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황제라는 이름의 아버지 (2)
흐뭇해진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 오랜만에 반겨주는 목소리.
“……즈어어어언하아-!”
가르딘 경이 오열하며 뛰어나왔다. 심지어 구두 한쪽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그런 사실도 모르고서 양말 바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라니.
“워워. 뚝! 정지!”
설마하니 저 기세 그대로 뛰어와서 와락,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소름 끼치는 상황을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재빨리 가르딘 경을 말렸다.
다행히(?) 경에게도 이성의 끈이 흔적이나마 남아 있었던 걸까. 이쪽과의 거리를 1미터 남겨두고서 급브레이크를 밟듯 멈춰 섰다.
그리고 또 절절히 외쳤다.
“즈어어어언하아아-!”
“……어오, 귀 터지겠다.”
“저어어언하아!”
“누가 들으면 나 죽은 줄 알겠네.”
“하지만, 저어언하!”
“그렇게 내가 반가워?”
“아뇨!”
“…….”
가르딘 경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데 그 몰골(?)이 참으로 초췌했다. 잠깐 3주쯤 못 본 것뿐인데, 잘생긴 얼굴이 홀쭉해졌다. 눈가엔 다크써클이 덕지덕지였다.
“가르딘 경?”
“예, 전하!”
“혹시 뭐 잘못 먹었어? 안색이 왜 그렇게 어두워?”
“일이 너어어무 보람차서 말입니다!”
“보람?”
“예!”
“어떤 보람?”
“전하께서! 한의원의 저 많은 입원환자들을 저한테만 홀라당! 다 맡기고 가셨거든요! 어허허허허!”
“…….”
아 참. 그랬지.
그래도 가르딘 경은 나름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던 듯했다. 아니,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노력했던 것인지도.
라키엘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서 그동안 혼자 고생이 많았겠구만?”
“그럼요!”
“그래서 내가 돌아온 게 반가워?”
“예, 전하!”
“이제부터 탱자탱자 쉴 수 있는 꿀 같은 나날이 펼쳐질 거 같고. 막 희망의 분수가 쑴펑쑴펑 솟구치고. 그런 거야?”
“아무렴요!”
“정말?”
“…….”
“진짜?”
“……크흑!”
다시금 터지는 가르딘 경의 눈물보. 하지만 저 모습이 가식이라는 걸 안다. 그저 반가워서. 이쪽이 무사히 돌아와 줘서. 그 사실이 다만 기쁘고 즐거워서. 한데 그걸 말하자니 조금은 쑥스러워서. 일부러 저러고 있음이 느껴지는 걸 어찌할까.
라키엘은 흐뭇하게 웃었다.
“어쨌건, 내가 없는 동안 자리를 잘 지켜줘서 고맙고.”
“……예, 전하.”
“과로 때문에 원기가 상한 것 같으니까 이따 약이나 한 첩 지어줄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하.”
“쯧. 괜찮긴. 볼이 쑥 들어갔구만. 그나저나, 크레모에서의 일은 들었지?”
“예, 전하.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 그런데 어떡하나.”
“예?”
“이젠 더 놀라게 될 거 같아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르딘 경.
그 순간이었다.
“……누우?”
돌연,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과 가르딘 경을 뒤덮었다. 경에게 재빠르게 접근했다. 커다란 혓바닥을 내밀었다.
할짝?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의 넙데데한 혓바닥이 가르딘 경의 상의를 홈빡 적셨다. 하지만 가르딘 경은 놀라지 않았다. 기겁하거나 자지러지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우루스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갸웃.
“……전하?”
“어.”
“저, 혹시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응? 왜?”
“이상하게 헛것이 보여서 말입니다. 그것도 엄청 실감나게.”
“아, 그거 헛것 아닌데.”
“헛것이 아니라구요?”
“응.”
“저게요?”
“어.”
“진짜로 말입니까?”
“당연히. 인사해. 얘 이름은 우루스고, 안 물어.”
“……끼야아앙갸아!”
“쯧. 별로 안 놀랐으면서 호들갑은.”
“들켰습니까?”
“어. 티 나잖아. 내가 미노타우로스를 길들여서 데리고 온다는 소식도 이미 파다하게 퍼졌다던데. 그거 다 들었을 거면서. 그나저나, 내가 없던 사이에 별다른 일은 없었나?”
“별일 없었습니다. 다행히 응급환자나 중환자도 없었고 말입니다. 아, 하나 있긴 합니다.”
가르딘 경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말했다.
“최근, 그러니까 어제쯤부터 말입니다. 별궁 한의원에 이상한 문의가 자꾸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상한 문의?”
“예, 전하. 자꾸 있지도 않은 약을 사겠다고…… 귀족들이 난리가 났지 뭡니까.”
“약이라면?”
설마.
라키엘은 미간을 좁혔다. 혹시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벌써? 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가르딘 경이 말했다.
“예, 미노타우황청심원 말입니다. 전하께서 개발해서 팔겠노라 일찍이 밝히셨던 새로운 약 말이지요. 한데 그거, 어떻게 만드셨길래 벌써 전국 각지에 소문이 쫙 퍼진 겁니까?”
“전국에? 소문이?”
“예, 전하.”
“쫙 퍼졌다고? 벌써?”
“예.”
“……허허, 허허허.”
이거 실화인가.
이쪽이 크레모에서 훈장 수여식을 벌인 게 겨우 8일 전인데. 설마하니 고작 그 사이에,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한 소문이 제국 구석까지 싹싹 퍼졌다고?
‘그게 가능해?’
라키엘은 믿기지가 않았다.
나름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황태자의 이름을 걸고서 수여식까지 벌이긴 했다. 그러니 언젠가는 소문이 슬금슬금 퍼지게 될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물론…….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소문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퍼진 듯했다. 얼떨떨해질 지경이었다. 한데 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한의원 원장실의 책상이 온통 전국 각지에서 전서구에 실려온 문의 편지로 점령(?)되어 있었다. 미노타우황청심원을 구매하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경쟁적으로 보낸 편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의원에 돌아온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별궁 앞이 북적북적해졌다.
“……저게 전부 귀족가에서 보낸 심부름꾼들이라고?”
“예, 전하.”
“그러니까, 미노타우황청심원을 사겠다고 새벽부터 줄을 서 있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전하.”
“후아.”
아닌 게 아니라, 별궁 관문 밖에 줄이 가득했다. 그걸 보자 실감이 확 났다. 짜릿한 보람 또한 쑴펑쑴펑 샘솟았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 서는 맛집 사장 기분이 이런 건가.’
대한민국에서 한의원을 할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영업 대박의 하루를 체험해보는구나.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줄 선 순서대로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전하.”
그때부터였다. 미노타우황청심원 예약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구매를 희망하는 고객은 대부분이 귀족이었다. 혹은 부유한 평민 상인도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비싸게 파는 물건이니까.’
미노타우황청심원. 이건 싸게 박리다매를 할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우루스가 뱉어준 최상급 우황으로 만들 수 있는 약재의 수량에 한계가 있으니까. 당분간은 그걸로 판매를 하면서 버텨야 하니까.’
다음 우황이 만들어지고, 그걸 우루스가 뱉어줄 때까지는 최소 1년은 걸릴 것이다. 1년 동안 판매할 수 있는 수량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한정적인 수량을 최대한 비싸게 팔 꼼수를 발휘했다. 그것은 고급 패키지화였다. 올해 1년 동안 판매될 미노타우황청심원 제품만의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본격적인 패키지화를 시도했다.
[미노타우황청심원 - 황태자 Edition (제국력 987년산 / First Year Special)]
……이라는 이름 아래, 꿀에 절인 당절임 홍삼 세트와 자잘한 약재 이것저것을 덧붙였다.
‘물론 그냥 파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포장도 퍼스트 이어 스페셜답게 은박 금박 빵빵하게 입혀서!’
원래 패키지라는 것이 그렇다. 특별 한정판이 그렇다. 명절 선물세트만 봐도 뻔하다. 마트에서 따로 평범하게 사면 몇천 원밖에 안 될 물건들이, 설날 추석 선물세트로 묶이는 순간 가격이 배로 뛰어오르는 기적(?)을 선보이곤 한다.
하지만 팔린다. 이상하게도, 진짜로 팔린다. 그때에만 팔리는 물건이니까. 구색을 갖추기 위해 사는 품목이니까. 게다가 이건 다른 것도 아닌 퍼스트 이어 스페셜. 즉, 브랜드의 론칭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첫해 한정판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통한다는 거지!’
라키엘은 확신했다. 그 확신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예약이 말 그대로 폭주했다. 겨우 이틀 만에 1년 치 판매 예약분이 전부 완판되었다!
‘……실화냐!’
진짜로 실화였다.
한정판이 주는 위력이었을까. 귀족들이 더욱 열성적으로 구매 경쟁을 벌였다. 황태자가 직접 만들어서 파는 약이라는 상징성. 고급 명품 한정판이라는 이미지. 그런 명품을 제때에 갖추지 못하면 유행에 뒤떨어질 거라는 조바심까지.
덕분에 라키엘의 입이 귀에 걸렸다.
‘돈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는 신이 나서 미노타우황청심원을 제조했다. 다만, 예약을 받은 물량을 한꺼번에 모조리 제조하진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별궁 한의원의 입원 환자, 내방 환자들을 보살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틈틈이 쉬는 시간을 줄여가며 미노타우황청심원을 만들었다. 자연히 생산량이 감질맛(?)나게 조절되었다. 한데 그게 또 의도치 않은 대박을 불러왔다.
“저기, 전하?”
“음?”
“또다시 귀족들의 문의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문의? 무슨 문의?”
별궁 오전 진료를 마치고 모처럼 한숨을 돌리려던 때였다. 가르딘 경이 헐레벌떡 뜻밖의 사실을 알려왔다.
“그러니까, 으음,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한 문의입니다.”
“그거 이미 1년 치 예약 끝났잖아. 다음 시즌 예약 때 접수하라고 해.”
“아,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럼?”
“이미 예약해서 대기번호를 받아놓은 귀족들의 문의가 계속 들어오는 중입니다.”
“……무슨 문의길래.”
“그게, 웃돈을 드릴 테니 예약번호를 앞당겨줄 수 없느냐는 문의가 대부분이지 말입니다.”
“허허?”
이어지는 가르딘 경의 말은 이러했다. 지금 황도의 귀족들 사이에 난리가 났단다. 미노타우황청심원 예약을 걸어놓고도 곧바로 약을 받지 못하니, 귀족들의 조바심이 아주 천장을 뚫을 기세란다.
“게다가 빠른 순번으로 약을 받은 몇몇 귀족들의 체험담이 입소문으로 퍼지는 중입니다.”
“입소문? 뭐라고 퍼지고 있길래?”
“이틀 전에 귀족원의 트레카 후작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는데, 미노타우황청심원을 먹고서 기력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허허, 협심증이 해결된 건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약을 먹은 이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단잠을 이루었노라고, 평생 그렇게 개운하게 잠을 잔 적은 처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퍼뜨린다고 합니다.”
그런 덕분이었다.
명품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경쟁적 환상. 거기에 실제로 약빨(?)을 체험한 이들의 극찬까지. 덕분에 예약이 완판됐는데도 미노타우황청심원의 인기가 더욱 치솟았다.
그런데 생산량은 여전히 적었다. 그래서 뜻밖의 이미지가 붙었다. 오래 기다려서라도 구매하는 약. 딱, 그런 식의 프리미엄 이미지였다.
‘이거, 완전 허니빠다칩이네.’
문득, 한국에서 한때 광풍을 몰고 왔던 과자가 떠올랐다. 기다려서라도 사는 제품. 그것만으로도 인지도가 쑥쑥 올라가는 그런 제품. 그게 지금 미노타우황청심원이 받고 있는 효과였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케이스가 더 있긴 했지. 1년이나 대기를 해야 받을 수 있다는, 자동차계의 허니빠다칩인 뽈보라든가. 혹은 매장 오픈하자마자 달려가서 대기번호 받아야 한다는 롤락스 시계라든가.’
어쨌건 좋은 현상이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완판남의 기분을 만끽하는 며칠을 보냈다. 한의원의 자금이 차츰 빵빵해져 갔다. 환자들의 진료도 순조로웠다. 보너스 수명도 쏠쏠하게 챙겼다. 모든 것이 완벽한 며칠이었다. 절로 행복해지는 시간이었다.
이대로만 모든 것이 흘러가면 좋겠다고. 황태자로서의 꿀 빠는 삶을 만끽하게 되리라고. 희망찬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한데 그렇게 지낸 지 열흘째. 뜻밖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것은 바로 가르딘 경이 전해 온, 황제의 부름이었다.
“뭐? 또 입궁하라고?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쯧.”
라키엘은 미간을 콱 찡그렸다. 아침부터 대뜸 입궁을 하라는 황제의 전언이라니. 덕분에 계획했던 하루 스케쥴이 시작부터 다 꼬이게 생겼다. 하지만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차 준비시켜줘.”
진료용 가운을 벗었다. 알현을 위한 정복을 갖추었다. 마차에 몸을 싣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알현실로 갔다. 그동안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이번엔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부르는 걸까.’
황제는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조금만 실수해도 그걸로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자다. 그러니 매사에 철저하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각오를 다지며 걸었다.
한데…….
‘이쪽은 알현실이 아닌데?’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시종장이 안내하는 복도가 평소와 달랐다. 익숙한 알현실 방향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황궁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뭐지.
진짜 제대로 뭔가 탈탈 털어보려고 각 잡고 부르는 건 아니겠지.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라키엘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가 기다리는 곳에 도달했다.
“이쪽입니다, 전하.”
천천히 열리는 문. 저 너머에 도사리고 있을 황제. 그 양반은 오늘 어떤 까칠한 태도로 곤혹스러움을 안겨줄까. 마음의 각오를 새기려던 순간.
“……어?”
라키엘은 멈칫하고 말았다.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열린 문 안쪽.
그곳에 황제가 누워 있었다. 새하얀 시트에 감싸인 모습으로. 한쪽 얼굴 근육이 온통 뒤틀어진 모습으로. 의식조차 차리지 못하고서 무력하게. 그러니까 저건, 너무나 전형적인…….
‘……뇌졸중?’
깨달음과 함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