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미노타우로스의 왕 (2)
많이 본 적 있는 눈빛이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침실 벽면. 그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언뜻 마주친 미노타우로스의 눈빛. 그걸 보며 익숙함을 느낀다면 내가 미친 걸까. 혹은,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은 걸까.
‘그러니까 저런 눈빛, 한국에서…….’
본 적이 있다.
묻어두었던 기억 한 줄기가 떠올랐다. 한의원을 개원하고 첫해였을 것이다. 팔순이 다 되어가던 할머니 환자가 계셨다.
신경통이라고 했다. 너무 아파서 잠도 못 주무신다고 했다. 그래서 안 다녀본 병원이 없노라 하셨다. 한데 어떤 병원에서도 통증의 원인을 못 찾아냈다고도 하셨더랬다.
온갖 사진을 다 찍어보고 검사를 받아봤지만. 큰 병원 작은 병원 전부 다녀봤지만. 그럼에도 신경통이 왜 생기는지를 알아낼 수 없었노라 하셨다. 당연히 제대로 된 치료 또한 받지 못했노라고도 하셨다.
‘그 할머니가 처음 내 한의원에 오셨을 때. 그때가 딱…….’
저런 눈빛이셨다. 아픈데 기댈 곳 없는 사람의 눈빛. 막막함이 울분으로 쌓인, 그런 사람의 눈빛.
‘그런데 왜 미노타우로스가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그 전에 더욱 근본적인 의문도 함께 떠올랐다.
‘왜 미노타우로스가 여기서 나와?’
궁금했다. 진심으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쪽은 그저 며칠간의 여정 동안 쌓인 피로에 떡실신이 되어 있었을 뿐이다. 몸살기 때문에 끙끙대고 있었을 따름이다.
한데 난데없이 쾅.
침실 벽면이 부서지고 난리가 났다. 미노타우로스가 커다란 머리를 들이밀고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어쩐지 모를 절박하고 막막한 분노로 핏발을 시뻘겋게 세우고서.
“……푸륵!”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가 콧김을 거세게 뿜어냈다. 사실은 우루스도 지금, 라키엘을 보며 의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놈이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내게 해코지를 하려던 비쩍 마른 노인을 추격해 왔을 뿐인데.
고통과 분노로 물들어 혼탁해진 의식. 그 사이로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까 죽어가던 자신. 그리고 시작된 광포화. 그 직후에 겪었던 일들의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푸륵! 푸르……륵!”
눈앞에 있는 인간들을 다 죽이겠노라고. 그렇게 자신의 울분과, 비명에 간 젖먹이의 한을 풀겠노라고.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눈이 뒤집혔더랬다. 전신을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더랬다.
단숨에 부서지던 우리. 비명을 지르던 인간들. 그들 중에 가장 눈에 띄던 놈. 날 사들이고서 거들먹거리던 늙은 인간. 인간들 사이에서 거상이니 뭐니 하고 불리던 그놈. 그놈부터 죽이고 싶었다.
포효하며 돌진했다. 한데 그놈이 일찌감치 도망쳤다. 호위병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단숨에 후려치고 날렸다.
추격했다. 거상이 도망쳤다. 집요하게 쫓아갔다. 놈도 허겁지겁 말에 올라 내달렸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은 경비병이 있는 곳으로. 이 도시에서 가장 방비가 튼튼한 건물로. 그렇게 놈이 선택한 도피처가 바로 이곳이었다.
놈을 끝까지 추격했다. 놈이 피신한 이곳,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의 정원에 난입하고, 날뛰었다. 하지만 결국엔 놈을 놓쳤다. 더욱 화가 났다. 다 부수자고 결심했다. 가까이에 있던 건물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반드시 죽이리라 다짐했던 늙은 거상, 그놈과 다른 또 하나의 목표를.
“……푸르륵!”
라키엘을 노려보는 미노타우로스의 눈에 핏발이 짙어졌다. 쳐다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눈에 익은 놈이다. 언제? 아까 낮에.어디서? 경매장에서. 늙은 거상 놈과 경쟁하며 나를 사들이려 애쓰던 젊은 인간. 날 사들이지 못했음을 대놓고 아쉬워했던 놈. 그러니까 저놈도 똑같은 놈이다. 늙은 거상과 같은 부류다. 즉, 쳐죽여야 하는 놈이다.
“……누워오옥!”
흉성이 터졌다.
후와아아악-!
주먹을 휘둘렀다.
아까 후려쳤던 그놈처럼 만들어주리라. 단숨에 온몸을 으스러뜨려 버리리라. 다짐하고, 확신했다. 동시에 라키엘의 동공도 급격히 확장되었다.
‘미친!’
맹렬하게 날아오는 주먹. 그냥 주먹질이 아니었다. 주먹의 크기부터가 헬스장에 있는 짐볼만 했다. 어지간한 2층 건물 옥상과 눈높이가 비슷한, 신장 7미터 괴수의 체중이 실린 주먹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멍하니 저걸 맞아줄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죽을 거 같냐!’
힘껏 알뜰살뜰 챙겨온 목숨이었다. 그걸 여기서 한 큐에 삭제(?)당하긴 싫었다.
타앗!
옆으로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주먹질을 피해 보려 했다. 한데 주먹질이 너무나 빨랐다. 그에 비해 이쪽의 회피 기동은 답답하도록 느렸다.
‘……망했다.’
이건 못 피한다. 아무리 봐도 후려 맞는 각이다. 그러면 이쪽은 어떻게 될까. 스쳐도 전신 골절 당첨일 거 같은데. 운이 좋아 봤자 내장 파열은 세트 메뉴일 거 같고
‘파리채에 맞아 죽는 똥파리가……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아득해지는 기분. 그 속에서 얼핏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 한데 그 순간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기 직전, 뭔가가 옆구리를 강하게 밀어쳤다.
뻐억!
“……꾸엑!”
몸이 기역자로 휘었다. 왼쪽 갈빗대가 오손도손 우수수 부러진 건 아닐까. 숨이 턱 막히는 충격과 함께 몸이 옆으로 날려갔다.
그 직후.
후우우웅-!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주먹이 이쪽이 있던 공간을 휘저으며 지나갔다. 마치 최고 속도로 달리는 KTX 열차가 코앞으로 지나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였다. 허공을 가르는 미노타우로스의 주먹. 그 너머에 데미안이 있었다. 한쪽 다리를 들고 있었다. 마치 옆차기를 한 듯한 자세였다. 그걸 보자 뒤늦은 깨달음이 전두엽을 땡 하고 쳤다.
아하, 저놈이 날 걷어찼구나, 라고.
“커윽!”
콰탕당!
지면이 이쪽을 거칠게 받아냈다. 하지만 아프다고 엄살을 부릴 틈은 없었다.
“구르십시오!”
데미안의 외침. 그걸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그 직후 다시금.
콰아앙-!
위에서 떨어져 내려온 주먹질이 방금까지 쓰러져 있던 자리를 내리쳤다.
‘으으악!’
어째서인 걸까. 왜, 어쩐지 저 미노타우로스가 날 집중적으로 노리는 기분이 드는 걸까.
데굴데굴 구르자마자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데미안에게 걷어차인 옆구리가 콱 쑤셨다. 하지만 그딴 통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달렸다.
침실 출입문 쪽으로 뛰었다.
뒤쪽에서 거친 포효가 터졌다.
“누워오오오오!”
후우우웅-!
거대한 덩어리가 날아오는 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
이쪽의 몸통만 한 돌덩이가 날아오고 있었다. 정확히 이쪽을 조준하고 있었다.
‘으아아 진짜!’
황급히 넘어지듯 또 굴렀다. 머리 위로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질풍처럼 스쳐 갔다.
콰아앙-!
돌덩이가 문을 뭉갰다. 벽면이 무너졌다. 무너진 돌 더미에 유일한 출입구가 막혔다.
‘설마?’
이걸 노리고 돌덩이를 던진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전하와 저, 여기 갇히게 된 듯합니다.”
검을 앞세우고 이쪽을 지키듯 막아선 데미안. 녀석이 등으로 숨을 골랐다. 살기 섞인 기세를 발산하며, 미노타우로스를 노려보며, 광포한 몬스터와 대치했다. 그런 녀석의 말을 냉큼 받았다.
“어, 거기에 미노타우로스 일행도 한 마리 추가해서.”
농담처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실없는 농담이라도 나누지 않으면, 대신 비명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생각해보니 기도 차지 않았다. 도망칠 출입구가 무너져 고립됐다. 덕분에 오밤중에 미쳐 날뛰는 미노타우로스와 이 좁은 곳에서 피 튀기는 짝짜꿍을 하게 생겼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식은땀이 나며 손끝과 입술이 차가워졌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데미안도 이쪽과 비슷한 심정인 걸까. 녀석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들려왔다.
“오늘 이 사태를 무사히 넘기면-”
“넘기면?”
“특별수당 지급, 부탁드립니다.”
“……뭐?”
“이렇게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을 무사히 이겨내고 전하를 지켜내면 말입니다. 그 정도 보수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특별수당을 달라고?”
“예.”
“안 주면?”
“저 혼자 도망갈 겁니다.”
“…….”
와, 이, 씨.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이쪽이 욕하는 것보다 데미안이 먼저 잽싸게 말했다.
“그러니 제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하십시오. 셋을 세면 제가 미노타우로스를 공격할 겁니다. 그러면 놈에게 틈이 생길 테니, 그때 여길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빠져나가라니, 어디로?”
“놈이 부순 저 벽면 말입니다.”
데미안이 힐끗 눈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탈출구가 하나 남아 있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부순 침실 외벽. 그 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여기 2층인데?”
“상관없습니다. 그냥 뛰어내리십시오.”
“다리가 부러지면?”
“여기서 으스러져 죽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이미 외벽 아래에 경비병들이 모여들어 있습니다.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를 공격하는 중입니다. 전혀 효과는 없지만 말입니다.”
“……설령 내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더라도 그들이 날 구해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줄 거다?”
“지금은 그게 유일한 탈출법인 듯해서 말입니다.”
“…….”
이쪽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짓는 데미안. 녀석의 말이 맞았다. 그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 데미안의 기세를 경계하며 빈틈을 노리던 미노타우로스가 움직였다.
“……푸후욱! 느오!”
콰콰콱! 콰작!
미노타우로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왔다. 침실 바닥 일부가 으스러졌다. 거대한 두 팔이 뻗어왔다. 동시에 데미안이 재빨리 외쳤다.
“하나, 둘, 셋! 지금입니다!”
“……!”
카운트가 너무 빠르잖아!
항의할 틈은 없었다. 위기를 감지한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타앗!
어느새 이쪽은 데미안의 뒤를 따라 뛰고 있었다. 앞서 돌진하는 데미안. 녀석의 뒷모습이 순간 흐릿하게 잔상만 남았다.
츠카카카카칵-!
좌우로 흐트러지는 잔영. 잔영을 따라 허공을 수놓는 검광. 달빛 속에 수십 줄기의 검광이 질주했다. 미노타우로스 팔뚝과 손목의 가죽을 베고, 저며냈다. 물론 미노타우로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크워억!”
따끔한 통증에 더욱 분노했다. 거대한 머리를 휘저었다. 위협적인 뿔이 데미안을 꿰뚫을 듯 찔러져 들어갔다. 데미안이 마주 검을 내리쳤다.
터커어엉-!
검과 뿔이 부딪치는 순간, 맹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졌다. 데미안이 몇 미터나 뒤로 밀려났다.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도 뒤로 크게 젖혀졌다.
‘지금이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고개가 젖혀진 지금이, 자세가 크게 흐트러진 바로 지금이, 아까 데미안이 말했던 ‘빈틈’이었다.
타앗!
달렸다.
미노타우로스의 곁을 지나쳤다. 바로 앞에 뻥 뚫린 벽면이 보였다. 저기로 몸을 날리면 된다. 그러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 확신하며 바닥을 박찼다. 유일한 탈출구를 향하여. 허공에 몸을 띄웠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푸르륵!”
미노타우로스의 콧김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찾아온 어지러움을 털어내려는 걸까. 별안간, 놈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몸통과 팔뚝도 함께 흔들었다. 그 팔뚝이 눈앞을 확 가로막았다.
피할 수가 없었다. 이쪽은 이미 땅을 박차고 허공에 몸을 날린 상태였으니까.
‘으어어엇!’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미노타우로스의 팔뚝 털이 잡혔다. 반사적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그 결과, 미쳐 날뛰는 소머리 괴물의 팔뚝을 찰싹 끌어안은 매미 신세가 되어 버렸다.
“……으읏!”
당장 놓고 뛰어내려야 한다. 미노타우로스가 이걸 애정과 우호의 프리허그로 여기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황급히 손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딩동!
난데없는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응급상태의 환자와 신체접촉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지닌 진맥 스킬이 응급 환자의 바이탈 시그널(Vital signal)에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진맥을 시작합니다.]
‘……어?’
응급 환자?
진맥을 시작해?
‘무슨?’
이런 상황에서, 사람도 아닌 미노타우로스를 대상으로 뜨리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는 황당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이쪽의 의사는 상관없었다. 정말로 진맥 스킬이 자동으로 발동되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이내, 정말로 미노타우로스의 종합검진표가 떠올랐다. 비로소 라키엘은 이 사태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