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68화 (68/468)

68화. 한밤의 로데오 (3)

오늘밤. 저놈과 나.

둘 중의 하나는 끝장이 날 것 같다. 아니, 그래야만 이 밤의 끝이 보일 것 같다. 오싹한 깨달음이 몰려왔다. 그래서 이가 갈렸다.

‘저놈, 대체 왜 나만 노리는 건데?’

나름 머리를 굴려봤다. 하지만 짐작되는 곳이 없었다. 그럴 법한 이유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해가 안 됐다. 그 순간, 미노타우로스가 포효했다.

“누우워어어어어어-!”

우루스는 온몸을 떨었다.

곳곳에 상처 입은 육체. 끔찍한 통증이 엄습해 오는 가슴. 마치 못이 비죽비죽 튀어나온 수십 톤 무게의 철탑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 고통이 우루스의 광포한 정신을 더욱 일깨우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선명하게 새겨주고 있었다.

이곳의 인간들을 박살 내겠다고.

이건 전쟁이라고.

“……푸르륵! 푸륵!”

시시각각 충혈되는 시야 속에서 우루스는 생각했다. 전쟁에서 이기는 보편적인 두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으뜸은 적 병력을 몰살하는 것. 혹은 적장을 잡아 죽이는 것. 그런데 지금은? 그 적장이 눈앞에 있었다. 그게 바로 라키엘이었다.

“누우우! 푸르륵!”

그래. 저 비리비리한 모습의 인간. 바로 저놈이다. 확실하다. 짐승의 본능으로 알 수 있다. 아까부터 주변의 모든 인간들이 저놈을 지키려고 애를 썼으니까. 그 모습들을 똑똑히 보았으니까.

저놈이 이 도시 인간 무리의 우두머리다. 그러니까, 저놈을 잡아 죽이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푸르륵!”

우루스가 콧김을 뿜어냈다. 거대한 팔을 뻗었다.범선의 주돛, 메인 마스트 기둥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꺾었다.

콰자작-!

아름드리나무보다 튼튼한 메인 마스트 기둥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반쯤 펼쳐져 있던 거대한 돛이 우루스의 두 팔에 대형 부채처럼 들렸다. 우루스의 양어깨와 팔뚝에 아나콘다 같은 힘줄이 와락 일어났다.

“누오오오오!”

후우우우웅-!

메인 마스트를 통째로 휘둘렀다. 그 순간, 라키엘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다들 엎드려!”

그 외침에 모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허억!”

“엎드려!”

모두가 앞다투어 몸을 날렸다. 갑판에 엎드렸다. 그 직후, 머리 위로 태풍이 지나갔다.

콰자작! 쿠콱-!

“……!”

2번, 3번 마스트가 휘둘러진 돛대에 맞아 박살이 났다. 범선 뒤편의 선미루도 무사하지 못했다. 선미루와 위의 구조물이 와르르 뭉개졌다. 그 구조물 중에는 배를 조종하는 타륜도 있었다.

콰작-!

단 3초.

우루스가 돛대를 들고 휘두른 단 하나의 동작. 그 일격에 범선 갑판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쿨럭! 쿨룩! 으윽!”

라키엘은 먼지 속에서 기침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었지만, 뭐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넘어진 2번 돛대의 돛이 갑판을 온통 뒤덮어 버린 까닭이었다. 물론, 이쪽도 그 돛에 덮여 버렸다.

‘미친.’

이가 갈렸다. 설마하니 저 미노타우로스가 배 위로 뛰어들 줄은 몰랐는데.

‘어떡하지?’

머리를 굴렸다. 일단 살 궁리부터 했다. 한데 뚜렷하게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도망이 최선책일 텐데. 도망칠 방법이 없어.’

자신은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도망을 쳐보겠답시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간? 맥주병 신세가 되어 꼬르륵, 익사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데미안이나 다른 이들에게 날 데리고 헤엄쳐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러기엔 부두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100미터 이상 멀어졌으니까. 게다가 저 미노타우로스가 헤엄을 쳐서 쫓아오면? 오히려 금방 붙잡히겠지.’

그럼 구명보트는?

라키엘은 찢어진 돛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난장판이 된 갑판 너머. 두 동강이 나서 처박혀 있는 구명보트가 그곳에 있었다.

“…….”

도망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선미루 위의 타륜마저 박살 났다. 덕분에 범선이 제멋대로 표류하게 됐다. 한데 그렇게 흘러가는 방향이…… 부두와 반대 방향이다. 즉, 오히려 육지에서 멀어지는 중이다.

상황을 파악할수록 암담해졌다. 오장육부도 비슷한 것 같았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위기감을 느끼며 동요하고 있습니다.]

[심장 : 어이? 도망칠 방법 좀 생각해보지? 뇌는 뒀다가 뭐하냐?]

[허파 : 뇌에 산소…… 사…… 산소 공급…… 허…… 파학!]

[대장 : 형님들? 저,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쉿, 이 몸뚱인 겉이 더 안 좋아!]

[위장 : 히히히 최후의 만찬 츄릅.]

“…….”

오장육부에게도 딱히 답이 없는 듯하다. 저 미노타우로스에게서 도망칠 방법도 없고. 화해(?)할 방법은 더더욱 안 보이고. 그러니까 결론은…….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거네.’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뻗어왔다. 이쪽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쉿. 몸을 계속 낮추고 계십시오.”

“……!”

깜짝이야. 기겁하며 돌아보았다. 데미안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속삭였다.

“돛이 넘어져서 오히려 잘됐습니다. 저쪽으로 기어가십시오. 그리고 선미루 잔해 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눈에 띄지 않으실 겁니다.”

“숨어 있으라고?”

“예. 지금은 그게 최선일 테지요.”

“그럼 넌?”

“저는 오늘 밤 전하께 받을 것이 많이 생겼습니다.”

“……뭐?”

“위험수당 말입니다. 거기에 다리까지 다쳤으니, 이건 업무를 보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인 겁니다. 명백히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 부상이니, 그만한 위로금도 충분히 받아야겠지요.”

“그러니까, 네가 그 돈을 다 챙겨 받으려면 고용주인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럼.”

“……엇?”

타앗!

데미안의 손길이 이쪽을 거칠게 밀었다.

“제가 눈길을 끌 테니 그 틈에 움직이십시오. 얼른.”

“…….”

녀석과 잠시 나눈 눈길. 말은 농담처럼 하고 있지만, 차갑고 비장하다. 녀석은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그 눈길 앞에 사족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저 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최선이었을 뿐.

‘제발. 무리하지만 마라.’

거대한 이불처럼 갑판을 덮은 돛. 그 아래에 바싹 엎드렸다. 그 순간, 데미안이 돛을 찢고 일어섰다. 갑판 반대편으로 절뚝거리며 뛰었다.

“푸르륵!”

우루스의 눈길이 데미안을 향해 꽂혔다. 동시에 이쪽도 움직였다. 데미안이 가리킨 방향으로 열심히 기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 턱 아래까지 거칠어지는 숨결. 마침내 선미루 잔해에 도착했다. 그곳 구석에 몸을 숨겼다. 돛의 찢어진 구멍을 통해 갑판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모두가 싸우고 있었다.

데미안이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늑대인간 상태인 아니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도약하고 있었다. 근위기사들이 대열을 짜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특근대원들이 그 빈틈을 메꾸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꼬슴이마저 가시를 세우며 달려들었다.

모두의 투지와 함성. 그 앞에 미노타우로스가 절망의 벽처럼 우뚝 서 있었다. 모두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아니, 우습게 튕겨내고 흘려냈다.

“푸르륵! 푸륵!”

황소처럼 거친 투레질. 거대한 머리가 육중한 무게를 싣고서 휘둘러졌다. 그 끝에 장대하게 휘어진 한 쌍의 뿔이 있었다.

종횡무진.

뿔이 불도저처럼 돌진했다. 근위대원 다섯의 방패를 부쉈다. 특근대원 여섯의 검을 박살 냈다.

“……커억!”

단 한 번의 돌격에 근위대원 다섯과 특근대원 여섯이 전투불능이 되었다. 아니스가 다급하게 뛰었다.

“크르릉!”

미노타우로스의 등으로 뛰어올랐다. 송곳니를 세웠다. 등을 깨물었다.

와그득!

섬뜩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니스의 송곳니는 치명타를 주지는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노타우로스의 가죽이 특급 소가죽 이상으로 두꺼운 까닭이었다. 하지만 아니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크릉!”

송곳니가 안 된다면 손톱으로!

더욱 야성을 터뜨리며 손을 휘둘렀다. 미노타우로스의 등판에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새겼다. 하지만 그때였다.

덥썩!

미노타우로스의 손아귀가 뒤로 움직였다. 아니스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휘둘러 패대기쳤다.

후웅, 콰앙-!

“……깨갱!”

갑판에 패대기쳐진 아니스가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헐떡이며 거품을 물더니 혼절했다. 미노타우로스가 그 위에 군림하듯 우뚝 섰다.

“푸르륵……! 푸륵!”

이제 이 배에 자신의 적수가 없음을 놈이 확신한 걸까. 그러고 보니 모두가 만신창이었다. 기절한 아니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리를 다친 데미안은 움직임이 정상이 아니었다. 꼬슴이와 근위기사, 특근대원들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 모두를 무시하듯, 미노타우로스가 갑판 이곳저곳을 쓸어보고 있었다. 뭔가를 찾는 듯한 몸짓이었다.

‘날 찾고 있구나.’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을 긁으며 내려갔다. 그때였다. 미노타우로스가 한쪽 다리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콰아앙-!

갑판 한쪽을 찍듯이 짓밟았다. 돛으로 덮여 있는, 뭔가가 있던 자리였다.

“……!”

설마.

가슴이 쿵, 뛰었다.

그 사이, 미노타우로스가 자신이 짓밟은 자리의 돛을 부욱 찢었다. 납작하게 박살 난 상자가 그 아래에 있었다. 우루스의 콧김이 거칠어졌다.

“푸륵!”

그걸 보자 확실해졌다.

‘저놈, 돛에 덮여 조금이라도 불룩하게 튀어나온 곳이 있으면 전부 짓밟으며 확인할 생각인 거야.’

날 찾기 위해서.

짓밟아 죽이기 위해서.

오싹.

소름 돋는 깨달음이 몰려왔다. 그 사이, 미노타우로스의 거친 몸짓이 이어졌다.

“누으우-! 푸르륵! 푸륵!”

쾅! 콰작! 뻐걱! 콰드걱!

거친 발길질로 돛에 덮인 갑판 이곳저곳을 짓밟아대기 시작했다. 세심하게 살피고 뭐고도 없었다. 갑판이 온통 내려앉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파괴의 현장이었다.

‘제, 젠장!’

저러면 여기 숨고 뭐고도 의미가 없게 된다. 어차피 공간이 한정된 범선 갑판이다. 언젠가는 들키고, 짓밟혀 죽게 되리라.

‘선실로.’

숨어야 산다.

깨달음과 동시에 몸을 낮추었다. 무너진 선미루 앞쪽에 선실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 통로를 찾고자 필사적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데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숨어 있던 다른 선원들도 비슷한 심정인지,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그러는 사이, 미노타우로스의 파괴적 짓밟기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왔다.

“푸르륵! 누오오오-!”

콰거걱! 콰작!

“……!”

너무나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그런 놈을 저지하기 위해 검을 흩뿌리는 데미안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탓에 검이 무뎌진 까닭일까. 미노타우로스는 데미안의 검격에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미친! 미친! 으아아!’

죽기 싫다. 이런 데서 압사 엔딩을 맞이하려고 지금까지 아등바등 살아온 게 아니다. 그러나 미쳐 날뛰는 미노타우로스의 난동에는 자비가 없었다.

“누우우!”

광포한 포효가 바로 위쪽에서 터져 나왔다. 그걸 깨달은 순간.

“……!”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직후.

쿠쾅!

방금까지 엎드려 있던 자리가 거대한 발굽에 짓밟혀 뭉개졌다.

“……그읏!”

살아야 한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돛 아래를 필사적으로 기고, 굴렀다. 그런 이쪽을 마치 추격해 오듯, 광포한 짓밟기가 따라왔다.

콰작! 콰그덕! 쿠콱-!

“……긋, 으읏! 엇!”

한밤중에 주방에서 마주친 인간을 피해 전력으로 도망치는 바퀴벌레의 심정이 이런 걸까. 계속해서 돛 아래를 구르고, 기고, 숨었다. 하지만 무작정 정신을 놓고 피하기만 하진 않았다.

‘그러면…… 죽어!’

확신이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이성을 놓으면 안 된다. 공포에 사로잡혀 맹목적으로 도주하면 안 된다. 그러면 움직임이 단순해진다. 저도 모르게 일정한 패턴이 생겨난다.

그 패턴이 간파되는 순간, 단숨에 끝장날 거다. 그러긴 싫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공포와 본능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최대한 파악하고.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단 하나의 빈틈도 놓치지 말고. 작은 기회라도 악착같이 활용해야 한다.

‘눈 똑바로 떠, 이한!’

스스로를 향해 외쳤다.

고막이 먹먹해지는 파괴의 소음과 포효. 그 속에서 정신을 놓지 않으려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두 눈을 부릅떴다. 이쪽을 덮은 두꺼운 돛. 그 건너편에 우뚝 서 있을 미노타우로스. 놈의 다음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주시했다.

순간순간 달빛을 가리는 거대한 실루엣. 그 희미한 실루엣이 움직이는 방향. 포효가 향하는 방위. 놈의 거친 호흡. 그 모든 단서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이쪽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게 되었다. 그 역량 중에는 아스라한 심법도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나써클이 최대치로 회전했다. 주위의 공기에 퍼져 있는 마나. 근방에서 격렬하게 활동하는 마나까지.

그 모든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고, 분석하게 되었다. 덕분에 조금씩 보였다.

딩동!

[당신은 전례 없는 위험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당신은 살아남기 위한 본능과 냉철한 이성으로 마나써클의 모든 활용 역량을 마나 감지에 쏟아부었습니다.]

[이러한 극한의 경험이 당신이 기존에 활용하던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을 극적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의 능력이 확장됩니다.]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이 당신이 지닌 스킬, <진맥>의 공식 옵션으로 진화합니다.]

[<진맥> 스킬에 옵션 기능이 탑재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 - 10미터 이내의 범위에서, 대상의 신체 내부에 흐르는 경혈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스캔하여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 한정 / 한 번에 Lock-on 가능한 대상의 숫자 : 1)]

“……!”

불현듯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동시에 돛 건너편에서 날뛰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의 모든 경혈과 기의 순환, 예상되는 움직임이 낱낱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맵핵이라도 띄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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