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은혜 갚는 누렁이 (2)
꿈이다.
이건 꿈이다.
고개를 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꿈속의 라키엘은, 아니 이한은 저도 모르게 허허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네.’
한밤의 어느 교차로. 깜빡이는 신호등. 신호를 무시하고 쌩쌩 달리는 택시들. 그런 택시를 잡으려 손을 내미는 취객들. 시끌벅적하게 적막한 사람들. 그 사이를 걷는 나.
터덜터덜.
지친 발을 끌며 집으로, 집을 향해.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한다고. 도착하면 편히 쉴 수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내딛는 걸음.
그 시절과 똑같았다.
‘나 새내기 때. 매일 이랬는데.’
돈이 필요했다.
물론 아버지가 모은 재산마저 없던 건 아니었다. 당신께서 떠나시며 남겨주신 보험금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어머니의 투병생활에 썼더랬다. 그렇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신 후였던가. 혼자 남은 세상은 지독히도 힘들었다.
장학금?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
도움은 됐다. 하지만 그걸로만 살 수는 없었다. 생활비가 언제나 모자랐다. 과외 교습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대신 학교 앞 호프집에서 알바를 했더랬다.
‘덕분에 매일 지겹게 걸었지. 지금처럼.’
알바를 마치면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버스? 전철? 당연히 없었다. 집까지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사장님이 주는 택시비를 덜컥 쓰자니 너무 아까웠다. 차라리 모아서 생활비에 보태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걸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 집에 돌아갔다. 익숙하고 그리워서 지긋지긋한 밤거리. 매일 밤 지친 걸음을 옮기던 그 사거리. 그걸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꿈속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푸르륵!”
거친 소리가 한밤의 사거리를 흔들었다. 교차로 위에 매달린 신호등이 춤을 추었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택시가 저만치 날아갔다. 취객들이 넘어지고, 횡단보도에 쩌저적 금이 갔다. 아스팔트의 균열 속에서 아침 해가 떠올랐다.
그 후광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익숙한 실루엣. 너무나 그리웠던 실루엣.
‘……엄마?’
고등학교 시절의 엄마가 다가왔다. 매일 아침 밥 먹으러 나오라는 목소리로 깨워주시던 그 시절의 엄마가 인자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누우우우우-!”
“……와악!”
이한, 아니, 라키엘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눈을 번쩍 떴다. 덕분에 보고 말았다.
“누우?”
“…….”
커다란 버팔로, 아니, 황소가 왜 코앞에 있는 걸까. 까만 코를 반들반들하게 반짝이며, 그보다 더 반짝이는 눈매로 이쪽을 쳐다보며, 뭔가 알 수 없는 의미의 미소 비슷한 걸 짓더니.
할짝?
기다란 혀로 셀프 코파기를 시전했다!
‘으, 더러!’
혹시 난 아직 꿈을 꾸는 중인 걸까. 설마 저 혀로 날 핥는 건 아니겠지? 라키엘은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다가.
철벅.
뒤로 짚은 손에 뭔가가 닿았다. 차갑고 부드럽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손에 닿은 물체는…….
‘미역?’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뭉개진 미역 덩어리가 보였다. 마치 공업용 프레스나 압착기로 꽉 짓누른 듯한 모양새. 한데 그런 미역 덩어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뭐야, 이건.’
라키엘의 시선이 점점 분주해졌다. 주위를 바쁘게 훑었다. 돌바닥. 눅눅하고 어두운 동굴. 그리고 아스라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
‘바닷가 동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누우우? 누우?”
셀프 코파기를 선보였던 황소가 움직였다. 한쪽에 놓여 있던 미역 뭉치를 집었다. 미역을 둘둘 말았다. 꽉 찌그러뜨렸다. 거기서 나오는 즙을 후르륵 마셨다. 그리고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누우?”
알겠느냐는 듯한 눈치. 마치 이쪽에게 설명을 해주는 듯한 기색이었다. 녀석의 설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누우, 누우우!”
이번엔 두 손을 나란히 모았다. 손바닥을 둥글게 펴서 바가지처럼 만들었다. 위쪽을 향해 들어 올렸다. 마치 빗물을 받는 듯한 동작. 그리고 그걸 이쪽의 입으로 따라주는 듯한…….
‘빗물을 받아서 떠먹여 준 건가? 나한테? 그리고 미역즙을 짜서 먹여주고, 그랬던 거야?’
비로소 라키엘은 황소가 전하려는 뜻을 대강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눈앞에 있는 황소(?)의 정체 또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나저나 이 황소, 아니, 미노타우로스. 이놈 이거…….’
우루스잖아.
“…….”
덜 깨었던 잠이 확 달아났다. 잠깐 내려놓고 있던 기억들이 훅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래. 기억이 났다.
한밤의 난리. 무너지던 시장관저. 범선에 뛰어들던 우루스. 살기 위해 이리저리 구르던 순간들. 빨간 해바라기씨. 그리고 거대화. 혼절하던 순간까지.
“……여긴 어디야?”
일단 범선은 아니다. 데미안과 일행도 보이지 않는다. 환상종 꼬슴이와 뽀복이도 품속에 없다. 해안가 동굴에 있는 이라곤 자신과 우루스뿐.
“내가 혼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물었다. 대답이 돌아올 거란 기대는 딱히 하지 않았다. 한데 뜻밖에도, 우루스가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누우우! 누우!”
우루스가 벌떡 일어나며 웅장한 몸짓을 선보였다.
“누우? 푸르륵! 누우!”
녀석이 두 손바닥을 모았다. 그걸 흔들더니 바닥으로 훅 가라앉는 몸짓을 보였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 그러다가 이내 짐작할 수 있었다.
“배? 가라앉았다고?”
“누우!”
끄덕끄덕!
우루스가 거대한 머리를 끄덕이더니 몸짓을 이어갔다.
“누! 드르렁!”
녀석이 이쪽을 가리키며 코 고는 소리를 냈다. 이쪽을 집어들어 품에 안는 자세를 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치는 흉내를 냈다. 그 뜻은 즉…….
“날 데리고 헤엄쳤다는 거야? 여기까지?”
“누우! 푸륵!”
우루스의 콧구멍이 연신 벌렁. 우렁찬 콧김이 의기양양하게 뿜어졌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거, 침몰하는 범선에서 날 구해내겠다며 여기로 데려온 거구만.’
문득, 혼절하기 직전에 봤던 상황이 떠올랐다. 이쪽이 녀석을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시술해주었던 침술. 그 끝에 녀석의 협심증 통증이 타이밍 좋게 멎었더랬다. 덕분에 이쪽을 고마운 눈길로 바라보던 녀석의 모습이 기억났다.
‘내가 자신을 고쳐주었다고 여긴 거겠지. 그래서 설마…… 날 은인으로 인식한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이쪽을 안고 바다를 헤엄쳐 온 것도. 혼절한 이쪽을 정성껏 보살펴준 것도. 전부 이쪽을 은인으로 오해(?)해서 벌인 일인 듯했다.
“허허. 허허허.”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공교로워도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없었다.
‘내가 미노타우로스의 은인이 되다니.’
물론 녀석의 일방적인 오해였다. 하지만 그 오해를 정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해를 확실히 굳혀 버려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당연하지. 이건 기회니까!’
이런 오해는 땡큐다. 그러니 오해가 더 강화되도록, 계속 유지되도록 신경 써야 한다.
‘그러면 경매를 해서라도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미노타우로스가…… 공짜로 날 따르게 될 거거든!’
라키엘의 입가 가득 사악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자고로 공짜는 뭐든지 반가운 법이다. 공짜 라면. 공짜 쿠키. 공짜 사은품까지. 이 세상에 나쁜 공짜는 없다.
하물며 갖고 싶어서 찜했는데 품절(?)됐던 미노타우로스를 공짜로 득템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반가운 상황이 어디 있을까.
라키엘은 환희의 트월킹이라도 찰지게 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우루스의 워낭소리 까만 눈망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선, 고마워.”
“……누우!”
우루스의 콧김이 의기양양해졌다. 표표푝 튀어 오는 콧물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말을 이어갔다.
“넌 내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날 구해주고, 보살펴줬어.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 그래서 나도 널 좀 도와주고 싶거든.”
“누우?”
“네 가슴 말이야.”
톡톡.
녀석의 심장 어름을 가리켰다.
“그때 많이 아팠지?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엔 어땠어? 또 아프진 않았어?”
“누우? 누우우!”
도리도리.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녀석을 향해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한 가지 알려줘야 할 일이 있어. 네 가슴 아프던 거, 사실 다 낫진 않았어.”
“……누우우?”
“지금은 잠깐 통증이 가라앉은 상태일 뿐인 거야. 이대로 그냥 둔다면 언제고 그때처럼 또 엄청나게 아파질걸.”
“……누우우우?”
“그래서야. 제대로 진단을 해서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고 싶은데. 혹시 내가 널 좀 진맥해봐도 될까?”
“……누우우우우?”
“우린 친구잖아. 안 그래?”
“누우!”
자신을 도와주었던 은인이 ‘친구’라고 말해주었다. 우루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입술을 푸르르 떨며 웃었다. 반면, 라키엘의 입가에는 자본주의적 미소가 듬뿍 맺혔다.
‘좋아, 앞으로 이놈을 주구장창 써먹으려면 건강 관리 잘 해줘야지. 안 죽게 해야지. 그래야 최고급 우황을 꾸준히 얻을 수 있을 거니까.’
자고로 우황 중에 최고는 살아 있는 소가 뱉어내는 생황이다. 그러니 우루스가 죽으면 안 된다. 건강이 나빠져도 곤란해진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우황을 팍팍 뱉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넌 이제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이거지.’
허락 없이는 아프지도 못하게 하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강제로라도 건강하게 만들어 버리리라. 그렇게 알차도록 이기적인 다짐을 되새기며 라키엘은 정신을 집중했다.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동시에 마나써클을 회전시켰다.
딩동!
[진맥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이 발동됩니다.]
[진맥 대상이 성공적으로 Lock-on 되었습니다.]
키이이잉……!
시야가 변했다. 온 세상이 어두운 톤으로 물들었다. 오직 우루스의 거대한 몸체에만 밝은 형광 연두색의 외곽선이 덧씌워졌다.
동시에 보였다.
우루스의 신체 내부. 그 속을 흐르는 경혈의 움직임. 어떤 순서로 흐르고 있는지. 어느 곳이 원활한지. 흐름이 난잡한 곳은 어디인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일목요연하게.
라키엘은 그중에서 특히 우루스의 심장과 그 주위 관상동맥의 상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직 협심증 진행이 많이 되진 않았네.’
관상동맥 내의 기혈 흐름이 둔하긴 했다. 아무래도 혈전이 쌓인 까닭인 듯했다. 하지만 심각한 단계까진 아니었다.
‘크레모로 돌아가서 치료를 시작해도 무방하겠고. 그럼 쓸개는 어떨까.’
라키엘의 시선이 우루스의 명치 오른쪽을 향했다. 그곳에 있을 쓸개를 살폈다. 이내 라키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기 있잖아.”
“누우?”
“너 말이야. 최근 2년 사이쯤부터 되새김질을 할 때마다 여기, 명치 부근이 더부룩하진 않았어?”
“누, 누우우? 누우!”
끄덕끄덕!
우루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깜짝 놀란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증상이었다. 사나이는 그런 더부룩함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당연한 듯이 여기며 그냥저냥 감내해왔던 불편함이었다.
한데 은인은 그걸 한 번에 알아맞혔다.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인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 속에 뭔가가 잔뜩 생겨서 그래. 그걸 꺼내면 더부룩한 거, 사라질 거야.”
“누우?”
정말?
되물었다.
은인이 빙긋 웃었다.
“지금 당장 빼도록 해줄게.”
“……누우우?”
지금? 여기서? 조금은 무서워졌다. 설마 배를 가르고 빼겠다는 건 아니겠지? 한데 그런 이쪽의 심정을 짐작한 걸까. 은인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 아파. 안 죽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누우?”
“자, 손가락 두 개를 세우고.”
“누!”
“여길 꽉 눌러.”
“누우!”
“더 세게 꽉.”
“……느우우!”
“그래, 좋아. 그럼 이번엔 이쪽.”
“누!”
꽉꽉! 쿠곽!
우루스는 라키엘의 지시대로 자신의 몸 곳곳을 강하게 짓눌렀다. 물론 우루스는 자신이 누르는 곳들이 어떤 경혈인지 꿈에도 몰랐다.
중간 겨드랑선(midaxillary line) 위쪽, 넷째 갈빗대 사이의 연액혈(淵腋穴). 앞가슴 부위, 일곱째 갈비 사이의 일월혈(日月穴). 아랫배, 배꼽 중심에서 아래로 3촌, 위앞 엉덩뼈가시(anterior superior spine) 안쪽에 자리한 오추혈(五樞穴).
그리고 넓적다리의 바깥면, 엉덩이 정강 근막띠(iliotibial band) 바로 뒤쪽에 있는 중독혈(中瀆穴)까지.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의 주요 경혈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차례로 지압하게 되었다.
말이 지압이지, 최소 수 톤의 힘이 실린 압력이었다. 그 압력이 기혈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향이 변화로 이어졌다. 라키엘은 그 변화를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훤히 볼 수 있었다.
“좋아. 다음은 여기.”
그의 손길이 우루스의 이마를 가리켰다. 눈썹 중앙에서 이마로 올라온 곳. 양백혈(陽白穴)이었다.
“누우!”
우루스의 두 손이 이마 양쪽의 양백혈을 꽉 눌렀다. 그 순간이었다.
“……누우? 딸꾹? 딸꾹!”
우루스가 격렬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눈망울에 당황의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라키엘은 오히려 흡족하게 웃었다. 성공이 가까워져 왔다. 확신을 담고서 우루스를 격려했다.
“자, 이제 마지막 한 군데만 남았다. 여기!”
우루스의 명치를 가리켰다.
주먹을 쥐어 보였다.
“주먹 쥐고, 최대한 강하게 쳐. 지금!”
“……누, 딸꾹! 누우!”
잠깐 망설인 우루스였다. 하지만 은인을 믿기로 했다. 각오(?)를 다졌다. 공성추에 버금가는 크기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셀프 명치샷을 강력하게 때렸다.
콰아앙-!
그 순간.
“누우웁?”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왔다. 뭔가 커다란 덩어리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위장과 식도를 타고 역주행을 하며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오애애액.”
푸확!
게워냈다. 싯누런 색깔의, 피라미드 모양의 정사면체 덩어리가 나왔다. 그 순간, 라키엘이 손을 뻗었다.
텁!
덩어리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았다. 그의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가 맺혔다.
‘……됐다!’
방금 우루스가 게워낸 덩어리. 덩어리를 보는 라키엘의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미친. 대박.’
그야말로 이견의 여지가 없는 최고 등급. 특 S+급 미노타우로스 우황을 득템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