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75화 (75/468)

75화. 나를 증명하는 사람들 (3)

“다음. 하신토의 딸 아니스.”

부둣가에 울리는 라키엘의 준엄한 목소리.

죄인 심문을 구경하러 나왔던 시민들도. 장내를 통제하던 감찰대 기사와 병사들도. 그들을 이끌던 심문관도.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주위를 훑어보는 라키엘의 눈동자. 그 앞에서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라키엘의 뒤에 우뚝 선 미노타우로스 때문에? 잘못 나섰다가 괴수의 분노를 덮어쓸까 봐?

아니었다.

괴수가 주는 압박감보다 라키엘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까닭 없이 쌔했다. 자칫 토를 달았다간? 제대로 경을 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라키엘의 목소리가 너무나 당당하여. 말하는 내용이 더없이 자세하기에. 감히 황태자임을 의심하기가 불안해졌다.

“아니스여. 나의 웨어울프 수간호사인 그대는, 그날 밤 미노타우로스의 팔에 매달려 있던 내가 시장 관사 밖으로 날려가고 있을 때, 온몸을 던져 나를 받아내었지. 그대의 발 빠른 대처와 과감한 행동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온몸이 으스러진 시체가 되어 땅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대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붙잡혀 범선 갑판에 내던져지는 고초와 고통 또한 겪었지. 그 또한, 나를 위한 더없이 큰 용기와 희생이었도다.”

라키엘이 나직하게 말했다. 철창 속 아니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마주치는 눈길.

정말로 고마웠다고. 네 덕분에 살았다고.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노라고. 말없이 다독이고 격려하였다.

콰작-!

우루스의 손아귀가 철창을 부수었다. 데미안에 이어 아니스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감찰대 기사도 감히 제지하려 나서지 못했다.

라키엘의 걸음이 이어졌다.

그의 선언 또한 이어졌다.

“세르지오. 나의 특근대장. 그날 밤, 그대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피신하던 나를 호위하였지. 그뿐이었을까. 미노타우로스가 범선에 난입하여 돌진하였을 때는 가장 앞에서 검을 맞세웠다. 그리하여 검을 잃고, 이곳, 어깨를 심하게 다치며 쓰러졌더랬지. 그러한 용맹과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무사할 수 있었을까.”

“……전하.”

특근대의 최연장자, 세르지오가 울먹였다.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캉-!

철창이 부서졌다.

세르지오가 풀려났다.

라키엘의 걸음이 계속되었다. 그의 나직하고도 진솔한 치하 또한 부두에 낭랑하게 퍼졌다. 나머지 특근대원들이, 충실한 근위기사들이, 차례로 라키엘의 치하를 받았다.

“몬테로와 페드로. 충실한 쌍둥이 특근대원이여. 그대들은 미노타우로스와 맞서는 과정에서 각각 오른팔과 왼팔이 부러졌지. 몬테로는 뿔을 막아내다가 날려가며. 페드로는 그런 형을 잡아주려다가 깔려서. 둘 다 괜찮은가?”

카앙-!

쌍둥이 검투사가 자유를 얻었다.

“리카르도. 그대가 나에게 날아오던 파편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무릎을 다치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도다. 또한, 기사 프란델 경이여. 경은 쓰러진 특근대원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동시에, 미노타우로스의 공세 앞에 가장 끈질기게 버티다가 혼절하며 근위기사의 명예와 모범을 선보였지.”

“저, 전하…….”

“나는 해밀턴 경의 공적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경은 미노타우로스의 돌격에 허리를 다친 상태에서도 또 일어나며 계속 맞서 싸워 나를 지켜주려 하였지. 검을 잃고, 방패가 부서져도, 나무막대를 들고서라도 싸우겠다는 투지를 보였어. 그날 밤 보여준 그대의 모습은 진정 용맹한 근위기사의 표상이었도다.”

“전하아…….”

특근대원들.

그리고 근위기사들.

라키엘을 수행했던 이들이 하나씩 차례대로 풀려났다. 자유를 얻었다. 명예를 되찾았다. 라키엘 곁에 당당히 섰다.

그 모습에 크레모의 시민들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황태자가 나직하게 꺼내는 말들. 그걸 듣다 보니 느낄 수 있었다.

저건 진짜라고.

“……아무래도 저분, 정말로 황태자 전하가 맞으신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신 거지?”

“게다가 미노타우로스는 어떻게 길들이신 거람?”

웅성웅성.

고요하던 부둣가에 술렁임이 생겨났다. 덕분에 황제 직속 감찰대의 심문관은 졸지에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무슨…… 분위기가 이렇게…….’

가슴이 철렁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 라키엘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었다.

‘설마 살아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다른 괴수도 아닌, 미노타우로스에게 잡혀간 황태자였다. 그렇게 행방불명이 된 지가 벌써 엿새째였다.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진즉 미노타우로스에게 잡아먹혔을 거라고. 아무리 노력한들 온전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고. 이 도시에 도착하던 때부터 확신했었더랬다.

하여 황태자의 수행원들에게 책임과 죄를 덮어씌웠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당연한 절차였으니까. 황제가 병으로 죽으면 주치의를 사형시키듯. 존귀한 신분의 죽음과 비명횡사에는 누군가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 책임을 질 대상을 지목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임무이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똑같이 했는데…….’

죄를 덮어쓰는 대상이 억울하건 말건 상관치 않았다. 그저 고민 없이 편하게 일을 처리하는 게 좋았다. 그렇게 자신의 공적을 챙기는 것이 좋았다.

이런 방식은 실제로도 지금까지 이득이 되어 주었다. 매번 신속하고 깔끔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자. 상관들에게 그런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고속승진에 따른 성공가도는 덤이었다. 하여 이번에도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한데 이렇듯, 일이 꼬였다.

‘왜? 어째서 황태자가 살아서 돌아온 거지?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잡아간 미노타우로스와 함께라니,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누군가가 악몽이라고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저, 전하!”

다급해진 심문관이 외쳤다.

이제 전하의 신분이 확인되었노라고. 그만하면 충분하시다고. 저는 그저 절차상 확인을 하려 하였을 뿐이었노라고. 그렇게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 다급한 외침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일개 심문관 따위에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 굳이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심문관의 외침을 무시하고서 태연히 다음 철창으로 다가갔다.

“제르망. 특근대의 막내 검투사. 그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려 끝끝내 용기를 잃지 않았지. 미노타우로스의 돌격에 나가떨어지며 어깨가 탈구되는 고통 속에도 다시 일어나려 애쓰는 모습을 나는 보았도다. 비록…… 그날 밤 내내 다리를 좀 심하게 후들거리긴 하였지만 말이다.”

“……저, 전하?”

“괜찮다. 배가 흔들려서 그랬던 것이야. 맞지?”

“맞습니다악!”

특근대의 막내 검투사, 제르망이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그런 그의 귓가에 라키엘이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때 바지 적셨던 건 말 안 했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철컹-!

철창이 부서졌다. 특근대의 막내까지 자유를 얻었다. 그걸 본 심문관의 표정이 더욱 다급해졌다.

“전하! 전하!”

그가 아예 달려왔다. 라키엘 앞에 무릎을 꿇고 길을 막았다.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대며 외쳤다.

“전하, 감히 전하의 신분확인을 요구한 죄를 비나이다!”

일단 지금은 빌어야 한다. 그런 예감과 확신이 들었다. 황태자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대로 뻗대고 있다간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빌어서라도 황태자의 기분을 달래줘야 하리라.

심문관은 그러한 일념으로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전하, 지금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하옵니다.”

하지만 그의 대처는 통하지 않았다.

라키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심문관을 쓱 지나쳐 갔다. 그런 라키엘의 걸음이 향한 곳. 그곳에 마지막 철창이 있었다.

“이 도시의 시장, 아이젤 크레모. 설마하니 그대까지 이런 고초를 겪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날 밤, 그대는 숱한 위험과 고난 앞에서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서 도시를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나를 범선에 태워 피신시키면서도, 자신의 도시와 시민을 저버릴 수는 없노라며 끝까지 부두에 남기를 택하였어. 그것은 자신의 책무에 모든 것을 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하고 뜻깊은 귀족의 모범이었도다.”

“저, 전하아…….”

크레모 시장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철컹-!

마지막 철창이 부서졌다. 그제야 라키엘의 시선이 심문관을 향해 떨어졌다.

“감찰대 심문관. 그대는…….”

“예, 전하! 저는 전하의 수행원들을 사사로이 미워하여 투옥하고 심문한 것이 아니옵니다!”

“감히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끊는 것인가?”

“……예?”

“방금 내 말을 끊은 것이었는지를 물었도다.”

“…….”

심문관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모르게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송연해진 모골 위로 라키엘의 선고 같은 말이 내리꽂혔다.

“아까, 그대는 나에게 스스로 신분을 증명하라 하였지.”

“…….”

“하지만 나를 증명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내 곁을 지켜준 이들이, 나를 위하여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주는 사람들이다.”

“…….”

“이것으로 대답이 되었겠는가?”

“저, 전하…….”

“또한!”

“…….”

“그대는 방금 말하였지. 내 수행원들을 미워하여 투옥하고 심문한 것이 아니었노라고.”

“그, 그렇사옵니다, 전하.”

“하지만 책임과 죄를 뒤집어씌우기 편한 상대이기에 투옥하고 심문한 것은 맞지.”

“……예?”

“변명할 생각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을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이들은 나를 모시던 사람들이라고, 한데 나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그러니 그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렇게 항변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대는.”

“마, 맞사옵니다!”

“맞아?”

“예, 전하!”

심문관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아닌 것 같은데?”

“……예?”

“사실은 아까 내가 들었거든. 그대가 말하는 걸.”

“무슨…….”

“흠흠!”

라키엘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심문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말하게. 미노타우로스와 공모하여 전하를 해칠 계획을 꾸몄던 것이었노라고. 죄를 자백하여 자비를 구하게.”

“…….”

심문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방금 황태자가 읊조린 저 말. 저건…….

‘아까 내가…… 데미안이라는 저놈에게 자백을 종용하며 했던 말인데…… 설마 그걸……?’

심문관이 떨리는 눈길로 라키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라키엘의 눈빛은 냉랭했다.

“저 말, 그냥 책임자에게 죄를 묻는 말이 아니던데. 내가 잘못 들었나?”

“…….”

“편리하게 죄인을 만들고, 모든 책임과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죄인을 죽이고, 골치 아플 것 같은 사건을 단순하고 신속하게 종결하려 했던 것, 아닌가?”

“…….”

“그대는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가 피랍되어 실종된 사건을 그렇게 날림으로 처리하려 들었던 건가? 정녕?”

“…….”

“내가 아까 물었지. 이곳의 책임자가 누구냐고. 그리하여 나선 것이 그대였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그, 그것은…….”

“책임자는 무릇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그대는, 지금껏 행하였던 날림 수사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할 것이다.”

“…….”

라키엘의 냉랭한 선고가 떨어졌다.

그 순간 심문관은 직감했다.

아.

나는 끝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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