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63화 (63/468)

63화. 경매 x 같이 하네 (2)

‘저 인간, 경매 진짜 엿같이 하네!’

경매장의 모두는 생각했다.

쑴펑쑴펑 피어나는 억울함. 새록새록 솟구치는 아쉬움. 어째서 자신은 황족 수저가 아닌 것인가. 어찌하여 우리 아빠는 황제가 아닌 걸까.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신분제 사회를 향한 의구심과 평등사회 구현에의 열망(?)을 잠깐이나마 만끽했다.

그리고 다들 깨달았다.

‘저 인간이 황태자가 맞다면…… 이건 글렀구만. 에잉, 씨!’

텄다, 텄어.

이건 파토난 판이다. 다른 이도 아닌, 무려 크레모의 시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시장이 극진하게 ‘황태자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제국에서 황족 사칭은 사형으로 다스려진다.

그러니까 즉?

크레모 시장이 잠깐 미쳤다거나. 먹지 말아야 할 약을 먹었다거나. 불현듯 찾아온 갱년기 우울증에 빡쎄게 젖어들었다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인생에 회의감을 느껴 참신한 자살 방법을 추구하게 됐다거나.

그런 사연이 아니라면 시장이 저럴 리가 없으리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무나에게 시장 피셜로 ‘황태자 전하’ 호칭을 붙여주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가…… 맞는 거구만. 쯥!’

모두의 입에서 고농축 에스프레소보다 깊고 진한 한숨이 나왔다.

사실 이곳 몬스터 경매장에 있는 이들은 평범한 서민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중소 귀족이거나. 상단을 꾸리는 사업가거나. 넓은 토지를 지닌 지주였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권력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자칫 권력자의 눈 밖에 났을 때 자신의 가문이나, 사업체나, 토지가 어떤 곤경을 겪게 될지에 대한 계산이 즉석에서 가능했다.

‘허어. 이번 콜렉션은…… 포기해야겠구만.’

‘쯧! 저걸 나마란에서 다시 팔면서 차익 좀 얻어보려 했더니만.’

‘미안해, 여보. 이번 생일 선물은 다른 걸로 사갈게!’

미노타우로스 경매에 열을 올리던 재력가들. 그들이 하나둘씩 손을 털기 시작했다. 라키엘이 부른 6만 마젠의 호가. 그 이상의 호가를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원래부터 도서관처럼 조용했던 경매장이 이제는 듣기평가 시험장처럼 더욱 고요해졌다. 그 침묵의 공간 사이를 경매사의 시선이 오갔다.

경매사가 사방을 돌아보며 눈길을 주었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실 분이 안 계시냐고. 동서남북 사방팔방을 살폈다. 초조함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번 경매,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데!’

경매사가 속으로 빼액 외쳤다.

진심이었다.

무려 특급 미노타우로스 매물이었다. 일반 미노타우로스보다 갑절은 덩치가 큰 놈이었다. 그런 엄청난 매물을 고작 6만 마젠에 낙찰해줘야 한다니. 너무 아쉽고, 아까웠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나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

경매사의 눈가에 탄식이 배어났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스윽.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그때. 모두가 황태자의 권력남용에 탄식하던 바로 그때. 누군가가 칠판을 들어 올렸다.

[귀네스 데샹 : 70,000 마젠]

“……!”

경매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매에서 물러났던 이들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승리를 자신하고 있던 라키엘의 심장도 덜컹 내려앉았다.

‘뭐? 7만 마젠?’

라키엘은 깜짝 놀랐다. 방금 칠판을 들어 올린 이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깡마른 노인이 그곳에 있었다.

‘누구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데 주위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노인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저…… 저 사람, 귀네스 아니오?”

“귀네스라니?”

“그, 있잖소. 남쪽 앙부아즈 왕가 국왕의 아낌을 두루 받는다는 거상 말이오.”

“……아하. 앙부아즈의 거상 귀네스?”

앙부아즈의 거상 귀네스라니. 라키엘은 귀를 쫑긋 세웠다. 웅성거림이 계속해서 달팽이관을 콕콕 두드려 왔다.

“허허. 앙부아즈의 거상 귀네스라면 우리 황태자 전하 앞에서도 숙이지 않을 만하겠구만.”

“그러게 말이오. 어차피 제국 황가의 백성도 아니니.”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군요. 우리 경쟁국 소속의 상단 경영자이니, 딱히 우리 쪽 황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겠군요.”

“맞습니다. 이 경우엔 황태자 전하가 권력으로 압박을 하게 되면 자칫……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을 겁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주위의 웅성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저 귀네스가 우리의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그렇소?”

“치사한 황태자 전하를 물리쳐줄 구세주!”

“……이보게, 쉿. 목소리가 너무 크네.”

“예?”

“우리 황태자 전하, 들리는 소문으로는 뒤끝이 좀…… 길다더구만.”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그러니 조심하게. 행여나 전하께서 들으면 무슨 경을 치려고.”

……다 들리는데요.

라키엘은 쩝, 입맛을 다셨다. 주위의 숙덕거림 덕분에 깡마른 노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외국의 거상이라서 내 권위가 안 통하는 상대라는 거구나.’

라키엘은 노인을 슬쩍 쳐다보았다. 노인, 거상 귀네스도 이쪽을 보았다. 눈길이 허공에서 얽혔다. 순간 라키엘은 느꼈다. 저 노인, 보통 상대가 아니라고.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저 미노타우로스, 무조건 내 손에 넣는다!’

슥삭삭!

결의를 다지며 71,000 마젠을 칠판에 썼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직 총알은 많이 남았다고. 저쪽이 외국의 거상이라 해도 이쪽 또한 만만하지 않을 거라고. 이쪽은 무려 제국의 황태자라고.

‘그러니 얼마든지 덤벼! 드루와!’

라키엘은 칠판을 들어 올리며 결의를 다졌다. 그 어떠한 꼼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이길 거라고, 무조건 승리하리라고. 굳은 각오를 머금었다.

……는 실패했다.

그냥 아주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젠장, 젠장, 젠장.’

경매장을 나서며 라키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보았던 숫자를 떠올렸다.

[귀네스 데샹 : 250,000 마젠]

앙부아즈 왕국의 거상, 귀네스가 들어 올린 칠판에 적힌 숫자였다. 나름 치열한 경쟁? 그런 것도 없었다.

이쪽이 71,000 마젠을 쓰자마자였다. 귀네스가 이쪽을 보며 피식 웃더니 들어 올린 칠판. 거기에 쓰인 호가가 무려 25만 마젠이었다. 그렇게 특대 사이즈 미노타우로스가 25만 마젠에 낙찰되어 귀네스의 품(?)으로 안겼다.

하여서 이쪽은? 미노타우로스가 낙찰되어 인도되는 모습을 새 남친 생긴 전 여친 바라보듯 쓰라린 심정으로 보아야 했다. 거기에 데미안 녀석이 기름을 붓기까지 했다.

“그래도 패배하셔서 참 다행입니다, 전하.”

“응?”

패배해서 다행이라니? 뭔 소린가 싶었다. 데미안 녀석이 심드렁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준비해 온 10만 마젠을 미노타우로스 하나에 다 들이붓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니까요.”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뜻이야?”

“예, 전하. 게다가-”

“게다가?”

“그렇게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자금을 탕진하시면 제게 주실 봉급이 모자라는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헐.”

라키엘은 혀를 내둘렀다. 이쪽을 앞에 두고 저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데미안 이놈도 확실히 정상인은 아니구나 싶었다.

‘마검황에서도 돈에 집착하는 모습이 나오긴 했는데, 실제는 더하구만.’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반문도 저절로 나왔다.

“쯧. 그럼 봉급 제때 못 받고 밀리면, 금방 때려치우고 떠나겠다?”

“예.”

“……헐.”

“제가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는 이유는 단 하나, 넉넉하고 안정적인 봉급 때문입니다. 한데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하의 곁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을 겁니다.”

“진심이야?”

“예.”

“그래도 내가 널 지하 검투장에서 구해줬는데, 그거에 대한 감사함은 없어?”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봉급 문제와 별개입니다.”

“마음속 감사함과 돈은 따로다?”

“물론입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데미안. 녀석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사실 제 실력이면 어딜 가든 지금 봉급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

라키엘은 말문이 막혔다. 녀석의 저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명백한 사실이자, 진실이요, 팩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맞아. 데미안 녀석, 소설 속 마검황의 이 시기에 이미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지.’

소드 익스퍼트 중급.

대단하다면 대단한 경지이고, 흔하다면 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황실의 근위기사가 되기 위한 커트라인. 지방의 영지에서는 최강자의 자리를 논할 수 있을 수준. 그게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위치였다.

한데 데미안은?

‘그 규격에서 벗어나 있었지.’

보통의 인간을 초월하는 반사신경. 검을 다루는 천부적인 감각. 그리고 야성에 가까울 정도의 투쟁심까지. 녀석은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수준임에도 한 단계 위의 강자들과 대등하게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즉, 실제로는 이 시기에 이미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은…… 소드 마스터를 목전에 둔 경지이지. 인간과 초인의 경계에 선 사람들. 그게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들었어.’

그 정도 실력이면 초대형 용병단에서도 최강자에 거론될 수준이다. 그런 S급 용병이 1년에 버는 돈은 얼마나 될까.

‘엄청난 수준이지. 지금 내가 주는 봉급? 얼마든지 그 정도를 벌 수 있어. 아니, 일이 잘 풀리고 명성이 높아지면 그 이상의 수입도 바라볼 수 있을 거고.’

실제로 소설 마검황 속 초반의 데미안은 그렇게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니 녀석의 저 선언은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이쪽이 주는 봉급을 시원찮다고 느끼는 순간. 혹은 봉급이 조금이라도 밀리는 순간. 녀석은 미련 없이 떠나게 되리라.

‘……그건 좀 곤란해.’

소설 마검황을 읽으며 응원했던 주인공, 데미안. 녀석을 곁에 두는 것만큼 이 세계에서 든든한 일이 있을까. 게다가 앞으로 보일 성장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곁에 두고 싶은 1순위의 인재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세계관 최강자가 내 호위가 되는 거니까.’

문득, 원작 마검황의 전개가 떠올랐다.

라키엘이 죽고. 황제가 쓰러지고. 2황자가 황제가 되고. 제국은 전란에 휩쓸려 몰락한다. 여기서는 그런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진 않을 테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게 아닌가.

‘그러니 보험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곁에 둬야 해.’

게다가 녀석을 곁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다. 녀석이 무조건 이쪽의 곁에서 안정적인 인생을 누려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고 안전해질 테니까.

그 사실을 떠올리며 라키엘은 내심 다짐했다. 데미안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걱정 마라. 봉급 밀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니까.”

“……믿어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경매장에서 야비한 꼼수를 동원하셨던 걸 생각하면 그닥 신뢰가…….”

“…….”

“심지어 꼼수를 동원해놓고도 처절하게 패배하신 걸 보면 그닥 신뢰가…….”

“…….”

“그럼에도 여전히 뻔뻔하게 당당하신 걸 보면 그닥 신뢰가…….”

“……크흑.”

관저에 가서 잠이나 자자. 그동안 쌓인 여독이나 풀자. 경매에서 꼼수를 써놓고 진 것도 치욕스러운데. 데미안에게 팩트 폭행, 아니, 폭격까지 당하니 씁쓸함이 치솟아 역류성 식도염이 야물딱지게 도질 것 같았다.

내일 다른 미노타우로스가 매물로 올라오면 꼭 사자. 신물 섞인 눈물과 다짐을 삼키느라 라키엘은 몰랐다. 오늘, 경매에서의 패배가 전화위복이 될 것이란 사실을. 지금, 거상 귀네스가 사들인 특대급 미노타우로스에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중대하고도 위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그 변화가 오늘 밤, 자신에게 어떤 핵이득을 안겨줄지도 또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