼 물의 성분을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금은 끌렸다.
‘그럼 이걸로 해볼까? 대부분의 독이나 약이 물을 용매로 삼으니까. 물에 탄 독이나 약 성분을 분석하는 능력도 있지 않을까.’
만일 사실이라면?
대박일 터였다.
물에 탄 모든 물질을 분석할 수 있는 녀석. 생각할수록 유용하고 매력적인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라키엘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진 않았다.
‘한데 만약에, 이 녀석이 ‘물만’ 분석하는 녀석이라면?’
오로지 물만 밝히는 물덕후, 물믈리에, 혹은 극한의 컨셉충 편식러라면? 그러면 난감해진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모든 독과 약’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지, 오직 물만 분석하는 물믈리에의 능력이 아니니까.
‘만약 그런 거면 뽑기 망하는 거지. 생각해보니까 그래. 분석하고 싶은 성분을 물에 타서 먹인다? 그게 가능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였다.
아직 정체를 짐작해내지 못한 두 번째 카드.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두 카드. 하나는 내 요구 50%를, 하나는 100%를 반영한 카드. 어떤 걸 선택해야 하지?’
중요한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가 딱 하나 나온 기분. 그 앞에서 인생을 건 찍기를 하는 느낌이 이럴까. 라키엘은 냉철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맹렬히 생각했다.
그러자 답이 나왔다.
‘그래. 내가 요구한 건 독이나 약을 분석하는 능력이지, 물에 특화된 능력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확률의 문제다.
그렇게 보니 간단했다.
‘물 먹는 하마. 이건 아마도 내 요구사항이 50%만 반영된 녀석일 거야.’
라키엘은 두 번째 카드로 손을 뻗었다. 도박을 하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드를 짚었다.
딩동!
[당신은 후보 2 : <으앙 또 쥬금 ㅠㅠ>을 선택하셨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선택된 카드가 광채로 물들었다.
화아악-!
이윽고 카드가 뒤집혔다.
뒷면에 새겨진 검은 실루엣. 뭔가 납작 동글거리는 형상이었다. 날개 비슷한 하늘하늘한 게 달려 있었다. 이윽고 실루엣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파지지짓! 파직!
카드에서 솟구치는 스파크. 마법진이 발동하며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다. 그 순간, 뭔가가 카드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파츳!
충격파와 함께 날아오는 야구공 크기의 덩어리.
“뽀복!”
“어어엇?”
얼결에 두 손으로 받았다. 자신의 선택을 받아 세상에 탄생한 새로운 환상종. 녀석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이건…… 불꽃…… 개복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