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80화 (80/468)

80화. 명의(名醫) 탄생 (3)

[명의 포인트 (GDP : Great Doctor Point)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어?’

라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온종일 사람들을 진료해준 마당이었다. 그렇듯 멋지게 퇴장하려다가 현기증이 온 상황이었다. 결국엔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어 버린, 생생한 흑역사 탄생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걸 사람들이 다 보고 말았다.

다 된 밥에 스스로 재를 뿌렸다고. 쿨하고 멋지게 물러나긴 틀렸다고. 그냥 망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한데 이런 뜻밖의 메시지라니.

‘명의 포인트?’

이쪽의 의문에 답이라도 주듯, 추가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딩동!

[명의 포인트(GDP)는 일종의 명성 수치 개념입니다.]

[명의 포인트(GDP)는 당신이 의료행위를 통해 사회적 명성을 쌓거나, 큰 존경을 얻거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거나, 의료계의 역사에 남을 업적을 쌓을 때만 특별하게 쌓이는 포인트입니다.]

‘명성 포인트?’

문득, RPG류의 게임이 떠올랐다. 저런 명성 시스템을 채용한 게임들이 종종 있었다. 명의 포인트도 비슷한 개념인 듯했다.

[오늘, 당신은 한나절에 걸쳐 수많은 환자를 성심성의껏 진료하고 보살폈습니다. 그 와중에 당신은 한 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으며, 그 결과 과로와 탈력 상태에 빠져 쓰러졌습니다.]

[크레모의 수많은 시민들이 당신의 이러한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크레모의 시민들이 잔잔한 감동을 느낍니다.]

[크레모의 시민들이 진심으로 당신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러한 선행은 앞으로 소문의 힘을 타고 더욱 널리 퍼져 당신의 명망을 드높일 것입니다.]

[101 GDP 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명의 포인트(GDP) = 101]

‘101 포인트? GDP?’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인트를 준다니 일단은 기뻤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도 생겨났다.

‘명예 포인트라는 거, 좋긴 한데…… 그럼 이걸 어디에 써먹는 거지?’

설마 그냥 쌓이기만 하는 생색내기용 포인트인 건가. 그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써먹을 곳이 있어야 제대로 된 포인트지!’

포인트라는 게 그런 법이다. 하다못해 동네 슈퍼나 마트에서 적립하는 포인트도 그렇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알뜰살뜰 쌓아서, 언젠간 원기옥(?) 터뜨리듯 포인트를 쓰는 맛! 그렇게 공짜 아닌 공짜로 먹는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는 얼마나 맛있는지!

‘그러니까, 명의 포인트인지 GDP인지 하는 이건 용도가 뭐냐, 대체.’

설마 진짜 생색내기 포인트인 건 아니겠지. 라키엘이 의혹과 불안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딩동!

상큼한 알림음과 함께, GDP의 사용법이 안내되었다.

[유능한 의료인은 때로 본심을 숨길 수도 있어야 하는 법! 환자의 고통과 절박함, 그를 통해 느끼는 서글픔과 동정의 마음을 애써 누르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할 때도 있는 법!]

[당신은 개방된 GDP 포인트를 활용하여 <거짓말 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거짓말 이용권?

이건 또 뭘까.

라키엘은 눈동자를 샤샤샥 굴렸다. 아래쪽에 뜨는 추가 메시지를 재빠르게 읽어내려 갔다.

[거짓말 이용권은 100 GDP로 1장의 수량을 구매할 수 있는 쿠폰입니다.]

[거짓말 이용권을 사용할 시, 대상은 당신이 꺼내는 하나의 거짓말을 무조건적으로, 영구적으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 이용권은 1회용입니다.]

[거짓말 이용권을 사용할 시, 당신은 이용권의 효과를 받을 대상을 지정해야 합니다.]

[거짓말 이용권으로 지정할 수 있는 대상은 1회당 1명으로 제한됩니다.]

[거짓말 이용권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짓말은 1회당 한 가지의 거짓말입니다.]

[사용 시 주의사항 : 대상이 신화적 존재, 혹은 그에 근접한 존재일 경우 당신의 이용권 사용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

미친.

이거 사긴데?

보자마자 절로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솔직히 좀 뻥이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진짜였다. 메시지 창에 당당히 떠올라 있는 마지막 내용 때문이었다.

[현재 보유 중인 GDP로 구매할 수 있는 거짓말 이용권 수량 : 1장]

‘……진짜네.’

메시지 창은, 시스템 창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건 진짜라고 보아야 한다. 덕분에 입꼬리가 절로 씰룩씰룩 팝핀댄스를 추려 했다.

‘대박.’

한 번에 하나의 대상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무조건, 진실로 믿게 할 수 있단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케 해주는 이용권이란다.

‘상대방이 신화적 존재만 아니면 돼. 그런데 내가 그런 존재를 만날 일이 없으니까 그런 단점은 패스하고. 이거, 잘만 쓰면…… 세상살이 엄청 편해지겠는데?’

잠깐 생각해봐도 그런 결론이 딱 나왔다. 머리를 굴리기에 따라 활용법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잘만 하면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온갖 기행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이다.

‘미친 이용권이네, 이거.’

마음 같아선 이게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 당장 테스트라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참자. 이용권 한 장밖에 못 사잖아. 그러니까 아껴야지. 어차피 써야 할 순간이 오면 효과도 확인해볼 수 있을 거니까.’

라키엘은 생각을 갈무리했다.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데미안이 이쪽을 부축하며 물어왔다. 갑작스레 풀썩 쓰러진 이쪽 때문인 걸까. 물어오는 목소리 가득 근심이 배어 있었다. 녀석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안 괜찮으면 업고 뛰게?”

“예.”

“어디로 뛸 건데?”

“의사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지만…… 이렇게 되물으시는 전하의 모습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예. 다행히.”

녀석이 손을 내밀어 왔다. 그 억센 손을 맞잡았다. 천천히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그런데 넌 왜 내가 넘어질 때 안 잡아줬냐?”

“못 잡은 겁니다.”

“정말로?”

“예. 너무 갑자기 풀썩 넘어지셔서.”

“쓰읍. 아닌 거 같은데.”

“정말입니까?”

“어. 못 잡아준 사람 치곤 제법 태연한 기색이라서.”

“……들킨 겁니까.”

“어. 왜 안 잡아줬냐?”

“더 극적인 홍보를 하실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데미안 녀석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덕분에 어처구니가 증발했다.

“……뭐어?”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또한, 넘어지던 자세와 각도가 제법 안정적이기도 하셨고 말입니다. 전하의 궁둥짝이 은근히 빵빵한 편이셔서. 별반 다치실 일은 없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

“혹시, 어딘가 다치셨습니까?”

“어.”

“어딜 다치셨습니까?”

“내 마음.”

“…….”

“후우. 내가 이런 놈을 호위라고.”

“그래도 전하께서 진짜 위험에 노출되셨을 때는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차라리 안정적인 봉급줄을 지키려 노력한다고 하지 왜.”

“그건 당연한 거고 말입니다.”

“…….”

“어쨌건 결과적으로는 지켜드릴 거니까.”

“허허.”

이놈 보소.

하지만 라키엘은 데미안은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녀석의 대꾸에 웃음만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뭐, 말은 저렇게 능청스럽게 하지만…… 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와 줄 녀석이니까.’

그날 밤이 그랬다. 우루스의 습격을 받았던 날 그러했다. 자신이 어떤 위험에 빠져도, 설령 다치는 일이 있어도, 이쪽부터 지켜주려 들었던 녀석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녀석의 능청스러운 대꾸에도 웃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매운 반격까지 감행(?)할 수 있었다.

“쓰읍. 감히 황족을 면전에서 능멸해?”

“혹시 사형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어.”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왜.”

“제가 없으면 누가 전하를 지켜드립니까?”

“아니스, 세르지오, 그 밖에도 특근대원들도 있고. 근위기사들 많잖아.”

“…….”

“너 특별한 거 아니거든. 착각하지 말고. 자만하지도 말고. 어? 좀 분발하자?”

“…….”

데미안의 표정이 썩어갔다. 라키엘의 눈웃음이 흐뭇해졌다. 그렇게 녀석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을 내려왔다. 단상 아래에는 어느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 출발하시려는 겁니까, 전하?”

마차 옆에서 기다리던 크레모 시장이 물어왔다. 시장 역시나 이쪽이 염려스러운 기색이었다.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겸연쩍게 웃고 말았다.

“잠깐 다리가 꼬여서 엉덩방아를 찧은 거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고.”

“하오나 전하? 그래도 가급적 하룻밤 정도는 푹 쉬고 출발하심이…….”

“괜찮아. 가는 동안 마차에서 자면 돼.”

“침대보단 덜 편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나한텐 똑같아.”

정말이다.

학생 때부터 전철, 버스에서 자던 습관이 있으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풀숙면 모드로 자다가도 내릴 정거장을 앞두면 자동으로 눈이 번쩍 떠지는 그런 패시브 스킬 같은 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으니까.

“마차에서 자는 게 얼마나 편한데. 어쨌건 여기서 머무르는 동안 신세 많았어. 오늘 수여식 행사도 좋았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여전히 이쪽을 걱정하면서 배웅하는 크레모 시장.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민들의 물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차에 올랐다. 그제야 쌓인 피로가 한숨처럼 훅 흘러나왔다.

“……후아.”

덜컹덜컹 출발하는 마차. 그 뒤를 다각다각 따르는 특근대와 근위대. 다시 그 뒤를 쿠쿵쿠쿵 따르는 우루스까지.

일행이 출발했다. 광장을 벗어났다. 크레모의 명물이라는, 어쩐지 야비한 인상의 로이드 프론테라 동상을 지나쳤다. 관문을 통과하고, 도시를 떠났다. 다사다난했던 여정을 매듭짓는 출발이었다.

그렇게 덜컹덜컹, 다각다각, 쿠쿵쿠쿵. 순조롭게 이동하는 동안 라키엘은 마차에서 풀 숙면을 취했다. 일행을 스쳐 가는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바닷가가 보이는 언덕을 지나. 풀숲 우거진 아침 가랑비를 헤치고. 시원하게 흐르는 강과 다리를 건너. 밤이슬 떨어지는 들판을 거닐듯 내달려. 여덟 번의 떠오르는 해와 석양을 눈썹달 가득 담았다. 한밤의 별빛 아래 은하수보다 환히 빛나는 불야성의 도시에 도착했다.

황도 마젠타로의 귀환.

크레모에서 출발한 지 여드레만의 도착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황도에 도착했으되, 별궁으로 향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귀환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황도 관문의 당직 장교가 전한 황명 때문이었다.

“결전! 황도 방위군 6보병연대 2대대 1중대장, 미카르도 중위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처척, 중위가 절도 있는 경례를 했다. 이쪽 일행에 끼어 있는 우루스를 보며 긴장하면서도, 선뜻 황금색 봉투를 내밀어 왔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황명입니다, 전하.”

“폐하께서?”

“예, 그렇습니다!”

“…….”

황제 그 양반.

이쪽이 돌아오자마자 뭔가를 시키려는 건가. 그래서 관문에 이런 황명을 맡겨둔 건가.

‘쓰읍. 찜찜한데.’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황명이 담긴 봉투를 받았다. 황명은 심플했다.

[황태자는 황도에 돌아오는 즉시 입궁하여 짐을 찾아올 것. 이상.]

“…….”

더 찜찜해졌다. 황도에 오자마자 자길 찾아오라니.

‘쌔한데.’

황제는 결코 호락호락한 양반이 아니다. 속에 사자 갈기 휘날리는 능구렁이 백만 마리를 품은 자다. 한데 그런 황제가 이쪽을 부른다는 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다.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부를 양반은 아니지.’

하지만 황명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 라키엘은 마차를 황궁으로 돌렸다. 그리고 내심 다짐했다. 황제가 이상한 걸 시키거나 선을 넘으면?

……거짓말 이용권, 확 써 버릴 테다, 라고.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