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황제라는 이름의 아버지 (1)
문득, 옛 생각이 난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를 굴러가는 마차 바퀴 소리 때문에? 마법으로 밝힌 누르스름한 가로등 불빛 때문에? 그 사이를 지나치는 덜컹거림이. 약간은 서늘하면서도 눅눅한 밤 공기가. 긴 하루를 마치고 어딘가로 돌아가는 조금은 노곤한 기분이. 그런 모든 감각이 기억의 한 자락을 자꾸만 간질여서?
모르겠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잠깐 졸았나.’
아무래도 크레모에서 황도까지 돌아오는 긴 여정이 피곤했던 건가 보다. 여드레 내내 마차에서 지겹도록 잠을 잤는데. 또 졸았던 건가 보다. 마치, 그 시절처럼.
‘고3 때 생각나네.’
원래는 학교 근처에 집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그랬었다. 한데 3학년 1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집이 이사를 했다. 부산 대연동에서 해운대로. 당시 그쪽엔 전철도 안 뚫려 있었다.
버스로는? 지금도 기억 속 생생한 40번, 109번 버스. 그걸 타고 등교하는 데에만 무려 1시간 반이 걸렸다. 하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야자를 마치자마자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밤 12시가 다 되어 있곤 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를 굴러가던 버스 바퀴 소리. 밤거리를 밝히던 누르스름한 가로등 불빛. 그 사이를 내달리던 덜컹거림이. 약간은 서늘하면서도 눅눅하던 밤 공기가.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나날의 노곤함이.
매일이었다.
피곤했다.
그땐 그게 참 지겨웠다.
‘그래서 거짓말…… 많이 했지.’
선생님한테는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늦어진다고, 학원이 집 근처에 있다고, 야자를 다 하고 가면 학원에 늦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부모님께도 거짓말을 했다. 야자 잘 하고 있다고. 그거 마치고 오니까 이렇게 늦는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야자를 빼먹었다. 야자시간만큼 놀다가 집에 가곤 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날도, 그랬다. 그래서 연락을 늦게 받고 말았다.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느라고 전화가 온 줄도 몰랐다. 그래서였다. 뒤늦게 연락을 받았을 땐, 모든 게 너무 늦은 뒤였다.
“……쯧.”
그만 생각하자.
라키엘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황제가 이쪽을 부른 마당이다. 그 깐깐하고 까칠한 양반이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모른다. 그러니 괜히 우울해지는 상념에 빠지지 말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전투태세를 갖추자.
나름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입궁을 마쳤다. 마차에서 내렸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전하. 이쪽으로.”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시종장의 뒤를 따라갔다. 수많은 복도와 계단, 모퉁이를 지나쳐 알현실에 도착했다. 한밤의 알현실은 비어 있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곧 당도하실 것입니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겨우 2, 3분쯤 있었을까. 알현실의 반대편 문이 열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러나 자주 마주치고는 싶지 않은 장년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황제였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자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습니다.”
“…….”
얼굴을 보자마자 기계적으로 예를 표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화답은 없었다. 황제는 대꾸조차 없이 이쪽의 앞을 쌩하니 지나쳤다. 상석에 앉아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먼저 해보라는 눈빛.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무감정한 눈동자.
꿀꺽.
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난감하고, 곤혹스러웠다.
‘저 양반, 또 이런 식이네.’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에 사람을 다짜고짜 불러놓고선. 그래놓고 할 말이 있으면 먼저 해보라는 저런 태도라니.
‘보통은 부른 쪽이 용건을 꺼내는 게 정상 아닌가?’
막말로 이쪽은 황제가 무슨 용건으로 부른 건지 감도 안 왔다. 그런데 다짜고짜 저러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해졌다.
일부러 기를 죽이려고 저러는 거겠지. 라키엘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상황이 애매할 때는 일단 지켜보는 게 상책. 그렇게 판단하며 황제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결국,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짐이 하나 묻자꾸나. 크레모에서의 너는 어찌하여 그토록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응으로 수행원들로 하여금 고초를 겪게 하였느냐?”
“…….”
역시 이거였구나.
크레모에서의 일을 추궁하려고 부른 거구나. 그런데, 무책임하고 무능했던 대응이라니. 그날의 어떤 행동을 가리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
황제의 날카로운 추궁이 이어졌다.
“어찌하여 대답이 없느냐. 미노타우로스가 시장 관저를 습격하였노라 들었다. 맞느냐?”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래. 네가 그 상황에 휘말려 목숨이 경각에 달하였다고도 들었다. 그것 또한 맞느냐?”
“역시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기에 이렇듯 묻는 것이다. 너는 그날, 왜, 더 신속하게 도망치지 못하여 너를 지키려던 수행원들을 쓸데없는 위험과 고초에 시달리게 하였느냐.”
“그건…….”
“나름 최선을 다하여 피신하였노라 변명하고 싶겠지. 하지만 틀렸도다. 너는 위험이 닥치기 전에 미리 몸을 피했어야 했다. 그 위험조차 미리 예견하고 대비하였어야 했다. 모든 환경이 안전한 황도를 떠나 미지의 장소에 가 있는 처지라면, 자신이 지닌 황태자위의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었더라면, 만사에 그러한 대비를 마땅히 하였어야 했도다.”
“…….”
“하지만 너는 그렇지 못했지. 황도에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마음가짐으로 타지의 생활에 임하였다. 그렇기에 다가오는 위험을 예견하지 못하였고, 미리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너를 수행하는 이들을 크나큰 고난과 위험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
이 아저씨,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그런데 정작 내 걱정은 하나도 안 해주는구나. 조금은 억울했다. 뭐라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의 날카로운 꾸중과 설교가 먼저 이어졌다.
“너는 장차 짐의 자리를 물려받아 수백만의 제국 백성을 보듬고, 이끌고, 품으며, 책임져야 할 사람이다. 한데 일신의 사소한 대비를 소홀히 하여 고작 수십 명도 되지 않는 수행원을 쉽사리 위험과 고난에 빠뜨렸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느냐.”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굉장히, 억울하다. 한데 어쩐지, 반박할 말이 딱히 없다. 듣고 보면 황제의 꾸중이 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이번의 일을 깊이 반성하고, 너의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를 스스로 돌이켜 앞으로의 양분으로 삼거라. 그리하여 이후 다시는, 같은 실책을 반복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폐하.”
“더 할 말은?”
“있습니다.”
냉큼 대답했다. 황제의 말이 전부 맞는 말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순순히 숙이고만 끝내긴 싫었다. 뭐라도 맞딜(?)을 하고 싶었다.
‘안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일방적인 관계가 될 거니까.’
원래 기세 싸움이라는 것이 그렇다. 한번 고분고분 숙여 버리면? 그걸로 관계가 고정된다. 한번 고정된 관계나 힘의 균형은? 흔들거나 바꾸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하물며 그 상대가 황제라면 더할 것이다.
‘계속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다니기 십상이겠지. 그러면 안 돼. 조금이라도 받아치는 모습을 보여야 해.’
그래야 앞으로가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리라. 라키엘은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황제의 의표를 찔렀다.
“폐하의 말씀을 새겨듣겠습니다. 하여 저도 감히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여쭙고 싶은 일?”
“그렇습니다.”
“말하도록.”
“예, 폐하. 감히 여쭙건대, 혹여 제가 일전에 당부드렸던 연초 끊기에는 성공을 하시었는지요?”
“……뭐?”
황제의 눈썹이 꿈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 연초를 끊으시었는지 감히 여쭈었습니다.”
“…….”
이번엔 황제의 입이 다물렸다.
뜻밖의 의표를 찔린 걸까. 그렇다면 더 흔들자. 라키엘은 반격(?)에 박차를 가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초는 반드시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 하시어야 보다 건강하게 국사를 돌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조금 전에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폐하께서야말로 수백만의 제국 백성들을 보듬고, 이끌고, 품으며, 책임지고 계시지 아니하겠사옵니까?”
“허어. 그건…….”
“하오니 연초만큼은 무조건! 멀리하셔야 합니다. 폐하의 건강이 곧 황가의 안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괜히 기세 싸움을 하겠다고만 하는 소리 또한 아니다.
‘실제로 황제는…… 지나친 흡연과 스트레스 때문에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니까.’
문득, 원작 마검황 속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황태자 라키엘이 죽은 후였을 것이다. 황제의 흡연이 한층 늘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검을 손에서 놓고, 종일 연초를 찾곤 했다.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래서였다.
‘무조건 금연을 시켜야 해.’
금연에만 성공해도 뇌졸중이 생길 확률이 엄청나게 내려간다. 내가 고3이었던 그날 쓰러지셨던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그렇게 허물어졌던 우리 집처럼 되지 않으려면. 황제가 무조건 연초를 끊어야 한다.
그래야 제국이 다가올 전란에 휩쓸리지 않는다. 황가가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편해진다. 라키엘은 그러한 일념으로 충언을 이어갔다.
“흔히들 흡연이 가정을 흔들고 사회를 무너지게 한다고 호들갑을 떨곤 합니다. 지금 드리는 제 말씀도 그렇게 들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호들갑이 아닙니다. 과장도 아닙니다. 폐하께서 쓰러지시면 황가가 흔들리고, 제국이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실질적으로 닥쳐올 수 있을 미래이며, 현실입니다.”
“…….”
“하오니 연초, 반드시 끊으시어야 합니다, 폐하.”
황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그 순간, 황제가 뜻 모를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뜻밖의 대답을 꺼냈다.
“연초라면 이미 진즉 끊었다만.”
“예?”
“진즉 끊었노라 하였다.”
“……정말이시옵니까?”
“당연하지.”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일전의 그날, 네가 감히 잔소리를 하였던 날부터 끊었도다.”
“…….”
“하면 다른 할 말은?”
“……없습니다.”
라키엘은 내심 혀를 찼다.
역시나 황제 이 양반,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금연에 성공하고 있다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행여나 또 꼬투리를 잡힐까 싶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하오면, 더 내리실 말씀이 없으시면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라. 한데 말이다.”
“예?”
“마법이 깃든 환상종의 먹이를 함부로 먹지는 말거라. 그토록 삽시간에 덩치가 커지는 것이 결코 몸에 좋을 리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
“…….”
설마 이쪽이 빨간 해바라기 씨를 먹은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러면 둘러댈 여지도 없겠구나. 그나마 또 다른 책망을 듣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라키엘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는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그가 떠난 알현실이 고요해졌다. 그곳에서 황제 아스테리온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허허…… 허허허.”
흐뭇했다.
몰라보게 달라진 아들의 모습이 뿌듯했다. 예전이었다면 자신의 꾸중 앞에 감히 아무런 대답도 못 하였을 아들이, 숨도 마음대로 못 쉬었을 아들이, 이제는 연초를 끊었느냐며 감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던 모습이라니.
‘너는 이 아비가 그렇게도 염려가 되었던 것이더냐. 허허, 허허허!’
흡족했다.
더없이 대견했다.
크레모에서 느닷없이 위험에 맞서야 했던 아들의 행적이. 그 끝에 괴수인 미노타우로스를 길들였다는 성과도. 무엇보다, 저렇듯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더없이 흐뭇하고, 뿌듯하고, 행복했다. 이것이 황제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소소한 기쁨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더 응원해주고 싶었다. 아들의 등에 더욱 튼튼한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하면, 저 아이가 개발한 신약에 대한 건은?”
황제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잠시 후, 알현실 한쪽의 그늘 속에서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명하신 대로 황가의 정보 역량을 총동원하여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한 소문을 널리 전파하는 중이옵니다.”
“결과는?”
“제국 영토의 가장 변두리에 자리한 귀족이라도,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게 될 것이옵니다.”
“좋군,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
그의 미소가 더욱 흐뭇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