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총력전 (1)
보인다.
모든 것이 보인다.
마치 사기성 맵핵이라도 띄워놓은 것처럼. 그렇게, 상대의 모든 것을 낱낱이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듯.
‘이게 되네…….’
처음 든 생각은 의구심이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이런 곳에서 압사 엔딩을 맞이하곤 싶진 않아서. 그런 비참한 꼴로 죽기 싫어서 이리 구르고 저리 기었을 뿐이었다. 그렇듯 미노타우로스의 미친 듯한 파괴적 폭력을 피하려 애를 썼을 뿐이었다.
한데 그런 간절함이 닿은 건지. 혹은 우연과 필연이 묘하게 겹친 건지. 가장 절실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
‘경혈 스캐닝?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이…… 진맥 스킬의 공식 옵션으로 진화했다고?’
라키엘은 재빨리 메시지를 훑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 - 10미터 이내의 범위에서, 대상의 신체 내부에 흐르는 경혈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스캔하여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 한정 / Lock-on 가능한 대상의 숫자 : 1)]
그는 눈길을 들었다.
이불처럼 이쪽을 뒤덮은 두꺼운 돛 너머. 시야 위쪽에 이라는 초록색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 아래로 초록색 외곽선으로 선명하게 표시된 거대한 형상이 보였다.
그래, 저 미노타우로스. 건강검진표에 뜬 이름이 우루스라고 했나.
“…….”
우루스의 움직임이 다 보였다.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은 기본이었다. 그 내부에 자리한 기혈의 움직임까지 보였다.
마나가 어느 경로를 거쳐 어느 경혈에 머물렀다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렇게 흘러간 마나가 어떤 작용을 하여 어느 신경을 자극하고, 어느 부위의 힘줄과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지. 혹은 호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심장과 허파.
소장과 대장.
위장과 간장.
그 모든 오장육부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조화가 어떤 방식으로 신체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모조리, 훤히, 들여다보였다.
‘미친. 이거 사기 아냐?’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누오오오옥!”
위쪽에서 우루스의 포효가 들려왔다. 놈의 척추 신경을 따라 흐르는 기혈이 보였다. 위쪽 등 부위, 일곱째 등뼈(T7) 가시돌기 아래의 오목한 곳. 인간으로 치면 지양혈(至陽穴)이 위치한 곳이 밝게 빛났다.
빛이 전류처럼 흘렀다. 아홉째 등뼈(T9)의 근축혈(筋縮穴)을 거쳤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오른 허벅다리 바깥쪽의 풍시혈(風市穴)로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놈이 오른 다리를 치켜들었다.
‘짓밟는다!’
우루스의 종아리뼈 최상단, 무릎과 종아리뼈 머리가 만나는 외곽의 오목한 곳. 그곳의 양릉천혈(陽陵泉穴)이 환하게 빛나는 순간. 놈의 오른 발굽이 어디를 짓밟을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근육이 움직이는 각도.
내리찍는 시점과 위치.
그 모든 것이 계산하지 않았음에도 훤히 보였다.
“……후웁!”
몸을 왼쪽으로 두 바퀴 굴렸다. 그 직후, 우루스의 오른 발굽이 이쪽이 있던 지점의 갑판을 짓뭉갰다. 예측 그대로의 타이밍이었다.
투콰즉-!
“…….”
이젠 알겠다. 경혈 스캐닝이라는 옵션, 이거.
‘사기적인데, 진짜야!’
이건 진짜다.
결코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다.
‘미친 기능이잖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급박한 순간들. 그 틈새에서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아스라한 심법을 응용해서 해왔던 마나 감지와는 기능의 차원이 다른 까닭이었다.
‘전에도 환자의 마나를 감지할 수는 있었지. 조르쥬의 뇌전증을 치료할 때도, 아니스의 꼬리를 시술해줄 때도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했으니까.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덕분에 환자의 기혈에 흐르는 마나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었으니까. 한데 지금 이 경혈 스캐닝 옵션은? 그거랑은 완전히 차원이 달라.’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그것이 진화한 형태인 경혈 스캐닝. 체감되는 둘의 차이는 엄청났다.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은 가만히 누워 있는 대상만 탐지할 수 있었다. 탐지 범위가 거의 1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용하려면?
‘정신을 고도로 집중해야 했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수능시험 치듯이 마나 탐지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 집중력을 유지해야만 비로소 마나 탐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상당히 고된 노동이었다.
한데 이제는?
‘그렇게 집중하지 않아도 돼. 아니, 그냥 옵션만 켜고 있으니까 자동으로 알아서 마나를 탐지해주고 있잖아?’
덕분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를 수 있었다. 이렇게 딴생각을 하면서도 탐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범위도 10미터. 저렇게 날뛰고 있는 대상의 기혈도 모조리 분석할 수 있어. 이건…… 엄청난 차이야.’
말 그대로의 폭발적인 진화였다. 덕분에, 자신감에 희미한 불씨가 붙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피할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어.’
콰앙! 콰자작! 콰그덕!
“누오오오오-!”
발굽이 떨어져 내려온다. 주먹이 바닥을 후려친다. 뿔이 갑판을 가르며 쇄도한다. 하지만 그 모든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놈이 어디를 공격할지. 어떤 방식을 사용할지. 그다음에 이어지는 동작이 어떠할지. 모조리, 낱낱이 들여다보며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그럴수록 우루스의 포효가 더욱 거칠어졌다.
‘후, 후욱! 저놈은…… 지치지도 않나?’
라키엘은 우루스의 심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협심증이 있다더니, 과연 심장 어름의 기혈 움직임이 헝클어진 게 보였다. 한데 원체 튼튼한 놈이다 보니, 그런 상태에서도 잘만 버티고 있었다. 아니, 잘도 날뛰고 있었다.
그걸 보자니 절로 초조해졌다.
‘이래선 안 돼.’
문득, 피하기만 하다간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여긴 도망칠 곳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공간이 별로 없으니까. 배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아닌 바에야, 결국 이 안에서만 계속 놈을 피해야 하니까. 한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벌써 숨이 가빠지는 중이었다. 한데 저 미노타우로스의 왕은? 여전히 잘만 날뛰고 있었다.
‘협심증? 그래 봤자 내가 더 약골이야. 내가 훨씬 먼저 지칠 거야. 그렇게 체력이 고갈되고 나면 경혈 스캐닝이고 움직임을 예측하고 뭐고도 전부 소용없어지겠지.’
예측을 아무리 잘해도? 그 예측에 따라 몸을 움직일 체력이 있어야 한다. 몸이 퍼져서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회피고 뭐고 전부 말짱 꽝이 된다. 그렇게 한 방만 스치면 이쪽은 치명타.
‘인생 종치는 거지. 그건 안 돼.’
그러니 그 전에, 이쪽의 체력이 고갈되기 전에, 뭐라도 수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오, 미친.’
생각나는 유일한 방법. 그나마 해볼 수 있을 방법. 그걸 떠올리자 절로 치가 떨렸다.
‘한국에서도 이런 짓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돛이 찢어진 틈새를 향해 기었다. 그 사이에도 우루스의 주먹이 갑판을 두 차례나 콰직, 콱. 아슬아슬하게 구르고 피해내며 돛 틈새에 도착했다.
틈새 사이로 몸을 일으켰다. 시원한 밤하늘이 보였다. 그 사이로 우뚝 선 우루스도 보였다.
“……푸르륵!”
이쪽의 모습을 확인한 우루스가 격한 콧김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 인사에 화답해줄 생각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놈을 무시하고 달렸다. 그곳에 꼬슴이가 있었다.
“꼬슴아! 가시 하나!”
선수 방향을 향해 뛰었다. 그곳에 있는 꼬슴이를 향해 외쳤다. 이쪽의 외침이 제대로 닿은 걸까. 꼬슴이가 몸을 웅크리며 등짝에 부르르 힘을 주는 게 보였다.
“꼬슴!”
뾱!
녀석의 등에서 가시 하나가 뽑혀 나왔다.
“이리 던져!”
“……꼬슴!”
꼬슴이가 가시를 던졌다. 거대화 상태에서 뽑아낸 덕분에 제법 컸다. 재빨리 받아내며 살펴보니, 길이가 거의 1.5미터는 될 듯했다.
‘딱 좋아.’
가시 중간 부분을 움켜쥐었다. 창 한 자루를 쥔 기분이었다. 나머지 손을 품속으로 가져갔다. 안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작은 원판을 꺼냈다. 예전에 얻었던 냉기의 방패, 만년설이었다. 만년설을 꺼내자마자 마나를 주입했다.
반응이 즉각 돌아왔다.
파츠스스!
납작한 중앙부에서 터져 나오는 스산한 소리. 동시에 드라이아이스 같은 새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름 1.2미터의 냉기 실드가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카가가각!
달리던 기세 그대로 멈춰 섰다. 180도 몸을 돌렸다. 우루스를 마주 보았다. 만년설을 앞세워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틈새로 거대 가시를 조준했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스파르타 전사 같은 자세였다.
‘이로써 오늘 날뛰는 환자분 시침 준비 완료!’
계속 피하기만 하다간 답이 없으리라. 차라리 이쪽의 체력이 남아 있을 때, 그 체력으로 끝장을 보리라. 경혈 스캐닝 옵션을 활용하리라. 놈의 경혈을 공략해서 근육을 하나하나 마비시키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우루스가 이쪽으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푸르륵! 누우우우우-!”
콰쾅콰콰콰-!
고개를 바짝 낮춘 모습. 거대한 뿔 한 쌍을 앞세운 기세. 화물칸을 꽉꽉 채우고서 질주하는 덤프트럭과 정면으로 맞서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
나는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독려했다.
‘보여. 예측할 수 있어. 그러니까…… 피할 수 있어!’
스페인의 투우사를 떠올렸다.
너무 성급하지 않게. 공포에 질려 미리 피해 버리면 황소도 이쪽을 손쉽게 추격해오니까. 그러니까 황소가 반응할 수 없는 거리에서. 이쪽의 안전이 최소로 담보되는 타이밍에. 그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찰나의 순간에.
‘……바로 지금!’
타닷!
경혈 스캐닝으로 보이는 놈의 움직임. 덕분에 예측되는 공격 지점과 타이밍. 사각지대가 엿보였다. 사각지대로 두 걸음을 뛰었다.
후우웅-!
한쪽 뿔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머리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순간, 허리를 확 숙였다.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으앗!’
쿠쿠쿵! 쿵쿵!
우루스의 거대한 머리와 목덜미가, 그리고 불끈거리는 가슴 근육과 겨드랑이가 바로 위쪽을 급행열차처럼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몸을 일으키자마자 뒤로 돌아섰다.
콰가가가각-!
뿔로 갑판 바닥을 밭 갈듯이 갈아 버리는 우루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쪽이 자신의 공격을 피한 줄 모르는 걸까. 맹목적으로 돌진하며 머리를 휘젓고 있었다.
덕분에 보였다.
몸을 숙이고 있는 놈의 허리 어름.
‘비수혈(脾兪穴). 열한째 등뼈(T11) 가시돌기 모서리 옆쪽. 즉, 척추기립근이 있는 라인!’
그곳의 혈자리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곳을 향해 달렸다. 모든 힘을 실었다. 아까부터 마셔두었던 호흡마저 증폭했다.
[1번 슬롯의 방출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방출량을 설정해주십시오.]
‘전부 다!’
그 순간, 써클 슬롯이 전력으로 역회전했다.
[써클 슬롯에 저장된 공기 12리터를 방출합니다.]
방출력을 발끝에 실었다.
그 순간, 갑판을 박찼다.
퍼어엉-!
발끝에서 공기 폭탄이 터졌다. 에어 로켓처럼 전신을 도약시켰다. 그렇게 허공에 몸을 띄우는 순간, 박차를 가하며 가시창을 당겼다. 조준했다.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비수혈. 그곳에 비수처럼 가시창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가로막혔다.
쿠욱-?
“……어?”
분명히 온몸을 내던졌는데. 체중까지 다 실어가며 가시창으로 찔렀는데. 타이밍이 완벽했는데. 그런데 가시창이 살가죽을 뚫지 못했다. 경혈을 효과적으로 찌르긴커녕, 질긴 소가죽에 흠집도 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어어억?”
투웅-!
한껏 찌른 반동이 가시창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짐볼을 향해 100미터 달리기로 뛰다가 튕겨져 날아가면 이런 꼴이 되는 걸까.
“……크으긋!”
쿠당탕! 콰당!
형편없이 날려가 갑판에 추락했다. 세 바퀴나 데굴데굴 굴렀다. 가시창을 놓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빠, 빨리…….’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황급히 일어났다. 가시창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한데 그때였다.
“……푸르륵.”
바로 머리 위에서, 거친 콧김이 들려왔다.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을 뒤덮었다. 얼결에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주먹이 쇄도해 오고 있었다.
“……!”
예측? 경혈 스캐닝? 모두 보이긴 했다. 하지만 피하기엔 너무…….
‘늦었어!’
깨닫자마자 만년설을 들었다. 만년설로 전면을 방어했다. 몸을 웅크리며 뒤로 뛰었다.그 순간, 덤프트럭에 치이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
굉음도.
타격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나, 맞은 건가. 아니, 방어는 한 것 같은데. 멍한 눈길을 들었다. 사방에 냉기 조각이 반짝반짝. 밤하늘의 예쁜 별처럼 빛나며 흩어지고 있었다.
‘만년설…….’
일격에 깨졌구나.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된 걸까.
만년설 조각이 멀어졌다. 주위의 풍경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온통 부서진 갑판 위로 훨훨. 내가 날고 있었다. 아니, 날려가고 있었다. 경악한 눈길로 이쪽을 보는 선원들. 반쯤 쓰러진 자세로 무어라 외치는 데미안.
이윽고 삽시간에 다가오는 추락.
터그컥! 콰가각-!
“……!”
비명을 지를 힘도 없었다. 실 끊어진 연처럼 갑판에 떨어졌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 그 끝에 어떤 자세로 널브러졌는지. 그저 멍한 정신 가운데 헛웃음만 나왔다.
‘살아는…… 있는 건가.’
엎드린 채 눈길만 간신히 들었다. 손가락이 꿈틀꿈틀, 떨렸다. 그걸 보니 알겠다. 일단 살아는 있다. 만년설이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해준 덕분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곧 죽을 것 같다. 온몸이 으스러지듯 아프다. 아니, 아픈 건 둘째 치고.
쿠웅…… 쿵…….
이쪽으로 다가오는 육중한 발걸음. 한편으로 내뱉는 흥분된 콧김. 승리를 직감한 괴수의 실루엣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놈은, 날 본보기로 죽일 생각인가 보다.
‘그렇게…… 끝이라고?’
강렬한 실감.
소름이 돋았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싫다. 이런 곳에서 죽는 건.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는 건. 그건 싫다.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뭐라도. 어떤 짓이건.
‘그, 그읏!’
일어나려 애썼다. 부들거리는 두 손을 억지로 움직여 바닥을 짚었다. 부서진 나뭇조각 파편에 손바닥을 찔렸다.
“으읏!”
시릿한 통증이 일깨우는 감각. 손바닥을 파고든 파편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데 느껴지는 건 파편뿐만이 아니었다. 뭔가가 손에 잡혔다.
‘가죽…… 주머니?’
항상 지니고 다니던 주머니였다. 어느새 한쪽이 풀리고 찢겨 있었다. 찢긴 틈으로 내용물이 흘러나온 게 보였다. 환상종을 소환하며 받았던 것들. 환상종의 덩치를 키울 수 있는 마법의 씨앗.
‘해바라기씨…….’
붉은색 해바라기씨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 순간, 문득,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짓.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
평소였다면 미친 생각이라 치부했겠지. 무슨 그런 짓을 하겠느냐 웃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푸르륵!”
머리 위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우루스. 그걸 피할 힘도 없는 지금의 나. 뭐라도. 어떤 짓이건. 해야 하는 지금이라면.
끄득!
씨를 움켜쥐었다. 입으로 가져왔다. 털어 넣고, 씹었다. 간절히 기원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가능성이건. 이루어질 리 없는 헛된 희망이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나 달라고.
‘제발.’
그 순간.
……화아악!
세상이 작아졌다.
아니, 미노타우로스와 이쪽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