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돈 worry, 非 happy (2)
“……예에?”
시종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황태자 전하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분명 들었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귓구멍 속 고막과 달팽이관에게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듣고도 외면하고 싶었다.
‘별궁의 귀중품과 사치품, 미술품을…… 전부 팔아 버리시겠다니?’
대체 왜?
어째서?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이 꼬리표처럼 도동실 떠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황태자 전하가 다시금 말했다.
“못 들었어? 전부 팔 거라고.”
“귀중품, 사치품, 미술품을…… 전부 말입니까?”
“어.”
“…….”
“으음, 왜 울먹여?”
“외람되오나, 의문이 한가득 떠올라서 말입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
“예, 전하.”
“돈이 필요하니까.”
“…….”
“아까 경이 나한테 말했잖아. 별궁 운영 예산이 다 떨어져 간다고. 돈이 없다고. 예산 추가 편성도 불가능하다고.”
“하오나 전하께서는 폐하께 부탁을 드려보시겠노라 말씀하셨…….”
“실패했어.”
“…….”
“미안.”
“…….”
“그렇게 울상만 짓지 말고. 나도 알거든? 경이 별궁의 물품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관리해왔는지 말야. 하지만 어떡하겠어. 급한 불을 끄기엔 이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데.”
“……알겠습니다, 전하.”
시종장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별궁에 가득한 귀중품, 사치품, 미술품. 모두가 시종장이 직접 관리하고, 데코레이션하던 물품들이었다.
그저 그것들이 좋아서? 아니었다. 별궁의 품격과 권위를 위해서였다. 그저 비싼 것들만 가득 쌓아놓고 주렁주렁 배치하는 것? 그런 걸로는 품격과 권위가 생길 수가 없었다.
가장 아름다운 물건에는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공간과 배치가 필요했다. 그걸 적절하게 구현하고 관리하는 일도 필요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품격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방문자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 있다. 모방 욕구 또한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렇게 상류층의 유행을 선도하는 것. 그것이 황족의 궁전에 귀중품, 사치품, 미술품이 놓이는 이유였다. 또한, 시종장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노력하고 관리했던 이유였다.
‘한데 그걸 다…… 팔아치우시겠다니…….’
아이고 내 새끼들.
시종장은 눈꼬리에 파르르 맺히는 눈물방울을 황급히 털어냈다. 황태자의 명에 따라 관리 목록을 대령했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불도저 같은 행동력을 보였다. 그날 저녁부터 이틀 뒤까지, 목록에 있는 별궁의 모든 사치품, 귀중품, 미술품을 한곳에 모으게 했다. 한편으로 황도의 이름난 수집가들과 고가품 매입자들을 초청했다. 그리고 모든 물품을 몽땅 팔아치웠다.
시종장의 피, 땀, 눈물이 증발하는 가운데. 수많은 명화와 조각상, 보석 장신구와 향수, 명공이 만든 장식용 갑옷, 심지어 금과 은으로 만든 식기까지,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었다.
언젠가 라키엘의 몸으로 처음 들어왔던 날, 이한에게 자신의 바뀐 모습을 자각하게 해줬던 금 손잡이 물잔도 예외가 아니었다. 덕분에 시종장은 더욱 울상이 되어야 했다.
“저기, 전하?”
“어. 왜?”
“이런 것까지 전부 팔아 버리시면…… 식사는 어찌 하려고 그러십니까?”
“식사가 왜 문제야?”
“…….”
“물잔에 금 손잡이 없다고 물 못 마시는 건 아니잖아.”
“하, 하오나…… 그래도…….”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나무 손잡이, 철제 손잡이 물잔을 사용하시겠다니요!”
“그게 잘못인가?”
“…….”
“그래 봤자 물맛 똑같아. 먹고 나면 어차피 다 밖으로 나올 건데, 뭐.”
“…….”
“어쨌건 금붙이, 은붙이 붙어 있는 것들은 다 팔아치우자고.”
“……크흑!”
시종장의 애원도 소용이 없었다. 값비싼 식기는 평범한 철제와 목제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극한의 재고(?) 정리를 하며 사치품을 팔아치운 덕분이었다. 제법 많은 자금이 확보되었다.
라키엘은 그 자금 대부분을 별궁 한의원 운영 예산으로 돌렸다. 그 대담한 결정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음은 물론이었다.
“자네, 혹시 별궁 소식 들었나?”
“별궁이요? 황태자 전하께서 계신 곳 말입니까?”
“어. 그렇지.”
“거기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까?”
“있다마다. 글쎄, 황태자 전하께서 별궁의 귀중품과 사치품을 모조리 팔아 버리셨다는구만.”
“예에? 왜요?”
“왜긴. 한의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라던데?”
“……별궁 한의원이요?”
“그렇다는구만. 소문에 의하면 한의원의 운영 예산이 모자랐다는 거야. 그래서 환자를 받기가 곤란해졌다고도 하고.”
“잠깐, 그럼…… 환자들을 계속 더 보살피려고 사치품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는 겁니까?”
“그렇지. 대단하지 않나?”
“예.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네요.”
“그래. 동감일세. 나도 처음 들었을 때 딱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예. 정말이지, 엄청난 분이시군요. 황태자 전하는.”
“그러게 말이야. 과연 누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아마도 드물겠지요.”
“어지간한 역사서를 뒤져봐도 드물지 않을까.”
“동감입니다.”
……라는 식이었다.
자신의 궁전에 있는 귀중품을 모조리 팔아치운 황태자. 그 돈으로 환자들을 보살피는 황태자. 아름답고 훈훈한 미담이었다. 보기 드문 선행이었다.
그 소식에 사람들은 처음엔 놀라고, 믿기지 않아 하다가,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감동했다. 칭송했다. 절로 라키엘을 향한 호감과 존경심마저 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몰랐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사치품을 팔아치운 라키엘의 행동. 덕분에 수많은 이들의 칭송을 끌어내게 된 그 아름다운 선행. 사실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될, 라키엘이 계획한, 더욱 커다랗고, 교묘하며, 야바위스러운 큰 그림의 일부에 불과했다.
♣
“약을 팔 거야.”
“예?”
“약을 만들어서 판매할 거라고.”
“…….”
저건 또 대체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까. 황태자의 특근대 조장 데미안은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황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점심을 먹던 황태자가 피식 웃었다.
“돈 벌어야지.”
“……그래서 약을 팔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
푹.
라키엘이 포크로 소시지를 찍었다.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사치품을 팔아서 급한 불은 껐잖아.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에 불과한 거거든.”
“설마…… 벌써 그다음을 준비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꿀꺽.
소시지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당연한 이야기다. 자신의 경험으로 보자면, 진짜로 그렇다.
‘한국에서도 그랬지. 임대료 때문에 전셋집을 정리하고 월세로 옮겼어. 전세금으로 임대료를 때웠지. 확실히 잠깐 버틸 임시방편으로는 나쁘진 않았어. 하지만…… 그 뒤가 없었던 게 문제였지.’
돌이켜보면 그랬다.
전세금을 빼서 임대료를 내기. 그건 말 그대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결국엔 제 살 깎아 먹기밖에 안 됐다. 말 그대로 언 발에 오줌 누기 격이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절대 아니었단 소리지. 자금난의 원인은 해소되지 못했으니까. 추가 수익은 여전히 없었던 거니까.’
그게 문제였다.
지속적이고도 안전한 추가 수입원을 만들지 못했던 것. 그게 코로나 사태에 놓였던 한의원이 망한 근본적 원인이었다. 한데 지금 자신의 상황을 보면? 그때와 너무나 흡사하게 느껴졌다.
임대료를 내지 못하던 한의원과 운영 예산이 떨어진 별궁 한의원. 전세금을 빼서 임대료를 충당했던 과거와 사치품을 팔아서 운영 예산을 때운 지금.
한국에서의 과거와, 이곳에서의 지금 상황이 치가 떨리도록 절묘하게 겹쳐져 보였다. 그때처럼 망하긴 싫었다. 같은 전철을 밟으며 한의원을 닫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였다.
“이렇게 잠깐 숨 돌릴 틈을 만들었을 때가 중요해. 장기적이고도 안정적인 자금원을 지금 만들어두지 못하면, 결국엔 임시방편으로 만든 자금이 바닥나는 순간 망하는 거거든.”
한국에서의 경험이 준 쓰리란 교훈. 그걸 말해주며 싱긋 웃었다.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그 자금원으로 약품 판매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
“하지만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제가 듣기로, 이번에 사치품을 판매하며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 정도면 올해 연말까지 한의원을 운영하기에 충분한 돈이 아닙니까?”
“어. 충분해.”
“한데 어째서…….”
“내년이 문제야.”
“예?”
뭔지 모르겠다는 데미안의 표정. 녀석을 향해 씁쓸하게 웃어주었다.
“아마도 황제 폐하가 내년 별궁 운영 예산을 더 깎으실 것 같거든.”
“…….”
데미안이 입을 다물었다.
라키엘은 내심 확신했다.
‘황제라면 충분히 그럴 위인이니까.’
아직도 아빠 찬스를 거절하던 황제의 눈빛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건 마치, 테스트하기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혹은, 굴려먹기 좋은 대학원생을 보는 교수 같은 표정이었다.
‘확실해. 내년 별궁 운영 예산? 더 깎으면 깎았지, 절대로 훈훈하게 베풀 사람이 아니거든, 그 양반은.’
그렇게 이쪽의 능력을 거듭 시험하려 들리라. 아마도 그럴 거라는 슬픈 예감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래서였다.
“내년 예산이 풍족하게 책정될 거라는 덧없는 희망에 매달려선 안 돼. 그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사치품 팔아치운 자금에만 의지하고 버티다간? 내년에 망하는 거야. 그 전에 독자적이고 안정적인 자금원을 만들어둬야 해.”
약을 만들기만 한다고 끝이 아니다. 홍보가 필요하다. 판매망 확보도 해야 한다. 기껏 만든 판매망이 자리 잡고 탄탄해지기까지 또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려면 아직 봄인 지금, 당장,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하지만 데미안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지만 전하. 자금원이 문제라면……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조금씩이라도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기각.”
“어째서입니까?”
“그러면 환자가 줄어들 테니까.”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돈만 생각한다면 데미안의 말처럼 하면 된다.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으면 그것만큼 안정적인 자금원이 없을 터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았다.
‘나는 많은 환자를 받아야 하니까. 그래서 보너스 수명을 최대한 많이 얻어내야 하니까. 그게 한의원을 운영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니까.’
그게 목적이다.
한데 진료비를 받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한의원에 진입장벽이 생겨난다. 찾아오는 환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선 안 돼. 많은 환자를 받고 보너스 수명을 얻기 위해 운영하는 한의원에 돈이 모자란다고 해서 진료비를 받고 환자 숫자를 줄인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말 그대로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는 꼴이다. 주객전도나 다름없다. 쭈쭈바 까먹으면서 꼭다리만 먹고 본체(?)는 버리는 만행과 똑같다.
그래서였다.
“진료비는 안 받을 거야. 받을 생각 없어. 대신 약을 팔아야지. 아주 값비싸고, 그만큼 효과가 확실해서 소장하는 과시 욕구까지 충족시켜주는 명품으로.”
“명품이라니요?”
“브랜드. 황태자가 직접 론칭하는 브랜드 상품인 거랄까. 중상류층 이상의 귀족들이라면, 재산 좀 있고 콧방귀 좀 뀌는 집안이라면, 누구나 가정에 상비해두는 것만으로도 자랑이 되고, 신분의 증명이 되는 그런 고오급 가정용 상비약 개념으로.”
“그런 약이 있습니까?”
“으음.”
“어떤 약입니까?”
데미안의 귀가 쫑긋거렸다. 라키엘의 입가에 자신 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미노타우로스의 담석을 재료로 쓰는 약.”
“미노타우…… 예에?”
“못 들었어?”
“들었습니다. 한데 그걸로 대체 뭘 만드실 생각이신지.”
“미노타우황청심원(Minota-牛黃淸心元).”
“…….”
“어때? 좋지?”
“…….”
이쪽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황태자.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 전하, 어쩐지, 오늘따라 유독, 또라이 사기꾼 약장수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